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저 매화검존 아닌데요? (5)
새하얀 털 뭉치가 팽그르르 회전하고, 드러누웠다가 재빠르게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낄낄낄. 이놈 꽤 귀엽네.”
“…….”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참 따뜻한 광경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아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기에, 이건 너무 서글픈 광경이었다.
“……역시 영물이네.”
“저번에도 느꼈지만 저건 정말 영물입니다.”
“뒈지기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거죠.”
새하얀 털로 뒤덮인 낯이 이상하게 파랗게 질려 보인다면 역시 착각일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청명의 환심을 끌려 하는 백아를 보자니 괜히 서글퍼지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죽어서 목도리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청명은 그런 백아의 처절한 몸부림이 보이지 않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보들보들하네.”
청명이 손을 내밀어 쓰다듬자 백아가 그의 손에 바짝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흐음. 미물 주제에 좋은 사람을 알아보다니.”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제일 악독한 놈이 누군지 알아본 거지!’
‘오죽하면 그러겠냐, 오죽하면!’
그때 백아가 청명의 어깨 위로 타고 올라 그의 목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굳이 털을 벗기지 않아도 목도리 정도는 얼마든지 되어 줄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요놈은 나름 쓸모가 있는데…….”
흡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청명이 고개를 돌려 그의 뒤쪽에 앉은 범을 바라보았다.
집채만 하다는 말이 꼭 어울리는 범이 몸을 말고 앉아 있었다.
“우와. 세상에 이만한 범이 있네.”
홍대광이 신기하다는 듯 범에게 다가갔다.
“허허허. 거지새끼들이 이걸 보면 오줌을 지릴…….”
크허허헝!
홍대광이 가까이 접근하자 잠자코 있던 범이 돌연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히이이익?”
기겁을 한 그가 옆으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다행히 피를 보진 않았지만 천을 잔뜩 덧대어 두었던 누더기의 엉덩이 부분이 부욱 찢겨 나갔다.
“아악! 내 옷!”
홍대광이 혼비백산해 저만치로 달아나자 청명이 혀를 쯧쯧 찼다.
“저 양반은 저리 눈치가 없어서 어떻게 여태 빌어먹고 살았는지 몰라.”
입에 물린 누더기를 뱉어 낸 범이 이번엔 청명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냈다.
으르르릉.
평범한 범도 가까운 곳에서 마주치면 심혼이 얼어붙는데, 저토록 거대한 범이 뿜어내는 기세야 오죽하겠는가?
청명은 슬쩍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얘는 좀 마음에 안 드는…….”
그런데 그 순간.
파아아아앗!
청명의 어깨에서 섬전처럼 튀어 나간 백아가 범의 면상에 달라붙더니 앞발로 벼락같이 후려쳤다.
퍼어어어억!
동시에 화산 제자들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백아에게 얻어맞은 범은 그대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담비가 범을 때려?’
‘타격음 찰진 것 보소?’
영물이니 뭐니 말은 들었지만, 아무리 그대로 덩치 차이가 백 배는 나는 느낌인데, 설마 저 작은 담비가 범의 싸대기를 후려칠 줄이야.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범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몸을 바닥에 찰싹 붙였다. 마치 큰 형에게 혼쭐이 난 아이가 잘못을 빌듯이 말이다.
캬르르르르르!
백아는 화가 덜 풀린 것처럼 털을 곤두세우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자 범은 아예 바닥에 얼굴 처박고 앓는 소리를 냈다.
끼잉.
“…….”
범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안 백천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백아가 이를 드러내자 청명이 손을 가볍게 튕겼다.
“됐어, 됐어. 모르고 한 건데 뭐.”
파아아앗!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아는 다시 몸을 날려 청명의 무릎 위로 올라오더니 배를 뒤집어 깠다.
청명은 아까의 기세가 거짓이었던 듯 납작 엎드린 호랑이를 보며 혀를 찼다.
“쯧. 털가죽이 좋아 보여서 잘됐다 싶었는데. 명분이 사라졌네.”
아주 나직한 중얼거림이었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다. 백아가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을.
‘저거 분명히 사람 말 알아듣는다.’
‘담비가 땀도 흘리나? 사람도 아니고 담비가?’
평생을 지녔던 상식이 연이어 뒤집히고 있었다.
“하하하핫. 역시 백아 이 녀석은 자네를 좋아하는군. 데리고 오기를 잘 했어.”
