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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28화 (428/1,567)

428화. 친구 좋다는 게 뭔가! (3)

쪼르르륵.

사천의 명물, 천홍(川紅)이 천천히 잔에 따라졌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부드러운 향이 방 안에 은은히 번져 나갔다.

“음.”

잔을 든 이가 절도 있으되, 다도(茶道)에 어긋나지 않은 몸짓으로 차를 음미했다.

“한잔들 하겠는가?”

부드러운 음성.

하지만 그 말투 뒤에 담긴 은은한 묵직함은 말하는 이의 신분을 새삼 실감하게끔 했다.

다만…….

“저기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청명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와서 그렇게 침착한 척하셔도 달라지는 게 없거든요?”

“…….”

찻잔을 내려 둔 당군악이 슬쩍 주위를 돌아보았다.

방에 앉은 화산의 제자들이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딸내미까지도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크흠.”

당군악이 겸연쩍은 듯 낮게 헛기침을 했다.

‘흥분했어.’

그것도 과히 흥분했다. 근 십여 년간 이렇게 정신을 놓았던 적이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일단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겠단 생각에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내가 주책을 부렸다고 생각하겠지만…….”

“네.”

“…….”

당군악은 새삼 청명이 어떤 놈인지를 다시 떠올렸다.

“……물론 좀 흥분한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이나 그 만년한철이 귀한 물건이기 때문일세.”

“아…… 네.”

“…….”

아무래도 영 반응이 좋지 않았다.

슬쩍 모두의 눈치를 본 당군악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일단은 차나 한 잔씩들 하고…….”

하지만 청명이 깔끔하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본론부터 빨리 들어가죠. 그래서, 한철검 만들어 주실 수 있다는 거죠?”

“…….”

이놈은 어찌 도사라는 놈이 사천 사람보다 성미가 더 급한가?

하지만 화제가 바뀐 건 좋은 일이었다.

“중원에 한철의 씨가 마르면서 그를 다루는 기술도 실전되고 있는 게 사실이네. 하나 다행스럽게도 아직 당가에 한철을 다루는 법이 내려오고 있지.”

“네. 그럼 만들어 주세요.”

그 태연한 대답에 당군악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정말로 검을 만들 셈인가? 다시 말하지만 지금 한철은 황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값진 물건이네. 그런데 굳이 그 귀한 한철로 검을 만든다는 건…….”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봐야 철이죠.”

“그냥 철이 아니라니까!”

당군악은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만류했지만 청명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지만, 돈은 많아요. 벌 방법도 많고요. 그런데 이건 이제 다른 데서는 못 구한다면서요.”

“그렇지.”

“그럼 당연히 검을 만들어야죠. 괜히 다른 데다 낭비했다가 나중에 만들고 싶을 때 못 만들면 배 아파서 안 돼요.”

“…….”

그 태연자약한 설명에 당군악은 결국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야.’

하지만 그게 청명답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만들어 줘야지. 대신 대금은 제대로 지불해 줘야겠네.”

“친구 사이에 대금이라니!”

“친구간의 거래일수록 더욱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지.”

당군악이 이것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힘을 주고 버텼다. 청명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얼마나 받으시게요?”

“돈은 됐네. 대신에 자네가 가져온 한철을…….”

“아, 그건 안 된다니까요!”

“좀 주게, 좀! 저렇게나 많은데! 그거 좀 떼어 간다고 티나 나는가?”

당군악의 언성이 슬그머니 높아지자 청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뚱하게 그를 보았다.

“한철은 어디다 쓰시게요. 팔아먹는 게 낫다더니.”

“……그건 검 같은 걸 만들 때의 이야기고.”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암기라는 건 소모품이네.”

“그렇죠.”

“고급 암기일수록 얇고 미세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아무리 조심히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은 닳기 마련이네. 한번 발출하고 나면 회수도 쉽지 않고.”

“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쇠로 만들어야 하는 법이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겠는가?”

“네. 그러니까 만년한철로 만들고 싶은 암기가 있다는 거잖아요.”

“정확하네.”

당군악의 눈이 드물게 이글거렸다.

재물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사천당가에게 있어 더 튼튼하고 더 정교한 암기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암기가 정교해지는 것만으로 무위가 상승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까.

