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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25화 (425/1,567)

425화. 여하튼 늦으면 뒈지는 거야. (5)

“이, 이게…….”

오장송이 몇 번이고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져, 졌다고?’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건 도저히 질 수 없는 승부였다. 무위로 겨룬다면 몰라도 속도로 겨룬다면 유령문의 문도들은 세상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이들이었다.

심지어 평소 훈련하던 길로 달렸는데 이곳에 처음 온 화산의 제자들에게 패했다고?

“어떻게 이런…….”

그가 미처 정신을 다 차리기도 전에 도착한 화산의 제자들이 각각 한 손에 유령문도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섰다.

“…….”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자니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털썩.

털썩.

기절해 버린 유령문도들이 연무장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오장송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렸어?”

청명이 피식 웃으며 묻자 백천이 눈에서 살기를 뿜어낸다.

“그 주둥이냐? 방금 그 말을 지껄인 게 이 주둥이야, 엉?”

“죽인다! 진짜!”

“……목 내 봐. 잘라 줌.”

백천을 선두로 화산의 제자들이 눈을 까뒤집고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백천을 걷어차 날려 버린 청명은 혀를 차며 오장송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가 이겼네요.”

“…….”

오장송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청명이 씩 웃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머뭇거리며 입을 살짝 벌렸던 오장송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닫았다.

화산 제자들의 몰골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상태를 걸고넘어지는 건 적반하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닐세.”

“그럼 우리가 이긴 거죠?”

“…….”

“말씀하시던 분 어디 가셨나? 우리가 이긴 건가요?”

“끄응. 그렇네.”

“헤헤헤. 그렇죠?”

청명이 히죽 웃으며 깨 방정을 떨었다. 울컥한 오장송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름 살 만큼 살았고, 온갖 일들을 다 경험해 온 그이건만, 지금 눈앞에서 웃어 젖히는 이 망할 놈처럼 얄미운 인간은 난생처음이었다.

“한입으로 두말하시진 않겠죠? 그럼 앞으로 적극 협조하시는 걸로 알게요.”

“끙.”

오장송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네. 한입으로 두말을 할 수는 없지.”

“네, 그래야죠. 그럼 앞으로는 소문주님 말에 잘 따라 주시고요.”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 제대로 좀!”

“아, 알았다니까!”

오장송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청명은 슬쩍 도운찬과 시선을 교환하며 히죽 웃었다.

‘저 소도장이…….’

도운찬은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안 그래도 왜 이리 일을 키우나 싶어 의아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도운찬은 아직은 소문주라는 직책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문주 대접을 받았다면, 그가 직접 서명하고 돌아온 일에 장로가 이리 딴죽을 걸고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 경륜이 부족한 도운찬으로서는 오장송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오 장로가 청명과의 승부에서 패배했으니, 이제는 전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 승부의 결과를 유령문의 문도들 모두가 지켜보았으니 말이다.

‘감사하외다.’

그가 눈으로 청명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시선을 받은 청명 역시 눈빛으로 슬쩍슬쩍 도운찬을 재촉했다.

그 뜻을 읽은 도운찬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이 승부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떼자 장내의 모두가 도운찬을 주목했다.

“화산이 이겼다.”

호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어떤 반응을 할 수 없는, 사실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이것이 유령문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령문과 화산은 이미 친구가 되기로 한 바. 친우와 승패를 굳이 가를 필요는 없다.”

확신과 힘으로 가득 찬 도운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술을 가져와라. 연회를 열겠다. 그리고 이 자리는 유령문이 친우로서 화산을 환영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예, 소문주님!”

마침내 우렁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도운찬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한잔 어떠시오, 소도장?”

“에이. 뭘 물어보세요. 당연히…….”

“그 전에!”

그런데 청명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응?”

옆을 돌아본 도운찬의 눈에 진흙으로 범벅이 된 백천, 조걸, 그리고 윤종이 들어왔다. 유이설과 당소소는 이미 씻으러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윤종이 힘없이 말했다.

