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뭔 산적이 이래? (1)
백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 이 새끼야! 그게 이 상황에서 할 말이냐!”
하지만 청명은 되레 눈을 까뒤집으며 성을 냈다.
“이 상황이니까 그런 말을 하지! 그럼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
“그래도 명색이 정파의 제자라는 놈이, 산적 놈들을 앞에 두고서 뭐? 지성인? 지성이이이인? 야, 이 새끼야! 산적 놈들이 지성인이면 거지는 문화인이겠다!”
뒤쪽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홍대광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게 그리 틀린 말은…….”
“뭐래.”
“나서지 마십시오, 대협.”
대번에 말허리가 잘린 홍대광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하늘이 흐릿하게 보였다.
‘나 요즘 너무 무시받는 것 같은데…….’
나름 개방에서는 방주 후보이자 촉망받는 인재로 불리던 그가 어쩌다가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단 말인가?
홍대광이 슬픔에 잠겨 있건 말건, 두 사람은 내내 티격태격했다.
백천이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말했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검 뽑아라!”
“이 양반이? 이제는 검만 뽑으면 뭐가 다 되는 줄 아네?! 야, 진동룡!”
“아니, 근데? 왜, 초삼!”
그 순간, 둘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둘 다 조용. 등에 칼 박히고 싶지 않으면.”
“네.”
“죄송합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유이설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모두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크흐흐흐. 이놈들이 감히 우리를 앞에 두고 농지거리를 해?”
그때 철탑같이 거대한 사내가 쿵쿵대며 걸어오더니 수레의 앞쪽에 꽂힌 거대한 도를 가볍게 뽑아 들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놔도 그리 주둥아리를 놀릴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살벌한 대사에 청명과 백천이 슬쩍 시선을 마주쳤다.
“저것도 영업용 대사인 모양이지?”
“그러게. 비슷하네.”
사내는 살짝 움찔했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딴 망발을 하느냐!”
그리고 더욱더 태산 같은 기세로 소리쳤다.
“이 몸이 바로 이 산의 지배자인 대호채의 주인! 무쌍대도(無雙大刀) 이광(李廣)이시다!”
청명과 백천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또 호랑이네.”
“그러게. 또 호랑이야…….”
산적 놈들은 다들 하나같이 호랑이에 무슨 집착증이라도 있나? 왜 하나같이 산채 이름에 호랑이를 못 넣어서 안달인가?
그리고 왜 또 별호는 하나같이 저렇게 거창하냐고.
청명은 한숨을 푹 내쉬며 피곤한 낯으로 물었다.
“그래서, 왜 막은 건데요?”
“흐흐흐. 어리숙한 놈이구나. 상황을 보고도 그런 걸 묻다니.”
“이 아저씨 정말 갑갑하다, 갑갑해. 누가 진짜로 쫄아서 이러는 줄 아나. 좋게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더니.”
청명은 좌우로 한 번씩 목을 꺾고는 암향매화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무쌍대도 이광이 코웃음을 쳤다.
“반항을 하시겠다? 어린놈이 겁이 없구나. 이 수를 보고도 패기를 부리다니. 그 패기가 만용이었다는 걸 그 목숨으로 알게 해 주마!”
눈을 부라리는 기세가 제법 심상치 않았다.
“저놈들을 당장…….”
그때였다.
“비켜라.”
“비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주위를 둘러싼 산적 무리가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응?”
백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흉흉한 기세로 혀를 날름거리던 산적들이 순식간에 겁먹은 사슴 같은 모양새로 얼른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열린 길을 따라 녹색 무복을 입은 일련의 무리가 걸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기세에, 백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강하다.’
지금 나타난 이들은 한눈에 봐도 이 산적들과는 그 격이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 봤던 놈들이 누가 봐도 그냥 산적이라면, 저들은 확실히 무인이라는 느낌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이 가는 건 선두의 사내였다.
나이는 마흔쯤 되었을까? 워낙 커다란 덩치의 산적들만 봐서인지 살짝 왜소해 보이는 몸이 인상 깊었다.
사내는 얼음을 한 겹 씌운 듯 냉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표정을 살짝 뒤틀었다.
그리고 이내 이광을 향해 시선을 획 돌렸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이광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채주.”
“예?”
“내가 분명 정중히 모시라고 했을 텐데?”
“예? 그,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했는뎁쇼?”
“그게 뭔 소리요?”
“정중히 모시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영업하라는 말 아닙니까?”
“…….”
