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이렇게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날 줄이야. (1)
“……세상에.”
“저 철신장 님을…….”
대호채의 산적들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녹립십영 중 하나인 철신장이 패배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녹립십영이라는 이름은 녹림에서는 강함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절대의 상징은 아니니까.
하지만 저 철신장이 다른 무엇도 아닌 힘에서 꺾였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철신장이 누구던가.
이 녹림의 수많은 산채와 그 산채마다 모인 바글바글한 산적들 중에서도 힘으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였다. 그런 그가 저 작은 도사에게 힘으로 완전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
당황하여 철신장 번충을 멍하니 보던 그들은 하나둘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황급히 그를 향해 달려갔다.
“철신장 님!”
“빠, 빨리 들것을 가져와라! 빨리!”
허리가 뒤틀린 채 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만 보면 정말이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중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호들갑에 청명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요. 그냥 기절한 거니까. 적당히 안 다치게 잘 조절했어요.”
“하지만 허리가……!”
“근육이나 좀 다친 거예요. 별문제 없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아……. 그렇다면야.”
산적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철신장의 상태야 직접 겨룬 청명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대단하십니다, 소도장.”
그들은 감탄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런 힘겨루기에서 상대가 다치지 않게 조절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무학을 익힌 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저 철신장 번충을 상대하면서 그런 여유까지 보이다니.
“뭘요. 별것 아니죠.”
“아닙니다, 아닙니다! 진짜 대단한 일이지요. 세상에! 그런 신력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헤헤. 진짜 별것 아닌데.”
“진짜 용력은 하늘에서 내려 준다더니! 도장이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신장인 모양입니다.”
청명이 뒷머리를 멋쩍게 벅벅 긁으며 웃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눈치를 보던 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런 그를 둘러쌌다.
“세상에, 몸이 그리 우락부락한 것도 아닌데.”
“아니지, 아니지! 이 팔을 보라고! 이 강철같이 단단한 팔뚝 좀 보라니까.”
“어이쿠! 눌렀는데 들어가지도 않아.”
“이야! 이쯤은 돼야 철신장 어른을 힘으로 꺾을 수 있는 거로군! 덩치가 전부가 아니었어!”
쏟아지는 찬사와 환성에 청명의 입꼬리가 연신 실룩였다.
‘이건 또 새로운 맛이네.’
물론 환호를 받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 환호의 결이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무학이 아니라 순수한 힘에 대한 찬사는 남자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금강역사! 금강역사!”
“헤헤.”
“남자는 힘이지! 힘!”
“헤헤헤헤.”
“크으! 천하제일역사가 여기에 있구나! 천하제일역사가!”
“꺄르…….”
산적들이라 그런지 호들갑도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아예 청명을 에워싸며 우글거리는 산적들의 모습에, 윤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방금 같은 편이 허리가 꺾였는데 저 반응은…….”
그러자 임소병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녹림의 율법은 강자존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녹림을 평범한 문파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임소병이 부채를 펴 들었다.
“녹림의 산채는 천하에 퍼져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같은 녹림에 속해 있으면서도 평생 서로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의미입니다.”
“아…….”
그의 눈이 살짝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실 이는 녹림의 가장 큰 문제였다.
녹림은 거대 세력인 동시에 여러 산채가 힘을 합친 연합체다. 녹림왕의 권위는 확실하지만, 그건 오로지 녹림왕의 권위일 뿐. 산채끼리는 강한 산채든 약한 산채든 서로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천하에 퍼져 있는 개방이 일결부터 십결까지의 계급을 만들어 상하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반면, 녹림은 한 산채 안의 제각각의 계급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서로 영업 구역이 겹치거나 문제가 생기는 경우 산채끼리 서로 전쟁을 벌이는 일도 허다했다.
대대로 녹림왕이 자신의 산채가 있음에도 천하를 유랑하듯 돌아다녀야 하는 이유도 산채끼리의 분쟁을 다스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녹림에게는 아군이라는 개념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저 동업자일 뿐이지요. 그런 녹림을 하나로 엮어 주는 개념이 강자존입니다. 더 강한 이가 우리 편이 된다면 먹고살기가 좀 더 편해지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윤종이 조금 머쓱한 얼굴로 말하자 임소병이 씩 웃었다.
“정파의 협객 여러분들이 처음 강호행을 나와서 찾는 곳이 어딥니까?”
“크흐흐흠.”
그 말에 백천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면 화정검께서도…….”
“그…….”
