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445화 (445/1,567)

445화. 뭔 산적이 이래? (5)

번충의 덩치는 평범한 사람의 두 배를 가뿐히 넘어섰다. 그리고 청명의 몸은 평범한 무인에 비하면 오히려 조금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런 두 사람을 동시에 보자니 번충이 청명보다 족히 세 배는 더 커 보였다.

기세를 끌어 올리며 달려드는 번충 앞의 청명은, 흡사 미친 황소 앞을 가로막는 작은 족제비 같았다.

“저……!”

“무슨!”

모두의 입에서 경악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임소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청명은 번충을 피해 달아나기는커녕 오히려 두어 발짝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무슨 짓을!”

물론 청명이 번충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천하에 이름 높은 화산신룡이다. 번충을 상대로 필승을 자신할 수는 없겠지만, 패배를 논할 정도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검을 들었을 때의 이야기.

화산이 권장지각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배짱을 부려 맨손으로 번충을 상대하려 드는가?

그런데 그 순간 임소병의 귀에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쯧쯧. 저러다 다칠 텐데.”

“그러게.”

임소병은 경악한 얼굴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사형제가 수레에 치인 사마귀 꼴이 되기 일보 직전인데, 저 여유로운 얼굴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임소병이 질문을 던질 여유 따윈 없었다. 그새 날아든 번충이 청명이 덮치듯 팔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노오오오옴!”

높이 들렸던 그의 팔이 청명의 머리를 향해 있는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순간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두 사람의 모습이 잠깐 가려졌다.

지켜보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산적질을 하며 험한 꼴이야 웬만큼 봤다고 자부하지만, 곧 눈앞에 펼쳐질 광경은 눈 뜨고 보기에는 너무도 참혹할 것이 분명했다.

‘죽었나?’

‘쯧쯧. 그러게 왜 사람을 긁어서는…….’

잠시 후 슬그머니 실눈을 뜬 산적들은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힐끔거렸다.

하지만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모습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어?”

“저, 저게 뭔…….”

팔.

과격하게 내리꽂히던 번충의 팔은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리고 어지간한 장정의 허리보다 더 굵은 그 팔 아래, 그에 비하면 부지깽이처럼 얇아 보이는 팔 하나가 쭉 뻗어져 있었다.

산적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며 눈을 부릅떴다.

‘막았다고?’

저 팔로, 저 기둥 같은 팔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광경을 무슨 수로 부정한단 말인가.

“……세상에.”

위압적이기 짝이 없던 번충의 얼굴 위로도 어느새 당혹감이 번져 있었다.

“이, 이놈…….”

“쯧.”

아무렇지도 않게 번충의 팔을 막아 낸 청명은 작게 혀를 찼다.

“뭘 이렇게 요란하게.”

그리고 그 거대한 팔을 가볍게 밀어 냈다.

잠깐 넋을 놓았던 번충이 그 바람에 화들짝 놀라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는 멀쩡해 보이는 청명의 가느다란 팔과 제 팔을 번갈아 보았다. 직접 겪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쇳덩어리라도 후려친 줄 알았다.

수련을 할 때마다 쳐 대었던 만년거암 같았다. 저 작은 손에서 그런 강도를 느끼게 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명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양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거, 생각보다…….”

“…….”

“비리비리하시네.”

청명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정말이지, 상쾌한 미소였다.

한편, 임소병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평소 어지간한 일에는 쾌활하고 능글맞은 태도를 유지해 왔건만, 지금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막았다고?’

번충의 공격을? 그것도 저리 쉽게?

무공은 몰라도 신력(身力)으로 따진다면, 녹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가 바로 번충이다.

번충보다 무위가 높은 이들도 어지간해선 그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받으려 들지 않았다.

범이 황소보다 강하다고 해도 황소에게 정면으로 들이받히면 박살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데 범은 고사하고 겨우 여우나 될 법한 덩치를 가진 청명이 달려드는 황소를 앞발로 막아 버린 것이다.

“아니…….”

물론 신력이 전부는 아니다.

무인의 힘이란 타고난 힘이 반, 내력이 나머지 반 아니겠는가. 아니, 어쩌면 내력이 그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 모든 점을 감안한다 해도 비상식적인 광경이었다.

