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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48화 (448/1,567)

448화. 이렇게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날 줄이야. (3)

“혼원단?”

“네.”

“……과거 천하제일 명의이자 신의였던 약선의 혼원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임소병의 눈이 진지한 빛을 띠었다.

“그 말씀은…….”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이 능수능란하게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버벅대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그…… 천하의 누구도 구하지 못했던, 그 약선의 혼원단을 화산이 확보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러자 잠깐 침묵하던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백천을 보더니 물었다.

“어? 이거 원래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

백천이 입만 쩍 벌리고 아무 말을 못 하고 있자 청명이 다시 임소병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이건 일단 비밀로 해 주세요.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일이라.”

“…….”

임소병은 황당하기 짝이 없단 시선으로 눈앞의 화산 제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은 사실이라는 건가? 거짓이 아니야?’

의자를 움켜쥔 그의 손아귀에 콱 힘이 들어갔다.

‘그럼 그때 검총에서…….’

약선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 역시 가능했다면 당장에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는 하필 중원의 끝에 붙은 산채에 있었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검총의 일이 마무리된 후였다.

달려들었던 모두가 무엇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겨우 아쉬운 마음을 달랬었는데.

“천하를 속이셨군.”

“헤헤. 뭐 말하지 않은 게 속인 건 아니니까요.”

청명의 말에 임소병이 슬쩍 고개를 까딱이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래서 하시고픈 말씀이?”

“뭐, 간단해요. 이쪽은 혼원단으로 셈을 대신 치르고 싶은데요.”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제 병이 뭔지는 아십니까?”

“네, 알아요.”

“……안다고요?”

“네.”

임소병은 의아한 눈으로 눈앞의 도사를 빤히 보았다.

청명은 그를 진맥한 적이 없다. 그의 무위가 고강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진맥이라는 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기운을 느껴야 가능한 일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제가 손을 잡았을 때 진맥을……!”

“아뇨. 그냥 대충 보고 알았는데요?”

“…….”

임소병은 다시 뚱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거, 어디서 약을…….”

“약 파는 게 아니라 진짜 안다니까요. 그 창백한 안색, 이마에 보이는 음기, 폐병처럼 콜록대는 기침, 거기에 총명한 머리와 빛나는 무재!”

청명이 선언하듯 말했다.

“이런 증상을 가진 병은 하나밖에 없죠! 구음절맥(九陰絶脈)!”

임소병이 다시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청명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내 말 맞죠?”

“……아닌데요?”

“네?”

“아니라고요.”

“…….”

두 사람의 허무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냐?”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청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아니라기엔 증상이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데.’

“쿨럭! 쿨럭!”

마침 터져 나온 기침에 임소병의 몸이 한차례 크게 들썩였다. 그는 입을 막았던 손수건을 내려놓으며 쓰게 웃었다.

“애초에 구음절맥이면 제가 아직 살아 있겠습니까?”

“아, 그렇긴 하네.”

청명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음절맥은 인체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아홉 개의 혈이 선천적으로 막혀 있는 병을 뜻한다. 이에 걸린 사람은 뒤틀린 기혈 때문에 총명한 머리와 더없이 뛰어난 무재를 지니지만, 바로 그 뒤틀린 기혈 때문에 스물을 넘지 못하고 요절한다.

“그럼 진짜 아니구나?”

“예.”

“아, 맞는 줄 알았는데.”

입맛을 쩝 다신 청명이 다시 백천을 돌아보았다.

“사숙.”

“응?”

“……일이 꼬였는데 어떻게 하지?”

“…….”

백천의 눈가와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진짜 죽었으면 좋겠다. 진짜.’

원시천존이시여.

왜 이런 새끼를 화산에 내리셔서 저를 괴롭히십니까! 왜!

백천이 대꾸를 않자 청명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임소병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저…….”

“아! 잠시, 잠시! 말하지 마요! 내가 맞혀 볼게!”

청명의 눈이 승부욕으로 희번덕대었다.

“구음절맥과 증상은 비슷한데, 아직 살아 있다! 그럼…… 한 칠음절맥 정도?”

“…….”

“아니면 삼음절맥?”

백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니면 이음!”

듣다 못한 백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그게 때려 맞힌다고 될 일이냐! 왜 확신도 없이 일을 벌…….”

하지만 그 순간 임소병이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그걸 맞히시다니!”

“…….”

백천의 시선이 임소병에게로 획 돌아갔다.

“……맞혔다고요?”

“예.”

“…….”

맞혔다고?

세상 모든 의욕이 백천의 눈에서 파스스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소병은 정말로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화산신룡이시군요.”