“……일단 좀 씻구요.”

“…….”

도운찬은 어쩐지 숙연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

“…….”

깨끗하게 씻고 뽀송뽀송해진 백천이 건너편을 향해 칼날 같은 시선을 보냈다. 맞은편에 앉은 악소 역시 백천을 향해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경주에 참여한 화산의 제자들과 유령문의 제자들은 연회가 시작되고도 한참을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덕분에 활기차고 즐거운 연회를 기대했던 다른 유령문의 제자들마저도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백천을 노려보던 마침내 악소가 입꼬리를 뒤틀며 말문을 열었다.

“……설마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백천은 이에 온화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

악소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정말 실력대로 붙었으면 우리가…….”

“응. 우리가 이겼어.”

“…….”

삽시간에 붉어진 악소의 이마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아니, 저놈은 생긴 건 저리 생겨서는 말하는 게 왜 저 모양인가?

“……좀팽이 같은 게.”

“패배자.”

“기생오라비.”

“패배자.”

“말코 도사 놈이!”

“패배자.”

“……끄윽.”

악소가 뒷목을 잡으며 눈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야! 다시 붙어! 이번에는 그 다리몽둥이를 아예 분질러 줄 테니까!”

“이겼는데 귀찮게 뭐 하러.”

악소가 거의 거품을 물 듯 보이자 옆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사형!”

“소문주님께서 주최하신 연회가 아닙니까! 이러다 큰일 납니다!”

“……끄으으.”

그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진정한 악소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시선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보았다.

“너희가 그러고도 도사냐?”

“왜? 도사는 얻어맞기만 하란 법이 있나? 도사고 나발이고 시비 걸어오면 패는 거지.”

“…….”

저따위 말을 당당하고 우아하게도 늘어놓는 백천을 보며 악소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놈들 진짜 도사인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사 같은 놈은 하나도 없는데.

악소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너희가 이긴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유령문을 무시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나는 명문이라는 놈들만 보면 몸에 두드러기가 생기는 사람이니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응?”

생각지 못한 백천의 대답에 악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는 명문 정파잖아?”

“명문 정파?”

백천이 피식 웃었다.

“몇 년 전까지 화산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냐?”

“…….”

어?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

백천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 정도면 호의호식하고 사는 거지. 옛날 화산은 이런 건 꿈도 못 꿨어.”

그 말에 윤종과 조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욕탕도 있고.”

“밥도 잘 나오고.”

그 말을 들은 악소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뭔…… 거지새끼들인가?’

“여하튼.”

백천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욕을 하든 말든 그건 너희 마음인데, 우리가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만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건 기분 나쁘니까.”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당소소만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백천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술병을 잡았다.

“어쨌거나 유령문은 앞으로 한동안은 화산과 한 배를 타야 할 곳이지. 묵은 앙금은 이걸로 풀자고.”

백천이 술병을 앞으로 살짝 내밀자 악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내밀었다.

졸졸졸.

백천이 따른 술이 악소의 잔에 넘칠 듯 차올랐다.

잔을 내려놓은 악소가 병을 넘겨받아 백천에게도 따라 주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악소와 백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으며 불꽃을 튀겼다.

“어디 한번 잘 지내 보자!”

“오냐! 어디 한번!”

챙!

두 사람의 술잔이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소소는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도 아니고 진짜.’

* * *

“자세한 부분은 은하상단에서 설명해 줄 거예요.”

“알겠소이다.”

따로 마련된 자리에 청명과 도운찬, 오장송과 계형이 마주 앉았다.

“그리 어려울 건 없을 거예요. 그리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유령문에게도 분명 이득이 되는 일이거든요.”

도운찬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장송은 여전히 조금쯤 껄끄러운 기색이었지만,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도장.”

청명이 조금 더 설명하려는 찰나 도운찬이 정중히 끊어 냈다.

