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여하튼 늦으면 뒈지는 거야. (4)
“이제 오나?”
홍대광이 목을 쭉 뺐다.
산 아래에서 몇몇 기운들이 빠르게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눈에 흥미의 빛이 서렸다.
“누구일까?”
화산? 아니면 유령문?
무위로 따지자면 유령문의 제자들은 감히 화산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경공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유령문의 무학은 오로지 경공과 신법에 특화되어 있는 무학. 무게중심을 과도하리만치 위쪽으로 올려 더없이 가볍고 빠른 발을 얻고, 파괴력은 놓는 계열이다.
그러니 오로지 경공만을 보았을 때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경공에 관해서는 나름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홍대광도 예측이 어려웠다.
‘그래도 역시 화산이…….’
화산오검쯤 되면 그래도 유령문에는 뒤지지 않을…….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앗!
수풀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가 정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고생하십니다!”
“오?”
빛살처럼 날아든 이가 정상의 나무를 걷어차며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아래를 향해 질주했다.
‘유령문?’
처음으로 도착하는 이는 백천이나 유이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령문의 악소가 가장 먼저 정상에 도달했다.
“내, 내려가는 길은 저쪽!”
“압니다!”
악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홍대광의 뇌리에 의문이 스쳤다.
‘그럼 화산은?’
그 순간 아래쪽에서 다시 몇 명이 쏜살처럼 정상으로 뛰어올랐다.
“고생하십니다!”
“찍고 갑니다!”
연이어 정상에 오른 네 사람이 모두 유령문의 문도였다. 홍대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이렇게 되나?’
아니, 아무리 저들이 빠르다고는 해도 화산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텐데?
그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어디선가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
“죽인다아아아아아아!”
“엥?”
사람보다 목소리가 먼저 도착했다.
숲이 크게 뒤흔들린다 싶더니 나무가 부러질 듯 좌우로 젖혀지며 그 안쪽에서 누군가가 과격하게 튀어나왔다.
“어…….”
백……. 아니, 백천이 맞나?
황토색으로 물든 인간이 거의 네발짐승처럼 질주하며 정상을 향해 달려왔다. 그 광기 어린 모습을 본 홍대광은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목을 움츠렸다.
‘맞는데?’
그런데 쟤는 왜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있지?
“아, 아니. 백천 소협! 어쩌다가…….”
백천은 대답할 틈도 없이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리더니, 정상의 나무를 부러질 듯 걷어차고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뛰어 나갔다.
연이어 수풀 속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튀어나왔다.
‘쟤, 쟤들은 또 왜 저래?’
그나마 백천은 앞쪽만 흙투성이 수준이었는데, 지금 튀어나온 조걸과 윤종은 전신이 황토색 흙으로 뒤덮여 거의 진흙으로 빚은 인간처럼 보였다.
발을 거칠게 내디딜 때마다 말라붙은 흙이 후두둑 떨어지며 먼지가 폴폴 휘날렸다.
그 기괴한 광경을 보고 있으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은 홍대광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두 사람은 눈을 희번덕대며 짐승처럼 질주했다. 그들의 소리가 멀어지자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
홍대광이 눈을 끔뻑였다.
이거 단순한 경주 아니었나?
“그럼 다른…….”
쇄애애애애애액!
생각이 머릿속에 채 떠오르기도 전에 숲속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
유이설이었다. 두 눈에서 귀기를 뿜으며 매처럼 솟아오른 그녀는 나무를 박차고 빠르게 멀어졌다.
얼음을 한 겹 씌운 듯한 그 싸늘한 얼굴을 보니 홍대광은 괜히 등골이 서늘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하튼 저 화산 놈들이 낀 일치고 평범하게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사숙!”
따라붙은 윤종과 조걸이 가열차게 백천을 불러 댔다.
“……죽인다.”
하지만 백천은 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더 빨리 앞으로 달려 나갈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전방에 고정되어 있다.
그때 옆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울렸다.
“더 빨리!”
“엄마! 깜짝이야!”
조걸이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본다. 어느새 그들을 따라잡은 유이설의 눈에서 시퍼런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천이 이를 갈며 말했다.
“잡아! 반드시 잡아! 나는 죽어도 못 진다!”
“예!”
“죽입시다!”
“오오오오오오오!”
화산의 제자들의 점점 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
네 사람이 기운을 내뿜으며 전력으로 달리자, 그들이 지나간 뒤쪽으로 커다란 후폭풍이 몰아쳤다.
“더! 더 빨리! 있는 내력 다 뽑아내!”
백천의 외침에 화산의 제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저 개새끼들!”
“잡아 죽여!”
도사라면 차마 내뱉지 못해야 할 말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 도사답지 못한 태도와는 달리, 그들의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빨라졌다. 인간성과 무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그들이었다.