야수궁주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청명의 어깨를 가볍게 탕탕 두드렸다.
우드드득.
그러자 청명이 앉은 의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뒤틀렸다.
“아, 아파!”
청명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한차례 꿈틀거렸다. 그리고 야수궁주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웬 짐승들을 이리 많이 끌고 오셨어요? 데리고 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야수궁주가 껄껄대며 웃었다.
“내가 사천당가는 첫 방문이 아니더냐. 사천의 패자라는 당가를 방문하는데, 당연히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야지.”
“……얘들이 선물이에요?”
청명이 주변을 슬쩍 돌아본다.
커다란 코끼리에 범, 몸통이 웬만한 사람보다도 굵어 보이는 구렁이에 백표, 흑표까지…….
‘누가 봐도 습격하러 끌고 온 모양샌데.’
그게 아니면 드디어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든가.
“짐승은 넘쳐나는데 사람은 몇 없네요. 장로님들은 안 데리고 오셨어요? 다들 섭섭해하셨을 텐데.”
“그놈들은 데리고 와 봐야 잔소리밖에 하지 않는다.”
야수궁주는 생각만 해도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냥 중원에 잠깐 들른다는데, 뭔 놈의 잔소리를 그리 늘어놓는지. 위험하다느니 어떻다느니! 내 몸뚱이를 좀 봐라!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위험해진다는 소리냐!”
옷 안에 잠잠하게 있던 야수궁주의 대흉근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꿈틀거렸다.
그 폭발할 것 같은 근육을 본 청명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진다는 의미 아니었을까요?”
저 근육은 확실히 위험하지.
스쳐도 사망이니까.
“크하하하하핫!”
야수궁주가 거의 머리가 뒤로 꺾일 정도로 호탕하게 웃으며 청명의 어깨를 다시 쾅쾅 두드렸다.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한다니까! 말이 통하잖아, 말이!”
“아야야! 아프다니까!”
그 대화를 듣던 백천과 다른 제자들은 모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게요.
형제라고 해도 믿겠네요. 청명이가 지금보다 두세 배만 크면 말이죠.
그때 조걸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뗐다.
“그런데, 사숙.”
“응?”
“야수궁주님이 당가에 방문한다는 걸 아셨습니까?”
“……나는 몰랐지.”
“이거 따지고 보면 꽤 큰 사건 아닙니까?”
조걸의 말에 백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긴 하지…….’
사실 큰 사건이라면 큰 사건이다.
맹소는 세외사궁 중 하나인 남만야수궁의 궁주. 그리고 세외사궁은 지금 중원과 완전히 틀어져 적이나 다름없는 사이다.
그런 세외사궁의 궁주가 중원으로 들어와 오대세가 중 한 곳인 사천당가를 방문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수많은 곳이 뒤집어질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희한하네.’
백천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세 사람을 응시했다.
한 사람은 세외를 지배하는 세외사궁의 궁주.
또 한 사람은 중원의 명가 중 최고를 다툰다는 사천당가의 가주.
거기에 지금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화산파의 화산신룡 청명까지.
세외사궁과 오대세가 그리고 과거의 구파일방. 도무지 섞일 수 없어 보이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서 말을 주고받고 있다.
‘저놈의 친화력은 좀 이상하다니까.’
이쯤 되면 단순히 사교성이 좋고 어쩌고 할 수준이 아니다.
“하하하하핫! 내가 화산신룡 자네를 위해서 이걸 가져왔지!”
야수궁주가 자신의 옆에 놓인 궤짝을 열더니 그 안에서 백색의 호리병을 잔뜩 꺼냈다.
“오? 이거 그때 운남에서 마셨던 도원향(桃原香) 맞죠?”
“그렇네. 자네가 좋아하는 것 같아 내 챙겨 왔네!”
“크으! 역시 궁주님!”
“하하하하하! 어디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꾸나!”
“으헤헤헤헤헤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도원향을 나눠 들고 동시에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꾸울꺽!
두 사람의 목젖이 경쾌하게 오르내렸다.
“크으으으으으!”
“카아아아아아!”
“한 병 더?”
“좋죠!”
자연스럽게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저 두 주정뱅이가 술판을 벌이는 건 당연한 일이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문제는 저 두 주정뱅이가 아니라 그 사이에 낀 당군악이었다.
‘힘드시겠네.’
백천은 당군악을 향해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영혼이 탈곡된 안색으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당군악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좌우로 바보가 둘이면 상식인은 할 일이 없어진다. 그 사실은 백천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크흠.”