“그리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이미 유령문은 화산과 함께하기로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

“설사 이 일로 큰돈을 벌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소. 이번 일로 나도 확실하게 느꼈소이다.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유령문이 더 클 수 없다는 걸 말이오. 우리는 화산과 함께하며 더 먼 곳을 보려 하외다.”

두 눈을 깜박이던 청명이 기분 좋게 씩 웃었다.

“좋죠.”

도운찬의 눈은 어느덧 사뭇 진지해 보였다.

“우리가 맡은 일은 확실히 하겠소이다. 그러니 화산도 유령문을 이끌어 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걱정 마세요. 제가 또 그런 건 확실하거든요.”

청명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른거렸다.

‘이렇게 하나하나 시작하는 거지.’

문파란 반드시 본산과 속가로만 이뤄지는 곳이 아니다. 과거의 화산은 속가뿐 아니라 수많은 중소 문파들과 연계하여 그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물론 이건 그저 작은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날이 올 것이다.

도운찬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네.”

“내일 제가 유령문의 문주로 정식 취임을 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문주로 취임하는 자리에는 문도뿐 아니라 참관인을 초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네.”

“그러니 화산 분들께서 참관을 해 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뭐 그런 걸 감사라고 하세요. 당연히 그래야죠.”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도운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화산과 함께하기로 한 것이 이득인지 손해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이 유령문에게 다시없을 기회라는 건 분명했다.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오장송을 바라본다.

“장로님께선…….”

“끄응.”

오장송이 한숨을 내쉬더니 담담히 말했다.

“내 한입으로 두말하는 졸장부가 될 생각은 없소이다. 이 일에는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소. 일단 하기로 한 이상, 이 일 역시 유령문의 명예가 걸린 셈이니.”

“잘 생각하셨어요.”

“대신 한 가지.”

“음?”

오장송이 열의로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내 소문주께 듣자 하니, 화산 제자들의 수련은 소도장께서 도맡아 한다고 하더군. 그게 사실이오?”

“뭐 대충은 그렇죠.”

“허…….”

오장송이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내 배분인 청자 배가 되레 자신보다 배분 높은 이들을 가르치다니.

제아무리 화산신룡으로 불리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라지만, 이건 너무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게 최근 화산이 그 이름을 떨치는 이유인가?’

과거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다.

거듭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말이긴 하나, 화산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문파에서 그걸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소도장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요.”

“말씀하세요.”

“우리 유령문의 제자들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시오.”

오장송이 청명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 반응에 살짝 당황한 청명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왜 이러세요!”

“늙은이가 노욕에 객기를 부렸소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오로지 유령문의 제자들을 위함이었음을 알아주시오. 소도장께서 유령문을 도와주신다면, 우리 역시 화산에 그 은혜를 갚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외다.”

청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장송을 바라보았다.

사실 저 나이에 청명처럼 어린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방식에야 조금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오장송이 유령문만을 위한다는 건 사실이라 봐야 할 것이었다.

“알았으니까 고개 드세요. 뭐 그게 별거라고요.”

“……으응?”

별거?

고개를 든 오장송은 청명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청명이 무척 기괴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뭐 기본적으로는 화산과 비슷하게 수련하면 되겠지만…….”

움찔.

그 태연한 중얼거림에 도운찬과 계형이 짧게 몸을 떨었다.

화산에서 보아 온 숱한 광경들이 그들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령문은 일과 수련을 병행해야 하니, 방법이 좀 달라져야겠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면요…….”

그날.

화산의 제자들과 유령문의 문도들이 술과 욕지거리로 우정을 쌓아 가는 와중, 한쪽에서는 청명이 어떻게 하면 유령문의 제자들을 잘 조질(?) 수 있는지 최선을 다해 강론했다.

하필 그 강론의 가장 열성적인 학생이 오장송 장로였다는 게, 유령문의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불행의 시작이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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