그는 청명과 함께 강호로 나와 협객행을 하던 중 산적과 무뢰배들을 무찔러 화정검이라는 별호를 얻었었다.
나름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산적 두목(?)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입장이 애매해졌다.
“괜찮습니다. 굳이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은 일이니까요.”
“……크흠.”
백천이 어색한 낯으로 고개를 돌리자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런 산채는 녹림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작은 채입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산채라고 하더라도 그런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화정검처럼 산채를 무찔러 명성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조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력이 크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하나하나는 약하다는 소리니 말이지요.”
“정확합니다.”
임소병이 마음에 든다는 듯 조걸을 바라본다.
“녹림칠십이채는 두렵지만, 산채 하나는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꽤 있습니다. 막말로 절대고수가 산채에서 난동을 피운다면 그걸 뭘 어쩌겠습니까? 관에 신고할 수도 없고, 도와줄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렇기에 녹림도들은 자신의 뒷배가 되어 줄 수 있는 강자를 숭배합니다. 산적이라 머리가 단순해서 강자를 숭배하는 게 아니라, 강자가 그들의 삶을 지켜 줄 수 있기 때문에 인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겁니다.”
“으음.”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왜 저리 열광적인 반응이 나왔는지 알 것 같다.
임소병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청명을 보며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도장도 보통은 아니군요.”
“예?”
“접근하기 어려워하던 녹림도들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고, 너스레를 떨어 주어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드러냈습니다. 도장께서 승부가 난 뒤 말없이 돌아왔다면 저런 광경이 벌어졌겠습니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안다는 의미지요.”
“어…….”
“도사라는 입장을 생각하면 산적들과 저리 격의 없이 대화하는 게 쉽지 않을 터인데, 말 몇 마디로 분위기를 주물러 버리다니……. 과연 인물은 인물이군요.”
“…….”
슬쩍 임소병의 눈치를 살핀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쟤 원래 저런데…….’
‘뭔가 심각한 오해가 생기고 있는 거 같은데?’
청명은 그 살벌했던 구파 비무 대회에서도 칭찬만 들으면 자지러졌던 놈이다. 산적이고 나발이고 칭찬만 해 주면 원래 저런다고!
“여하튼…… 그럼 잘 풀린 건가요?”
“네. 그렇죠. 아주…….”
임소병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과도하게 잘 풀렸죠.”
그런 그의 눈빛이 은근하게 빛났다.
‘설마 힘으로만 꺾어 버릴 줄이야.’
강자를 숭배한다고는 하지만, 그 강자에도 결이 있는 법이다. 강자를 숭배하는 게 나름 합리적인 생존 의식에서 나온다면, 신력이 강한 자를 선호하는 것은 녹림 나름의 취향이라 할 수 있었다.
청명은 가장 완벽한 형태로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곧 천하의 산채로 퍼져 나갈 것이다. 임소병이 그리할 테니까.
“만세!”
“화산신룡 만세!”
그가 미리 심어 놓은 이들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청명이 해 놓은 것만으로도 이 분위기는 자연히 만들어졌을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에 만족한 임소병은 흡족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나 외쳤다.
“자, 술을 마십시다! 본래 큰일을 치르고 나면 술을 마셔 잡스러운 것을 날려 버리는 법이지요! 여기! 여기 술을 가져……. 쿨럭! 에헤헤이! 쿨럭!”
“……피 나오는데요?”
“아. 옮는 병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십……. 쿨럭! 으……. 죽겠다. 쿨럭! 쿨럭!”
백천과 일행은 내장이라도 토할 듯 연신 기침하는 임소병에게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둘러싸인 청명을 바라보았다.
윤종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저만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마침 나도 그 생각 중이었다.”
“사숙도? 와 나두!”
백천이 힘없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산적이고 누가 도사인지도 모르겠군.”
“정말 잘 어울립니다. 애초에 여기서 살던 놈 같아요.”
“그러게.”
그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산적들의 함성과 꺄륵대는 청명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화톳불이 타오른다.
지글거리는 불 위에서 돼지가 통째로 구워지고, 여기저기로 술 단지가 날라졌다. 산적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호쾌하게 술을 마셔 댔다.
홍대광의 눈이 미묘하게 떨렸다.
‘이거 어디서 본 광경 같은데?’
착각인가?
아, 아니 착각이 아니고…….
그가 아무리 견문이 넓다고 한들, 산적들이 산채에서 어떤 식으로 잔치를 벌이는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러니 화산에서 벌였던 잔치가 산적 놈들이 하는 양 같다는 말은 그저 표현의 일종일 뿐이었는데…….