“헤헤, 뭘요. 보통이죠.”

백천의 어깨가 축 처지자 윤종이 다독여 주며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진정하십시오, 사숙. 어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습니까.”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서 그래.”

“그 또한 맞는 말이네요.”

백천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와중, 임소병이 부채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음하고도 반음절맥쯤 됩니다.”

“……그게 뭐 시전에서 저울로 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백천의 물음에 임소병이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이게 혈이 얼마나 막혔느냐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 법이라, 아홉 개가 막히면 구음절맥이고, 세 개가 막히면 삼음절맥, 그리고 두 개 반이 막히면…….”

“……됐습니다.”

더 들으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백천의 반응에 임소병이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게 음한절맥류의 최고봉이 구음절맥이고, 최약체가 삼음절맥인데, 저는 삼음절맥보다 좀 나은 처지지요. 대혈 두 개가 완전히 막히고, 하나가 반쯤 막혀 있는 거라.”

“……그거 굉장히 어정쩡한 병이네요.”

“제 말이 그 말이죠.”

임소병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무시하자니 부작용이 너무 심하고, 그렇다고 고치자니 방도가 없고, 끄응…….”

청명이 가만 듣다 거들었다.

“어쨌든 수명은 또 줄고.”

“그도 그렇습니다.”

임소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청명의 눈이 빛났다.

“차라리 잘됐네요. 구음절맥쯤 되면 혼원단으로도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할 순 없는데, 이음……. 아니, 이음하고도 반음절…….”

“그냥 이음절맥으로 하십시다.”

“네. 이음절맥쯤 되면 혼원단으로 확실히 고칠 수 있을 거예요.”

임소병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혼원단이라.’

절맥은 영단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영단은 무공을 진전시키기 위한 수단이지, 치료의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원단은 그런 일반적인 영단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혼원단은 무파에서 만든 게 아니라 화타의 재림이라 불렸던 약선이 만들어 낸 것. 혼원이라는 말 그대로, 조화가 깨진 육체를 회복하는 데는 고금제일의 효과가 있다고 불리던 약이다.

‘확실히 혼원단이라면…….’

청명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분명 대화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하나.

“……그런데 뭐, 제가 지금 혼원단이 크게 필요한 건 아니라서. 좀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눈을 가늘게 뜬 임소병이 짐짓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자 청명이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 서로 쓸데없는 짓은 빼죠.”

“…….”

“좀 이상하잖아요. 저한테는 녹림은 제 실력을 보여 주면 확실히 따른다고 해 놓고, 본인은 정체를 숨기면서 번충을 앞에 내세운다……. 저 같으면 그런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을 거거든요.”

“제 취향이 좀 그쪽이라.”

“딱히 취향 때문에 번거로움을 자처하실 분 같지는 않은데?”

임소병이 가만히 청명을 응시했다.

하지만 청명은 그 위압감 실린 눈빛을 받고도 히죽히죽 웃었다.

“이유는 생각해 보면 간단하죠.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라, 드러내지 못하는 거예요. 저 산적들이 폐병 걸려 콜록대는 녹림왕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요. 반란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결속은 확실히 약해질걸요? 아닌가요?”

“흐음.”

임소병은 다리를 꼬고 앉아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해석이네요. 일리도 있고.”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만인방과 싸우느라 녹림왕에게 불만이 돌아갈 리 없겠지만, 상황이 좀 진정되면 이야기가 달라질걸요? 음……. 잠깐만, 혹시 만인방과 전쟁을 시작한 것도 녹림인가요?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서?”

촥.

부채를 접은 임소병이 그 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적당히 얼굴만 보고 헤어지자고 했더니, 배 속까지 보겠다고 칼 들고 오는 양반이시네.”

“뭐 뻔히 보이는 걸.”

“그 뻔히 보이는 걸 남들은 몰랐습니다.”

임소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여기까지 들어와 놓고 손 털고 나가겠다 하면 이쪽도 영 찝찝해서 그냥 보내 드리기 애매할 것 같은데?”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한기가 어렸다.

하지만 청명은 살짝 사나워진 그 기세 앞에서 되레 웃었다.

“질문이 잘못됐죠. 원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니까요.”

“네?”

“야! 의자 가지고 와!”

청명의 말에 조걸이 움찔하여 의자로 달리려는 순간, 그보다 몇 배 빠르게 번충이 달려 나가 의자를 대령했다.

“…….”

임소병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그런 번충을 보았다.

“쟤는 또 왜 저래?”

“……설명하자면 깁니다.”

