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447화 (447/1,567)

447화. 이렇게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날 줄이야. (2)

“흐음.”

임소병은 섬세한 손길로 학창의에 붙은 호랑이 털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

“……가죽을 갈든지 해야지.”

의자에 씌운 호피를 보는 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크고 질 좋은 호피를 쓰는 게 산적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들고 다니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 번잡스럽고 불편했다.

이젠 털도 많이 빠지고.

“적당한 놈으로 하나 새로 잡아 봅니까?”

“냅둬라.”

임소병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까운 호랑이를 또 죽일 필요야 있겠느냐? 산에 호랑이 같은 맹수가 많이 나와야 일하기가 쉬워지지. 밥은 못 줄망정 쓸데없이 죽여서야 쓰나. 그런데 털이……. 에헤에에에취!”

크게 재채기한 임소병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것도 못 할 짓이지.”

임소병이 고개를 들어 흑야호 곽민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떻던가?”

“산채의 식구들은 화산의 제자들을 완전히 손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무척이나 우호적입니다.”

“그렇겠지.”

임소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본 것에는 확신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철신장이 큰일을 해 줬어.”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흑야호가 살짝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아아. 뭘 물으려는 건지 알겠군. 나는 그런 적 없어. 그건 정말 실력이야.”

“…….”

“그리고 번충이 어디 내가 시킨다고 들을 사람인가?”

흑야호가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번충은 임소병이 시킨다고 해서 일부러 승부에서 패배할 사람이 아니다. 충성심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확고한 주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사라지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사람을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

임소병이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말 재미있는 놈들이야.”

흑야호는 머릿속으로 청명을 떠올리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경박한 이가 힘 하나로 번충을 꺾어 버릴 줄이야.’

화산신룡이 처음부터 신력으로 이름이 난 이였다면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천하가 칭송하는 화산신룡의 절학은 검술이었다.

차기의 천하제일검 자리를 도맡아 놨다고 불리는 이가 아닌가?

확실히 그런 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때, 생각에 잠긴 곽민을 향해 임소병이 말했다.

“그런데.”

“예.”

“번충은 어디 있는가? 아침부터 보이질 않던데.”

“아. 아마 지금 화산의 처소에 있을 겁니다.”

“호오?”

임소병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하긴, 확실히 그 자존심에 그리 당하고는 못 참았겠지. 이 기회에 화산신룡의 검술마저 견식할 수 있으면 좋겠군.”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 * *

“물.”

“…….”

커다란 두 눈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탁.

“잔도.”

우두두둑.

솥뚜껑 같은 손이 꽉 쥐어지자 뼈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탁.

“따라 봐.”

졸졸졸.

“흐으으으음.”

청명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어깨도 좀 주물러 봐.”

철신장 번충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조물조물.

“어허, 시원하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천과 그 일행은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게 뭔 엿 같은 일이여?’

결국 참다못한 백천이 작게 물었다.

“……저게 뭐 하는 거래?”

그러자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힘 대 힘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남자로서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한다더군요.”

“……그래서?”

“형님으로 모시겠답니다.”

희게 질린 백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형님?”

“……예.”

“저분이, 저거를?”

“예.”

청명의 어깨를 조심스레 주무르는 번충을 향해 시선을 돌린 백천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의형제가 아니라 아빠랑 아들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뭔.’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지만 산적이 도사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겉으로 보기에 좀 어울리기라도 하면 모를까.”

“저도 그렇게 말은 했는데 말입니다.”

“했는데?”

“사나이끼리는 통하는 게 있답니다.”

“…….”

백천의 눈은 그의 심경과 마찬가지로 한껏 복잡해졌다.

한 손으로는 청명의 어깨를 주무르며 다른 한 손으로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는 번충의 모습을 보자니 속이 뒤집어질 판이었다.

‘아니, 애초에 저건 동생이 하는 일이 아니잖아?’

저 사람의 형제 개념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것인가?

“……왜 쟤는 저런 사람들이랑만 친해지는 건데?”

“애초에 합이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청명이 놈도 도포 입히고 도관 씌워 놔야 도사 취급이나 받지, 평상복 입히면 산채 드나들어도 누가 이상하게나 생각하겠습니까?”

“…….”

그 말이 딱히 틀리지 않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백천의 속이 썩어 들어가는 와중에도 청명은 그저 편안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덩치는 산만한데 왜 이리 힘이 없어! 콱콱 좀 주물러 봐!”

“예, 형님!”

번충은 아예 부채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청명의 어깨를 꾹꾹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허, 시원하다.”

청명이 배부르고 등 따신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늘어졌다.

“그래도 안마는 좀 하네.”

“…….”

그러자 번충이 눈을 희번덕대며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백천이 움찔했다.

‘저거 일 나는 거 아닌…….’

“감사합니다, 형님!”

백천은 무색해진 걱정일랑 고이 접어 버리고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나는.

그때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와 있어도 되는 거야? 녹림왕이 섭섭해할 수도 있잖아.”

“녹림도로서 녹림에 충성하는 것과 형님을 모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번충이 딱 잘라 말했다.

“이 번충! 그동안 수많은 녹림도를 만나고 수많은 고수를 만났지만, 저를 힘으로 꺾는 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 사내다움에 진심으로 감복했거늘 어찌 형님을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정성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말이었다.

상황이 이렇지 않고, 저 말을 듣는 놈이 청명 같은 놈팡이만 아니었어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참담하고 참혹했다.