사내는 가만히 이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 늘어진 그 어깨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 백천이었다.
“……말 그대로 정중하게 모시라는 뜻이었소. 손님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럼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이광이 우물쭈물 구시렁거리자 사내가 듣기 싫단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다들 물리시오.”
“예? 영업은…….”
사내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자 이광이 움찔하며 손을 내저었다.
“물러나라! 당장 물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던 산적들은 모두 군말 없이 뒤로 우르르 물러났다.
“저것도 뽑고.”
“저거 치워! 저거!”
물러나던 산적들이 다시 우르르 달려와 수레 주위에 꽂아 둔 병장기들을 회수했다.
윤종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사숙.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글쎄다…….”
청명과 함께 다니면서 웬만한 무림의 노강호들도 해 보지 못했을 경험을 다수 겪은 백천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겪는 일들은 날이 갈수록 괴이해지기만 했다.
산적들이 마침내 우르르 물러나자 녹색 무복의 사내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실례했소.”
사내는 그들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 했다.
“오해가 조금 있었던 모양이오. 잘 모시라 말했는데…… 말귀를…….”
사내는 말하다 말고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그가 이를 갈 때마다 뒤쪽에 있는 이광이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후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사내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본인은 곽민이라 하오.”
“곽민?”
그 순간 수레 뒤로 몸을 숨기고 있던 홍대광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곽민? 그럼 당신이 흑야호(黑夜虎) 곽민이란 말이오? 녹립십영(綠林十影) 중 하나인?”
그러자 곽민이라 불린 이가 슬쩍 홍대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아…….”
청명은 홍대광을 보며 갸웃했다.
“뭐 대단한 사람이에요?”
“녹림십영. 녹림십영이다. 그 녹림왕을 호위하는, 녹림의 정예 중 정예지.”
“오?”
그렇다는 건?
청명은 새삼스레 곽민을 다시 보았다. 그때 그가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화산신룡 청명이오?”
“네. 그런데요?”
“무례를 저질렀소. 위대하신 산의 주인께서 그대를 보고자 하니, 나를 따라오시오.”
“흐음.”
청명은 입꼬리를 쓱 말아 올리며 말했다.
“당가로 오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 기다려요?”
“……그건 그분께 직접 여쭤보시오.”
“네, 뭐. 그러죠.”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자 곽민이 숲 안쪽을 향해 턱짓했다.
“이쪽으로.”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기다리지 않고 숲속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를 따르던 녹의의 무인들 역시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흐음.”
청명은 수레에서 가볍게 폴짝 뛰어내렸다.
“산적치고는 세게 나오네.”
“야. 청명아. 진짜 갈 거냐?”
“부른다는데 가 봐야지.”
걱정하는 목소리에도 그는 낄낄 웃었다.
“혹시 알아? 이번 산채에도 재물이 그득그득할지.”
“…….”
이쯤 되면 누가 산적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걷는 중에도 곽민은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쿠르르르.
쿠르르르.
쿵! 쿵!
한눈에 보기에도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닐 것 같은 쇠수레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두어 번쯤은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 내었던 그도, 이쯤 되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네?”
“……저 수레는 굳이 가져가야 하는 거요?”
“아, 네. 뭐 사실 길가에 세워 두고 갔다 와도 되는데.”
청명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가 다른 곳도 아니고 산적 새끼들이 우글거리는 덴데, 짐을 두고 다니려니 영 불안해서요.”
“…….”
곽민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지?’
조금 전 분명히 홍대광의 입에서 녹림십영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그는 친절하게 녹림왕이라는 이름까지 입에 담아 주었다.
그런데 그 두 이름을 듣고도 이런 말을 태연히 지껄인다고?
‘간이 쇠로 만들어진 놈인가?’
화산신룡이 꽤 특이한 족속이니 조심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평소에도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는 편이오?”
“네? 말을 함부로 하다니요?”
“조금 전 산적 운운한 것 말이오.”
“아, 평소에는 이렇게 칭찬이 잦은 편은 아니에요. 오히려 좀 인색한 편이죠.”
“……칭찬?”
곽민이 그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칭찬이라니?”
“네? 산적은 남의 돈이나 물건 뺏어서 먹고사는 놈들이잖아요. 물건 훔쳐 갈까 걱정이 된다는 말은, 일 잘한다는 칭찬 아닌가요?”
“…….”
청명이 쑥스러운 듯 헤헤 웃었다.