백천이 힘없이 대꾸했다.

청명은 번충이 가져온 의자에 앉더니 똑같이 다리를 꼬았다.

“지금 사태파악이 안 되신 모양인데.”

“…….”

“좋게좋게 말해 주니 영 이해가 느리시네. 모르겠어요? 내가 혼원단을 가지고 있다니까? 혼원단?”

“…….”

“그, 어? 약선이, 어? 혼을 갈아 만들어 놓은! 이제 세상에 얼마 남지도 않은 그 혼원단을 내가 가지고 있다니까? 그쪽이 가진 골치 아픈 문제를 대번에 모조리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혼원단을?”

“…….”

임소병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 원하는 게, 뭐? 아이고오, 이 양반이랑은 거래를 못 하겠네. 내가 여기 아니면 뭐 팔 데 없는 줄 아나? 지금도 나가면 이거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어요! 줄을!”

청명이 팔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미간을 문질 대었다.

“아, 줄 이야기 하니까 술 땡기네. 여기 술…….”

착.

말하기도 전에 이미 준비해 뒀는지 번충이 재빨리 다가와 술병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청명도 살짝 당황했다.

“……고맙다.”

“아닙니다, 형님!”

얘…… 생각보다 엄청 좋은 애네?

병의 마개를 딴 청명은 거의 들이붓다시피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병을 과격하게 내려놓았다.

“카아아아아아!”

소매로 입가를 쓱 닦음과 동시에 입가에 미소가 씨익 번졌다.

“자, 그러니까 잘 들어 보세요.”

임소병은 반쯤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청명을 응시했다.

“댁은 지금 하루빨리 병을 고쳐서 녹림을 제대로 장악해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처럼 녹림왕이면서도 녹림왕이 아닌 척 돌아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겠지. 왜? 만인방이 최우선적으로 녹림을 정리하려고 발악할 테니까.”

“…….”

“전쟁이 격해지면 나서지 않을 수 없다니까. 그런데……. 전쟁이 격해져서 어쩔 수 없이 나섰더니, 응? 녹림왕이 그 폐병쟁이였네?”

임소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기에 아직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 봐. 녹림이 와해되는 건 한순간이죠. 그걸 그쪽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어쩔 수 없으니까 이 상황을 유지한 거죠?”

임소병이 머리를 벅벅 긁어 젖혔다. 길게 자라난 머리가 제멋대로 들썩였다.

“끄응. 도무지 도장에게는 못 당하겠군요.”

“그런데!”

청명은 아주 흥이 제대로 난 듯 손까지 붕붕 내저었다.

“이 모든 문제가 혼원단 한 알이면 싸악 풀린다니까?! 싸악! 아주 그냥 시원하게! 어? 딱 한 알이면!”

그 모습을 보던 백천은 흐뭇하게 웃었다.

‘진짜 약을 파네.’

‘대놓고 약 파는데요?’

전문 약장수가 빙의라도 한 양, 청명은 임소병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러니까!”

쾅!

청명의 손이 의자를 콱 내리쳤다. 그 바람에 의자 손잡이가 부서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시선을 단번에 집중시킨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뭘 원하느냐고 물을 게 아니죠.”

“…….”

언제 열변을 토했냐는 듯, 청명은 아주 느으릿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얼마 내실 건데?”

“…….”

“선 제시요.”

파랗게 질린 임소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열렸다.

“배, 백만…….”

“어? 안 들리는데?”

“조건 다 받고 백만 냥 추가!”

“아이고. 다른 데다 팔면 오백만은 받고도 남는데.”

“그, 그럼 이백만!”

“사형들. 짐 쌉시다!”

“사, 삼백! 삼백 이상은 무리요! 삼백! 도장! 제 처지도 좀 봐주십시오!”

“산적들이 요즘 영 돈을 못 버나 보네. 삼백이라니. 그냥 내가 먹고 콱 죽어야지.”

“사, 사백은 무리…….”

흥정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백천과 그 일행은 근본적인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 사숙.’

‘응?’

‘그런데 지금 화산에 혼원단이 남은 게 있습니까?’

‘……저번 만인방 전투 때 다 쓰지 않았냐?’

‘그런데 쟤는 지금 뭘 파는 겁니까?’

‘보면 모르냐?’

‘예?’

‘사기 치는 거잖아.’

‘…….’

다리를 꼰 채 희희낙락하는 청명과 그런 그를 필사적으로 설득하는 임소병의 모습을 보며 조걸은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사가 산적한테 사기를 치네.’

어디서 벼락 안 떨어지나?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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