백천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백상을 돌아보았다.

“아니. 비무에서 졌다고 일이 저렇게 전개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진짜 사나이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법이지요.”

“그게 뭔 소린데?”

“우리랑은 좀 사고방식이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바보들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을 최대한 돌려 말하는 백상이었다.

“진정한 의리는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는 법입니다. 이 번충! 지금부터 형님의 동생으로서 진정으로 그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번충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조걸이 흐뭇하게 웃었다.

“보통 저런 식으로 흑도방이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흐, 흑도방?”

“예. 호걸 몇이 서로 싸움박질하다 의기투합하면 그날로 의형제 맺는 거고, 그게 커지면 간판 달고 흑도방 하나 만드는 거죠.”

백천은 이미 식은땀으로 서늘해진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진짜 그럴까 봐 겁난다.

그 와중에 슬쩍 번충을 바라본 청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형님!”

“녹림왕은 나이가 좀 어린 것 같던데? 겉으로 보기에는 너보다 더 어려.”

“맞습니다.”

번충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 녹림왕께서는 선대에게서 녹림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엥? 녹림왕이 세습이야?”

“기본적으로는 가장 강한 산채의 채주가 역임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수백년 간 녹채(綠砦)보다 더 크고 강한 산채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녹림왕의 자리도 녹채에서 세습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

세습이라.

녹림이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왕이라는 이름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래도 불만이 아주 없지는 않을 텐데?”

번충은 그 질문이 미묘하게 불편한 듯했다. 어색하게 웃기만 하고 답을 피하는 것이 그랬다.

그러자 청명이 능수능란하게 말을 덧붙였다.

“에이. 이제 우리가 한 배를 타게 된 입장이니, 그런 부분에서 도와줄 게 없나 해서 묻는 거지. 내가 그래도 명색이 도산데 녹림 상황이 어떤지 알아서 어디다 쓰겠다고.”

“아, 그런 뜻이……!”

화산의 제자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여튼 저 새끼는 지 필요할 때만 도사래.’

‘산적이든 도사든 하나만 해라! 하나만!’

그들에게는 청명의 수작질이 빤히 보였다. 하지만 번충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현 녹림왕께서 워낙 은인자중하시어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선대의 영향력이 강해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음. 선대가 그렇게 뛰어났나?”

“선대께서는 장부 중의 장부셨고, 호걸 중의 호걸이셨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적에는 감히 저 장일소 같은 개잡놈이 녹림을 넘보지 못했는데! 그분이 돌아가신 뒤로는 슬금슬금 녹림에 시비를 걸어오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분하다는 듯 번충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선대께서 살아 계셨다면, 일 도에 그놈의 목을 베어 버리셨을 텐데.”

청명은 머릿속으로 가만 상황을 정리했다.

‘장일소가 시비를 걸었다?’

하기야 그 만인방주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는 없다.

다만…….

“흠, 알겠군.”

고개를 끄덕인 청명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이제 협상을 마무리해야지.”

그러더니 씨익 웃었다.

“내가 산적도 아닌데 언제까지 산채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

아니.

너 산적 같아.

* * *

“신수가……. 쿨럭! 훤하십……. 쿨럭! 아이고! 오늘따라 기침이……. 쿨럭! 쿨럭!”

임소병은 아예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청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폐병이에요?”

그 질문을 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슬쩍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임소병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건 옮는 병이 아닙니다. 제가 선천적으로 몸이 좀 약해서 그렇지요.”

“……그래 보이네요.”

“하하. 타고난 것을 어찌……. 근데 왜 자꾸 뒤로 가십니까.”

“안전한 게 좋죠, 안전한 게.”

“…….”

이마와 미간이 새파랗게 질린 임소병은 지금 당장 관짝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입가를 살짝 닦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네. 그런데 가기 전에 일단 돈 문제부터 끝을 내려고요.”

“돈 문제라.”

임소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서로가 조금 더 많은 자료를 보고 심사숙고한 후에 결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듣자 하니 아직 어떤 식으로 일을 운용할 것인지도 확정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렇죠. 그런데…….”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런 복잡한 방법 말고 간단하게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있을 것 같아서요.”

“간단하게?”

임소병이 흥미롭다는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는 도장께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이, 아시면서.”

임소병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간단하게’라 함은 결국 녹림에게 금전보다 더 필수적인 것을 내어 주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산이 이쪽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도장께서 뭔가를 준비하셨군요.”

“네. 들으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걸로요.”

“쿨럭! 쿨럭! 그게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표물 사업에 관련된 인원들이 산채를 이용하고 보호를 받는 대가로…….”

청명이 히죽 웃는다.

“녹림왕의 병을 고쳐 드리는 건 어떨까 해서요.”

잠깐 멈칫했던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뭔가 했더니 그 말씀이셨군요. 도장, 말씀드렸다시피 이 병은 선천적인 거라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네, 그렇겠죠.”

“저는 녹림왕입니다. 이미 방도는 수도 없이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병은 소림의 대환단을 먹는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네, 그렇겠죠.”

청명은 놀라거나 실망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혜연을 데리고 오지 않기를 잘했다. 그 땡중이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었겠지.

“그런데 도장께서 무슨 수로 저를 낫게 하시겠습니까.”

“대환단은 안 되죠.”

“예.”

“하지만…….”

청명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퍽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약선의 혼원단쯤 되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요?”

임소병의 눈빛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