그때, 또다시 화산의 제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저럴 줄 알았지.”

“그러니까.”

임소병이 고개를 획 돌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의 당황한 낯을 본 백천은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놈이 화산 전체를 통틀어 힘이 제일 세거든요.”

“그냥 센 정도가 아니죠.”

“말이 안 되는 수준이지.”

“…….”

임소병은 믿을 수 없는 말에 두 눈을 끔뻑였다.

“저 몸으로?”

“아, 보기에는 그래 보이시겠지만…….”

백천은 쓰게 웃었다.

사실 이건 화산의 제자들이 아니면 믿기 힘들 일이긴 했다.

청명이 처음 청자 배들을 붙들고 시작한 수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유려한 검은 강건한 육체에서 비롯된다.”

“몸뚱이가 못 버티는데 검이 버티겠냐.”

청명의 수련을 떠올리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들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유이설이 조용히 읊조렸다.

“……꼰대.”

하지만 정말로 짜증 나는 점은, 저 청명이 놈이 제가 한 말을 스스로 가장 완벽하게 실천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화산에 있는 쇳덩어리를 다 끌어모아도 저놈 수련을 못 따라가.”

“쇠에다 바위까지 추가해서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잖습니까.”

“……말로만 하면 우리도 할 말이 있을 텐데.”

화산의 제자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임소병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그들과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매를 둘둘 걷자 청명의 팔이 드러났다. 자세히 살펴본 임소병의 입에서 탄성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견 말라 보이는 팔인데,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근육이 흡사 쇳덩어리처럼 단단해 보였다. 대체 얼마나 수련을 해야 저런 근육이 생기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에 반해 여기는 좀.”

“사실 두부살이지, 다들.”

화산의 제자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산적이라는 양반들이 이리 부실해서야.”

“톡 치면 넘어갈 것 같지 않습니까, 사숙?”

도관 쓴 산적(?)들이 진짜 산적들을 보며 혀를 차 대는 꼴이었다. 임소병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알면 알수록 뭐 하는 놈들인지 모르겠구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제 몸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아래 있는 놈들이 무공도 아닌 몸으로 무시당하니 속이 슬슬 긁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산적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는데 말이다.

‘번충! 뭐 하느냐!’

번충을 바라보는 임소병의 눈이 번뜩였다.

“……너.”

번충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도 나름 산전수전을 겪은……. 아니, 사실 수전은 겪은 적이 거의 없지만, 산전(山戰)이라면 닳도록 겪은 이다.

단 일 수의 교환이었지만,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강하다.’

단순히 무공이 강한 게 아니다.

저 육체 자체가 강하다. 내력 운용을 더하기 이전의, 육체 본연의 힘이 그에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쯧.”

혀를 찬 청명이 번충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섰다.

움찔.

번충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금세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대호채의 산적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녹림십영이라는 그가 겁먹은……. 아니,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이놈. 요행으로 한 번은 막았을지 모르지만 그런 운이 두 번 따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래요?”

청명은 이번에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어 양손을 쫙 펼쳐 번충을 향해 뻗은 그가 말했다.

“그럼 와 보시든가. 쓸데없는 잡기술 쓸 것 없이 힘으로만 붙어 보죠.”

번충은 제 것에 비하면 고사리 같은 청명의 손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힘으로 겨루는 대결은 평소 그가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구경하고 있는 다른 이들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후회하게 해 주마!”

잡념을 떨치듯 크게 소리친 번충이 청명의 손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커다란 손과 작은 손이 어찌어찌 맞물려 깍지를 꼈다.

힘과 힘.

내력과 내력의 대결이었다.

“저…….”

지켜보던 이들은 이 놀라운 광경에 숨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리고.

“흐아아아아아아아압!”

번충이 목이 터져라 기합을 내지르며 청명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팔뚝에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돋아났다. 그뿐이랴. 이마에도 굵은 핏대가 선명하게 섰다.

얼굴은 피가 몰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고, 강건한 두 발은 땅을 파고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있는 힘과 내력을 모조리 끌어 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압!”