“그래도 높은 데서 오신 분 같아서 제가 간만에 좋은 말 좀 해 드렸어요.”
“…….”
곽민은 더 이상 청명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속에 천불이 터지고 이가 으득으득 갈렸지만, 녹림왕이 손님으로 초대한 이에게 감히 함부로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대신 살짝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내게는 뭐라 말해도 좋소.”
“네?”
“하지만 녹림왕을 뵙는 자리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어휴. 무섭다. 그냥 돌아갈까?”
“…….”
관두자.
관둬.
곽민은 고개를 내젓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같이 가요!”
청명이 해맑게 웃으며 그런 그에게 따라붙었다.
걸음을 재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산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목책으로 벽을 세운, 전형적인 산채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크기와 웅장함은 전에 그들이 들렀던 장호채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저마다 감탄했다.
“우와.”
“진짜 크다! 산중에 이런 건물을 짓다니.”
“……뭐래. 화산은 산꼭대기에 전각도 짓는데.”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조걸은 화산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곳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여기가 녹림왕이 머무는 산채입니까?”
백천의 물음에 홍대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예?”
“아까도 들었다시피 이곳은 대호채네. 녹림왕이 머무는 곳은 따로 녹채라 불리지. 하지만 녹림왕은 녹채에 머무는 법이 거의 없네. 보통은 천하를 돌며 산채들을 관리하지.”
“아아.”
“그래서 강호에는 이런 말이 있지. 녹림왕이 머무는 곳이 곧 녹채다. 그러니 이곳은 대호채이기도 하고 녹채이기도 한 것이네.”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장한 산채를 바라보았다.
그때, 곽민이 산채 앞에 도달해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손님께서 오셨다!”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통나무를 엮어 만든 대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이쪽으로.”
“흐음.”
청명은 눈을 반짝이며 산채 안으로 휘적휘적 들어갔다.
“진짜 갑니까?”
“……가야지 뭘 어쩌겠어?”
화산의 제자들 역시 못내 불안한 얼굴로 그런 그를 따라 산채 안으로 들어섰다.
“흐음.”
산채 안에 있는 너른 마당에서 청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지어진 커다란 목조건물과 움막 주변에서 대호채의 산적들이 흉흉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거지 아저씨.”
“응?”
“저 산적 새끼들이 이거 못 건드리게 잘 지켜요.”
“뭐……? 나, 나는 안 데리고 가냐?”
대답은 청명이 아니라 곽민의 입에서 나왔다.
“녹림왕께서는 오직 화산의 제자들을 뵙자고 하셨소.”
“끄응.”
홍대광은 앓는 소리를 내며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그럼 혜연 스님도 여기 계시는 거지?”
“안 돼요. 땡중은 화산의 손님이거든요.”
“그럼 나는?”
“아저씨는 화산 앞의 거지죠.”
홍대광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나 혼자 여길 어떻게 하라고, 이놈아!”
“죽이기야 하겠어요?”
청명이 낄낄 웃으며 곽민을 재촉했다.
“뭐 해요? 얼른 안 가고.”
“……이쪽으로 오시오.”
곽민이 고개를 내저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장 큰 건물 앞에 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이 청명을 훑었다.
“녹림왕께 무례를 범한다면, 그 목 그대로 달고 산을 내려가는 건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뭔 말이 이렇게 많아. 비켜요.”
“…….”
곽민은 차마 하지 못할 말들을 삼키며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비켜났다.
“엣헴!”
청명이 뒷짐을 지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백천은 미묘하게 미안한 시선으로 곽민을 한번 보고는 사형제들을 이끌고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응?”
“어?”
“어어어엇?”
“……세상에.”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백천은 믿을 수 없는 듯 연신 눈을 끔뻑거렸다.
“흐허허허헛!”
내실 안쪽에는 호피로 장식한 거대한 의자가 있었고, 그 위엔 그 거대한 의자를 작아 보이게 만들 만큼 커다란 거한이 더없이 오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서 오너라! 이 몸이 모든 산을 지배하는 녹림의 왕이다.”
철사를 꼬아 만든 듯한 거친 수염.
웬만한 여인의 허리보다 더 굵어 보이는 우람한 팔뚝.
말 그대로 장비의 현신이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려 보이는 패도적인 사내!
“……형제인가?”
“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둘은 있다더니.”
“야수궁주님을 모셔 왔어야 하는 건데.”
“눈물의 상봉.”
더없이 익숙한 그 외양에, 화산의 제자들은 친근함을 느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