“보입니다!”
“잡았다!”
저 앞쪽으로 달려 나가는 유령문 제자들을 포착한 그들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후후후. 이래서 샌님들이란.”
악소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금 그들은 경공을 겨루는 게 아니다. 누가 먼저 도착하는가를 겨루는 것이다.
경공이란 결국은 특정 지점에 빠르게 도착하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어떤 방식이든 가장 빨리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아마 저 화산의 샌님들도 이번 일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도착하면 적당히 술 한잔하면서 사과를…….”
그 순간 가장 후미에서 달리고 있던 유령문의 제자가 등 뒤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기겁을 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사, 사형! 화산 놈들이 옵니다!”
“뭐? 벌써?”
악소가 대경하여 돌아보았다. 과연 흡사 짐승처럼 질주하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속도를 높여! 더!”
“지, 지금 벌써 한계입니다!”
“망할! 뭔 놈의 도사들이 저렇게 빨라?”
안타깝지만, 이 순간에도 악소는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냥 빠른 게 아니라 반쯤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걸아!”
“으르르르르르르!”
백천과 윤종이 조걸의 양옆에서 나란히 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물어!”
“가라!”
두 사람이 동시에 조걸을 힘차게 내던졌다.
그리고 버럭 소리 질렀다.
“싸우지 말라는 법은 없단다!”
“물어뜯어!”
말라붙은 흙과 한 몸이 된 조걸은 두 눈 가득 광기를 내뿜으며 검을 검집째 뽑아 들었다.
“야, 이 개자식들아!”
“어엇!”
“피해!”
머리 위로 조걸이 떨어지는 것을 본 유령문의 제자들이 사색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느려!”
하지만 모두가 피할 수는 없었다.
조걸의 검이 마지막으로 달아나는 유령문도의 허벅지를 내려쳤다.
“아악!”
유령문도가 고꾸라지며 구르고, 동시에 조걸이 땅에 내리꽂혔다.
쿠웅!
하지만 처박히고도 아프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난 조걸은 비장하게 소리쳤다.
“이 새끼는 제가 맡겠습니다! 가십시오!”
“빨리 처리하고 따라붙어!”
“예!”
남은 네 명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자 쓰러졌던 유령문도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 달리려 했다.
“어딜.”
하지만 그 앞을 조걸이 막아섰다.
그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맺혔다.
“너는 나랑 좀 놀자고.”
“비, 비켜!”
“나도 비켜 주고 싶지. 비켜 주고 싶은데.”
조걸이 음산하게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최소한 너도 내 몰골은 돼서 가야지. 안 그래?”
“…….”
“어디 한번 뒈져 봐라.”
조걸이 눈을 까뒤집으며 유령문도에게 달려들었다.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습니다!”
“빌어먹을!”
악소가 이를 빠득 갈았다.
지금 다리가 으스러져라 달리고 있건만, 도무지 거리가 벌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오히려 점점 좁혀지고만 있었다.
‘우리가 경공으로 뒤진다는 건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령문의 무학은 경공에 특화되어 있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경공으로 절대 뒤질 수 없다. 심지어 도가 계열의 무학을 익힌 이들에게 패한다는 건 자존심의 문제다.
“추평!”
“예, 사형!”
“가라! 발목을 잡고 늘어져!”
“예!”
그의 뒤를 따르던 추평이 몸을 획 돌려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그의 양손에는 작고 둥근 환들이 잔뜩 쥐여져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환들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퍼엉! 퍼어어엉!
굉음과 함께 환이 터지자 순식간에 희뿌연 연막이 길을 가득 메웠다.
‘자, 이제 뛰쳐나오는 놈들을 적당히 덮쳐서…….’
그 순간.
희뿌연 연막 사이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추평을 향해 돌진했다.
“어?”
퍼어어어어어억!
조금의 주저도 없이 돌진한 유이설의 주먹이 추평의 얼굴에 거의 파묻히듯 틀어박혔다.
“쿠웨에에에엑!”
퉁! 퉁! 퉁!
단숨에 튕겨져 나간 추평은 몇 차례 바닥에 처박혔다 튀어 올랐다.
유이설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강하했다.
쿵!
추평 위에 올라탄 유이설이 두 눈 가득 시퍼런 한기를 내뿜으며 이를 갈아붙였다.
“너 아까 그놈이지.”
“……소, 소저? 저, 저는……!”
퍼억!
하지만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유이설의 주먹이 추평의 턱을 돌려 버렸다. 그녀가 허리를 좌우로 꺾어 가며 내리칠 때마다 곡소리가 울렸다.
“먼저 간다!”
“……저거 어디서 보던 건데.”
백천과 윤종이 그런 그녀의 곁을 지나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소, 소저! 살려 주……. 아악! 악! 살려 줍쇼! 악!”