백천은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이 술판이야 청명이 놈이 주도하는 게 당연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청명의 윗사람. 사질 놈이 너무 막 나간다 싶으면 그걸 제어해 줄 의무가 있었다.
“크흠, 청명아.”
“응?”
백천의 부름에, 술 나발을 불던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지금 좀 과한 것 같은…….”
“아! 내 정신 좀 봐!”
“응……?”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에 놓인 술병을 한 아름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건너편으로 쭐레쭐레 뛰어왔다.
“사숙들도 이거 좋아했지, 도원향?”
“…….”
“마셔, 마셔! 나눠 먹어야지! 헤헤. 내가 깜빡했네.”
“…….”
청명이 해맑게 웃더니 손을 흔들고 다시 자리로 향했다.
“아니, 그…….”
백천이 그런 청명의 등을 향해 무의미한 손을 뻗었다.
아니, 이놈아…….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얘들아, 뭐라고 말 좀…….”
사질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백천은 이내 입을 쩍 벌렸다.
꼴꼴꼴꼴.
꼴꼴꼴꼴.
그 잠깐 사이에 옆에 있던 모두가 도원향을 한 병씩 틀어쥐고는 나발을 불고 있었다.
“크으으으으, 이거 죽인다!”
“운남에서 마셨던 바로 그 맛이야!”
“사숙! 사숙! 이거 빨리 드셔 보십시오. 복숭아 향이 말로 못 합니다!”
“…….”
심지어 모두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병을 입에 꽂아 넣고 시원하게 마셔 대기에 바빴다.
꼴꼴꼴꼴.
“으헤헤헤헤헤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청명이 놈이 앉은 곳과 화산의 제자들을 번갈아 본 백천은 흐뭇하게 웃으며 도원향 병목을 꽉 움켜쥐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래. 마시자.
마시고 죽자, 이놈들아.
연회는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중간중간 당가가 공식적으로 야수궁주를 환영하는 행사가 있었고, 당가의 장로들이 야수궁주에게 인사를 오는 등의 나름 격식 있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일단 기본적으로는 마시고 죽는 술판이었다.
사람과 사람을 엮는 데 어디 술만 한 것이 있던가?
처음에는 야수궁주가 당가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던 이들도 취기가 오르면서 서서히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핫! 사천당가의 식솔들과 이리 술을 마실 날이 오다니! 세상일 모르는 거라니까! 자, 한 잔 받으시게!”
“예! 저야말로 궁주님의 술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한 잔 주고!”
“드려야지요! 암요!”
야수궁주는 아예 상석에서 벗어나 당가인들 사이에 섞인 채 술을 주고받았다.
“에이! 겨우 그것만 마시겠다는 건가! 한 잔 더 받게!”
“예!”
맹소는 연회장에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잔을 섞었다.
그러다 결국은…….
“끄으……. 더는 못 마시…….”
쿠우웅.
야수궁주가 마침내 모든 당가인들을 쓰러뜨렸다. 당군악만 빼고 모두가 처참히 쓰러진 걸 보며 맹소가 혀를 찼다.
“쯧쯧쯧. 다들 이리 술이 약해서야.”
“……궁주님이 너무 세신 거죠.”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술이 약할 리가 있는가? 맹소가 괴물 같은 거지.
“흐음. 이정도로는 아쉬운데.”
맹소는 먹이를 쫓는 매처럼 주변을 둘러보다 청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떤가? 오늘 둘 중 하나는 죽어 보는 게?”
“저야 좋…….”
청명이 흔쾌히 수락하려는 찰나, 당군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청명과 맹소를 응시하는 시선이 사뭇 진지했다.
“충분히 즐기신 것 같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론이요?”
청명이 되묻자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주께서 그저 술이나 마시자고 이곳에 오실 분이겠는가?”
“네.”
태연한 청명의 대답에 당군악은 살짝 움찔했다. 맹소도 뭔가 겸연쩍다는 듯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당군악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으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닐세.”
“크흐, 그렇지.”
맹소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신룡.”
“예.”
“따라오게. 셋이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러자 청명이 살짝 떠보듯 말했다.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것처럼 운을 떼시네요.”
“중요하지.”
당군악의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무척 중요하지. 당가와 야수궁, 그리고 화산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니까. 애초에 자네도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던가?”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이래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좋다니까요.”
“가세나.”
진짜 연회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