“당가에는 만년한철에 버금가는 강도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암기가 몇 있네. 한철을 구하는 게 극도로 힘들어진 이후로는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며 보존하려 했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었다네.”

“한철을 구한 김에 그걸 다시 만들고 싶으시다?”

“정확하네.”

“흐으음.”

청명은 뭔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는가?”

“아뇨.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잠깐 망설이던 그는 여전히 고민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당가가 더 강해지면 화산에도 도움이 될 테니 당연히 해 드려야 할 텐데.”

“……텐데?”

청명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막상 한철이 귀하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떼어 주기 배가 아프고 그러네요. 귀하단 소리만 안 들었어도 흔쾌히 줬을 것 같은데.”

그 솔직한 말에 당군악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이런 걸 돕겠다고 만인방까지 갔었구나.’

왜 그랬을까.

왜.

“쯧. 뭐 어쩔 수 없죠. 사람이 이리 착하면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당가주님이니까 제가 특별히 한 번은 들어드릴게요. 조금만 떼어 쓰세요.”

“고맙…….”

“조금만!”

“……정말 눈물 나게 고맙구만.”

정말 고마워해야 할 일이건만, 이리 고맙지 않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당군악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럼 시간 끌 것 없겠지. 가세나.”

“네? 어디로요?”

그의 입가에 살짝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한철을 다룰 수 있는 분에게 가야지.”

“안녕하십니까!”

“화산 분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이고, 아가씨! 더 건강해지셨습니다!”

당군악을 따라 당가의 깊은 곳으로 향하는 내내, 마주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그 환대에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었다.

“저번이랑은 많이 다르네요.”

“그러게 말이다.”

윤종의 말에 백천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제로 그들을 바라봐 오는 당가인들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이전에도 손님 자격으로 당가를 방문했었지만, 저런 시선은 느껴 보지 못했다. 오히려 경계 가득한 눈빛을 받았었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게 바뀌었다.

“당가가 더 이상 화산을 외인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당패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화산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당가는 함부로 친구를 만드는 문파가 아닙니다. 오대세가라는 이름으로 다른 세가들과 연합하기는 하지만, 그건 필요에 의한 일이지요.”

“……그렇죠.”

“하지만 화산은 다릅니다. 당가는 화산과 진심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가주님의 마음을 가솔들도 아는 것이지요.”

“아…….”

정론과 같은 말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반대편에 있던 당잔이 그들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일전에 청명 도장께서 원로원을 박살 내 주신 덕분에 가주님의 입지가 많이 올랐습니다. 덕분에 가문도 빠르게 발전하고 가솔들의 생활도 좀 더 편해졌지요. 그러니 다들 화산을 반기는 겁니다.”

“…….”

백천은 순간 생각했다. 여기저기 산재한 대부분의 문제를, 청명이 사람을 두들겨 패는 걸로 해결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지금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공방으로 갑니다.”

“아까 보니 공방은 저쪽인 것 같던데…….”

당잔이 빙그레 웃었다.

“사천당가에 공방이 하나일 리 없지요. 당가 내의 공방만 십여 개에 달합니다.”

“……규모가 엄청나네요.”

“지금 가고 있는 곳은 그 공방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가장 쓸모없다면 쓸모없는 곳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가 보시면 알 겁니다.”

전각들이 모인 곳을 지나자 잘 꾸며진 정원이 나타났다. 그 정원을 통과해 안쪽으로 향하자 지금까지 보이던 웅장한 전각과는 달리 낡고 오래된 공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내려놓으면 되네.”

“예.”

품고 온 한철을 마당에 내려놓은 화산의 제자들은 당군악을 따라 공방 한쪽 옆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초가집이었다. 그 앞에 선 당군악은 어울리지 않게 공손한 자세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종조부님. 군악입니다.”

당군악이 자세를 낮추니 다른 이들도 반사적으로 손을 모으고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종조부님.”

“…….”

하지만 몇 차례 불러도 대답이 없자 당군악은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조심스레 초가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방 안에 한 백발 노인이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죽은 것 같은데?”

“말을 인마, 말을 좀!”

“주둥아리, 확 그냥 진짜!”

당군악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노인을 가볍게 흔들었다.

“종조부님. 종조부님?”

하지만 웬만큼 흔들었음에도 노인은 쉽사리 깨어나지 않았다.