추평을 후려치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자비도 없었다.
“으아아아! 저 찰거머리 같은 것들!”
악소가 비명성을 내질렀다.
‘아니! 그래도 도사잖아!’
도가 계열의 문파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도사라면 뭐가 고고하고 중후한 구석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경공을 사용해도 뭔가 사뿐사뿐 뛸 것 같았는데!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은 정말이지 조금도 없었다. 되레 선불 맞은 멧돼지가 따로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돌진할 뿐이었다.
“함정은?”
“아, 안 통합니다!”
화살비가 쏟아지면 검으로 날려 버리고, 바닥이 꺼지면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솟아오른다. 옆에서 목창이 튀어나오면 이로 물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다! 달려! 마지막은 경공으로 결판난다!”
“예!”
유령문의 제자들은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그들 역시 자존심이 걸린 일.
천하에서 경공으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유령문도들이 제대로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그 빠르기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아, 안 떨어집니다, 사혀어엉!”
“아니, 저 새끼들은 대체……?”
악소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아, 안 돼. 절대 질 수 없어.’
이곳은 그들이 훈련을 위해 사용하는 길이었다. 매번 달라지기는 하지만, 어느 곳에 함정이 있고, 어떤 곳에서 조심해야 하는지 반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다고?
“으아아아아아아!”
악소가 단전에서 내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 다리로 밀어 넣었다. 도착하는 즉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질 수 없다.
그의 몸이 다른 사형제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가십시오, 사형!”
“꼭 이기십시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말하지 않아도 아는 듯, 그의 사제들이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외쳤다.
“못 간다!”
“나를 밟고 가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악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희의 희생을 잊지…….’
하지만 그 순간.
“아니. 이 새끼들이 지들이 먼저 비겁 떨어 놓고 어디서 비장한 척하고 있어! 턱주가리를 콱 뽑아 버릴라!”
어…….
사실 그건 맞지. 어, 그렇지.
“죽어어어엇!”
듣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타격음과 함께 사제들의 비명이 그의 귀를 찔렀다.
하지만 악소는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더! 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보인다!’
마침내 그의 눈에 저 멀리 유령문의 모습이 들어왔다.
눈에 들어왔다면 이제 순식간이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이기기만 하면…….
“호오?”
“…….”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 악소의 눈에 흙으로 분장을 한 듯한 기생오라비의 얼굴이 들어왔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얼굴이 말이다.
“어이, 규칙은 똑바로 들었어?”
“…….”
어?
이거 아까 내가 했던 말…….
“안타깝게도.”
황토색으로 가득 물든 얼굴에 새하얀 균열이 생겨났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백천의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싸우지 말라는 소리는 없었다는데?”
“으아아아아아아!”
기겁한 악소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뽑아내어 유령문을 향해 돌진했다.
‘조금! 조금만!’
주변의 경관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그만큼 빠른 속도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악소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탄력을 받은 듯 유령문으로 쏘아지는 그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잡아 봐, 이 새끼야!’
칼이고 나발이고 그건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을 때 이야기다. 네가 아무리 세도 속도는 내가 더 빠르다!
파아아앗! 파아아아아앗!
땅을 박차는 소리가 강력했다.
살아온 인생 중 가장 빠르게 달리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악소가 부러질 듯 이를 악물었다.
산이 스쳐 지나가고.
개천을 뛰어 건너고.
유령문으로 향하는 마지막 산길을 타고 오르는 악소의 머릿속에는 강한 쾌감이 쏟아졌다.
작은 점같이 보이던 유령문의 대문이 순식간에 커다랗게 확대된다.
이십 장! 십 장! 오 장! 삼 장!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은 악소가 남은 모든 힘을 모아 땅을 후리듯 박찼다. 양다리를 쭉 뻗고 양손을 가슴으로 모은 그는 이내 하나의 화살이 되어 일직선으로 유령문의 대문을 향해 쏘아졌다.
“이겼……!”
턱!
“어?”
악소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그의 다리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다. 물론 팔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왜 몸이 멈춘 거지? 왜?
악소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시야에, 바로 곁에 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손을 뻗어 자신의 목덜미를 단단히 움켜잡은 한 남자가 말이다.
빙그레 웃은 사내는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응?’
악소의 시선이 슬쩍 아래를 향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잔뜩 쏟아졌던 비와 진흙으로 범벅이 된 바닥을 말이다.
“……너.”
촤아아아아아아아악!
악소의 몸이 진흙탕에 그대로 내다꽂혔다. 사방으로 진흙과 물이 철퍽대며 엉망진창으로 튀었다.
“…….”
뒤틀린 그의 다리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딱히 뒤끝이 남은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가볍게 손을 턴 그는 세상 다시없을 상쾌한 얼굴로 고고하게 유령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쪼잔하고 치졸한 승리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