번충의 모양새는 흡사 금강역사와도 같았다. 그런 그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용을 쓰니, 보는 이들은 그 압박감에 모두 기가 질렸다.

하나.

우둑.

우두두두둑.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퍼지고, 번충의 발이 질질 밀려나고 있음에도 청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칠 공으로 피를 뿜을 듯한 번충과 태연자약한 청명의 모습이 기묘한 대비를 만들어 냈다.

“끄읍! 끄으으으읍! 끄아아아아아!”

마침내 청명의 팔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 젖혀진 손목은 더는 꺾이지 않았고, 청명의 몸 역시 바닥에 박히기라도 한 양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때 청명의 입이 열렸다.

“쯧쯧. 타고난 힘은 좋은데.”

번충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용을 쓰느라 제대로 된 말을 내뱉기도 힘든데 정작 그 힘을 오롯이 받는 청명은 태연자약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목소리에는 힘을 쓰는 기색조차 없었다.

“타고난 힘이 좋으면 뭐 해. 수련은 안 하고 맨날 술 처먹고, 처자고, 돈이나 뺏으러 다니니까 힘이 발전이 없지.”

신랄한 말을 듣고 있던 백천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술은 지도 처먹으면서.”

“……그래도 쟤는 수련은 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다행히 그들의 목소리는 청명에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청명의 말이 이어졌다.

“힘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집중이지, 집중. 그러니까!”

청명이 두 눈을 빛냈다.

단전에 자리하고 있던 청아한 내력이 빠르게 육체를 돌기 시작했다.

우둑!

우두두둑!

번충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기껏 밀어 놓았던 팔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어마어마한 거력이 그의 팔을 타고 전해져 왔다.

“이, 이럴……. 이럴 수는…….”

“읏차!”

손을 쭉 뻗어 낸 청명이 맞잡은 번충의 팔을 아래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꾸드드득.

비틀리는 소리가 마치 빨래에서 물을 짜내는 것 같았다. 번충의 아깨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끄……. 끄으으으윽!”

번충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저항했지만, 청명의 손은 거대한 바윗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번충의 몸은 만년거암에 짓눌린 것처럼 점점 무너져 갔다.

쿠웅!

아슬아슬하게 버텨 내던 그의 무릎이 삽시간에 꺾이며 땅을 내리찍었다.

쿠웅!

다른 한쪽 무릎도 마찬가지였다.

드드득.

하지만 그러고도 힘을 모두 받아 낸 것이 아닌 모양으로, 바닥에 닿은 그의 두 무릎은 점차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끄으윽…….”

청명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번충을 내리눌렀다.

그의 몸이 천천히 뒤로 젖혀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악을 쓰고, 용을 써 봐도 밀어 낼 수가 없다.

“어, 어떻게 이, 이런……. 끄읍.”

허리가 뒤틀린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벌어지고 뒤통수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이 짓눌렸다. 그런 번충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손을 내리누르고 있는 청명뿐이었다.

청명은 딱히 큰 힘을 쓰지도 않는 사람처럼 웃으며 혀를 찼다.

“쥐방울?”

“…….”

“어쩌나, 쥐방울보다 약하신데?”

“…….”

이, 이 새끼 뒤끝이…….

번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청명은 씨익 웃는다.

“이게 힘이라는 거예요, 이게. 으라차!”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힘의 폭풍이 몰아치며 다시 한번 흙먼지가 비산했다.

“으악!”

“뭐, 뭐야?”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산적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흙먼지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고,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쯧.”

청명이 양손을 가볍게 털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정확히는 청명이 아닌, 그의 뒤로 보이는 무언가에게로.

“…….”

번충.

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뒤통수를 댄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의식을 놓아 버린 듯했다.

“…….”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경악에 할 말을 잃은 산적들이 번충과 청명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청명은 그런 그들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또 하실 분?”

“…….”

“없어?”

청명이 혀를 찼다.

“산적이란 양반들이 이리 대가 약해서야! 화산이 더 산적답겠다! 화산이!”

백천은 위풍당당한 사질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청명아. 너 도사다.’

도사라는 놈이 그걸 자랑이라고 하면 안 되지. 그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되었건.

화산신룡 청명이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대호채를 완전히 장악한 순간이었다.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