청명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봐, 죽었잖아.”

“다물라고, 이 새끼야!”

“누가 이 새끼 입 좀 꿰매! 좀!”

화산 제자들의 언성이 결국 높아진 덕분인지 미동도 하지 않던 노인이 움찔하더니 느리게 눈을 떴다.

“……응?”

“종조부님, 저 군악입니다.”

“군악이가 누구야?”

“……가주입니다, 종조부님.”

“가주? 네가?”

“예. 기억이 안 나십니까? 열흘 전에도 인사를 드렸는데.”

“네가 가주라고? 명(明)이는 어디 가고?”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신 지가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래? 네가 가주라고?”

“…….”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명의 얼굴이 슬슬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못내 불안한 듯 당패를 보았다.

“저기요.”

“예, 도장.”

“……그런데 저 영감님은 누구세요?”

“현 당가의 최고 어른이신 ‘당조평(當造平)’ 어르신이십니다. 가문에서는 저분의 성함보다는 ‘신수(神手)어른’이라는 호칭을 주로 씁니다.”

“신수요?”

당패가 한껏 자랑스럽고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현 당가의 최고 장인이십니다. 귀신과도 같은 손재주로 못 만드는 암기가 없는 분이시지요. 당가의 무학을 이끄는 분이 가주라면 당가의 공방을 이끄는 분이 바로 저분이십니다.”

“아…….”

“현재 강호에서 저분보다 뛰어난 장인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당가의 역사를 통틀어도 저분만 한 장인은 흔치 않지요.”

“아…….”

좋은데.

다 좋은데…….

청명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슬그머니 돌려 그 문제의 장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가 누구라고?”

“……당군악입니다, 종조부님. 당군악.”

청명의 한쪽 뺨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는데? 어디 아프세요?”

“아…… 그런 게 아니라…….”

당패가 겸연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워낙 고령이시다 보니 최근에는 영 이지가 맑지 못하십니다.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오늘따라 조금 심하신…….”

“이지가 맑지 못해?”

“……조금.”

이제 청명의 뺨과 눈가, 나아가 얼굴 전체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거 결국 노망났다는 소리 아니에요?”

“……아니, 노망까지는…….”

청명의 시선이 다시 당조평에게로 향했다.

“그래, 가주께서 어떤 일로 이 늙은이를 찾으시었소?”

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한 당조평을 향해 당군악이 고개를 숙였다.

“종조부님. 한철을 다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종조부님께서 좀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철. 으음, 그래. 한철이라.”

당조평이 새하얀 수염을 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철이라면 내가 나서야……. 한철……. 음, 만년한철.”

당조평이 뭔가 고민이 된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에 당군악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말일세.”

“예, 종조부님.”

“그게…….”

당조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는 누군가?”

“…….”

“명이는 어디 가고?”

푸들푸들.

청명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경련했다.

“아니! 뭐 만년한철을 다루는 사람한테 가자더니 뭔 노망난 양반을 찾아와?! 왜 화산이고 당가고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어!”

결국 꽥 소리를 지르는 그의 입을 백천이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사과했다.

“하하하하하. 죄송합니다! 이 새끼가 미쳐서는, 하하하!”

“좀 닥치라고! 제발 좀!”

청명을 잡아끄는 화산의 제자들은 이제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당가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분 같은데, 그런 사람한테 노망이라니!

하지만 청명은 모두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뭐, 내가 못 할 말 했어? 장인은 빌어먹을. 정신이 있어야 장인이지! 정신이 없으면 노망이고!”

그러자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당조평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순간 노인의 마른 몸이 크게 움찔했다.

내내 초점 없던 눈에 기이한 빛이 어렸다.

“어……. 어?”

무언가에 경악한 듯 청명을 보던 당조평은 이내 입을 쩌억 벌렸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반응이었다.

“어? 어어……. 매…….”

“종조부님?”

조금 당황한 당군악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당조평은 대답 대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청명을 가리켰다.

“매화검존?”

“…….”

응?

이 영감이 진짜 노망이 났나! 누구 보고 매화검…….

‘아, 맞네.’

아, 나 매화검존 맞지?

하하…….

하하하…….

‘이게 뭔 상황이여, 대체?’

청명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과 동시에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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