“진짜 똑같잖아?”
아니, 오히려 화산 쪽이 좀 더 원조(?)로 보일 지경이었다. 적어도 이 산적 놈들은 웃통을 까고 술을 단지째 들이켜지는 않으니까.
아, 마치 그대로 옮겨 온 듯 똑같은 것도 있다.
“크하하하하! 내 살다 보니 스님과 술을 마시는 날도 오는군! 드시오! 드시오, 스님!”
“아미타불. 시주들께서는 곡차에 영 익숙지 않은 모양입니다. 잔에 곡차를 마시는 것은 주도가 아닙니다.”
“어이구? 이 스님 보게?”
“자, 잔은 거두시지요. 제대로 한번 마셔 봅시다.”
이윽고 자연스레 병나발을 부는 혜연의 모습에, 홍대광은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문방장.’
저 사람을 왜 화산으로 보내셨소?
대체 무슨 꼴을 보겠다고.
혜연은 어느새 화산의 색으로 잔뜩 물들어 버렸다.
홍대광은 깊이 탄식했다. 소림을 상징하는 황포를 펼치고 두주불사하는 꼴이, 누가 봐도 죄를 짓고 소림에서 달아난 파계승이다.
그리고…….
“너, 넘어간다!”
털썩.
“크으으으.”
바닥을 뒹구는 사람들 옆에 또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조걸은 술병을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쓰러진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더니 반쯤 풀린 눈으로 말했다.
“에이. 술 잘 마시는 사람 없어요? 뭔 산채가 이래?”
“비, 비켜라! 내가! 내가 상대한다!”
“좋지, 좋지요. 자! 드십시다!”
홍대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쪽에서는 조걸이 술로 산적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화산에서는 그리 술을 잘 마시는 축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라고, 청명 같은 주정뱅이가 없는 곳에서는 조걸도 나름 먹어 주는 모양이었다.
“…….”
뭐랄까.
여기는 분명 대호채인데, 술자리는 되레 화산의 제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화산이 산채를 차려 놓고 손님을 받는 듯한 모양새다.
“여하튼 진짜 특이한 놈들이라니까.”
혀를 내두른 홍대광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특이한 건 역시 저놈이었다.
“한 잔 받으십시오.”
임소병이 구겨진 관을 쓱 올리더니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 청명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흐음.”
청명도 빙그레 웃으며 술을 받았다. 청명이 술을 입에 털어 넣자 임소병이 말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에이. 덕분은요. 녹림……. 아니, 병서생께서 힘써 주신 덕분이죠.”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 머리를 썼다고 할게요.”
“흐음.”
그 공치사가 싫지 않다는 듯, 임소병이 입꼬리를 쭉 말아 올렸다.
“하핫. 따지고 보면 제 판단이 나쁘지는 않았죠.”
“그럼요, 그럼요.”
“그리고 도장께서도 역시나 영민하십니다.”
“헤헤.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유이설과 윤종의 얼굴이 차츰 썩어 들어갔다.
‘민망하지도 않아?’
‘둘이서 하늘까지 올라가겠네.’
남이 띄워 주지 않아도 둘만 있으면 세상 끝까지 오를 기세였다.
“하하하. 제가 이렇게 도사분과 술을 마시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그래요. 설마 녹림 분과 같이 잔치를 벌일 줄이야.”
임소병이 활짝 웃으며 청명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뜻만 맞으면 출신 같은 거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렇죠, 그렇죠. 뜻이 중요하죠.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의 눈이 살짝 차게 빛났다.
아주 찰나에 스치고 지나간 한기였지만, 임소병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최소한 동료가 될 수는 있죠. 만인방이 존재하는 한은 말이죠.”
임소병의 입가가 비틀렸다.
“적의 적이라.”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비우자 다시 술이 따라졌다.
잔이 가득 차고, 청명은 술병을 받아 임소병의 잔에 똑같이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서로가 너무 마음에 든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너무 친해지는 게 아닌지 윤종과 유이설이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이들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산적 새끼가!’
‘도사 놈이 빤하지!’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눈빛으로 교감을 나누었다.
“우정을 위하여!”
“동료를 위하여!”
짠!
둘의 잔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하하하. 이렇게 마음이 맞는 분을 만날 줄이야.”
“그러게요. 저도 신기하네요.”
흐뭇한 미소를 교환하며 두 사람은 생각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확실하게 이용해 주마.’
‘골수까지 빼먹어 주지. 너 잘못 걸렸어!’
세상에서 가장 음흉한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속였다고 자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