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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23화 (423/1,567)

423화. 여하튼 늦으면 뒈지는 거야. (3)

꼴꼴꼴꼴꼴.

“크아아아!”

술을 꿀꺽꿀꺽 들이켠 청명이 기똥찬 탄성과 함께 술병을 내리고는 소매로 입가를 쓱 문질렀다. 그러더니 화산의 제자들이 달려 나간 방향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낄낄낄낄.”

혜연은 뚱한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산의 제자가 아니다 보니 이 경주에는 참가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남겨진 것이다.

“시주.”

“응?”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혜연이 걱정 어린 얼굴로 화산의 제자들이 달려 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유령문도들이 치고 나가는 모습을 보니 경공의 경지가 굉장히 높은 것 같던데…….”

“그렇겠지. 유령문이니까.”

애초에 경공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청명이 이들과 손잡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그런데 굳이 이런 승부를 벌일 필요가 있습니까?”

“네가 뭘 알겠냐.”

청명은 유령문의 장로, 오장송과 그 옆에 서 있는 소문주 도운찬을 흘끗 보았다.

“……일단은 정리를 한번 할 필요가 있으니까.”

“정리라고 하셨습니까?”

“아냐, 아무것도.”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술을 꼴꼴 마셔 댔다.

혜연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저는 못내 좀 불안한데…….”

그러자 청명이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요 땡중이 요즘 걱정만 늘어 가지고는.”

“…….”

“수련은 괜히 하나?”

청명의 얼굴은 여유롭다 못해 아주 심드렁해 보였다.

제대로 된 경공을 전수받지 못했던 예전의 화산 제자들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저들은 화산의 경공을 제대로 익히고 있다.

“경공이라는 건 가장 직관적이야. 열심히 한 만큼 그 성과가 나오기 마련이지. 그리고 내가 알기로 우리 사형들보다 열심히 구른 놈들은 없어.”

“……그걸 아는 분이…….”

“응?”

“아닙니다…….”

혜연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과한 고민이기는 하지.’

이제 혜연도 화산 제자들의 실력을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산인이 아닌 외부인 중, 혜연보다 저들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보기에 백천과 그 일행의 실력은 이미 후기지수의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저들을 소림으로 데리고 간다면 같은 배분 중에서는 당해낼 이가 없을 것이었다. 혜연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무리 유령문이 경공으로는 일가견이 있다고는 하나, 화산의 제자들을 당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쉬운 승부가 될 것 같군요.”

“쉬운 승부?”

하지만 이번에도 청명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뭐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

“여하튼 늦으면 뒈지는 거야.”

그의 두 눈은 재미있는 물건이라도 눈앞에 둔 듯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혜연의 얼굴에는 불안이 깃들기 시작했다.

“읏차!”

조걸이 땅을 강하게 박찼다.

한번 땅을 밀 때마다 그의 몸은 몇 장씩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기세를 탄 그는 순식간에 가장 앞으로 치고 나갔다.

“으하하하하핫!”

입에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쇳덩어리 떼어 내고 나니 날아갈 것 같네!’

이 상쾌함이라니!

섬서에서 귀주까지 오천 리 길을 오는 내내 그 망할 묵철인가 뭔가로 만든 쇳덩어리를 차고 왔다. 맨몸으로 와도 다리가 부러질 거리인데, 평범한 쇠보다 열 배는 무거운 걸 팔다리에 매달고 왔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했겠는가?

그 쇳덩어리를 떼어 내고 나니, 몸이 너무 가벼워서 주체가 안 될 지경이었다. 덩달아 자신감도 솟구쳐 올랐다.

상대가 유령문이든 뭐든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콰악!

땅을 내딛는 발에는 힘이 넘쳐났다.

‘확실히!’

이곳까지 오면서 몸을 혹사시킨 효과가 있는지 지면을 박차는 다리에 들어가는 힘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저 망할 놈이 시키는 훈련이 확실히 효과는 엄청나단 말이지.’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러니까 어쨌든 이 승부는 일단 이겨 놓고…….

“호오? 꽤 빠른걸?”

순간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걸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아니……?’

지금 그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쏘아지는 듯 나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하지만 지금 옆에 따라붙은 이는 이 정도 속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이 속도에 따라붙는다고?’

조걸의 얼굴이 살짝 경악이 스치는 그 찰나, 유령문의 제자가 이죽거렸다.

“과연 명문의 제자라 이거지?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은 것 같군.”

조걸의 눈썹이 살짝 꿈틀댔다.

‘그런데 이 새끼가?’

유령문 제자의 태도에 내려다보는 느낌이 역력했다. 이건 과거 종남의 제자나 비무 대회 초기에 만났던 다른 구파일방 제자들이 자주 보였던 태도였다.

적어도 이들은 경공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만큼은 화산의 제자들보다 자신들이 낫다고 확신하는 게 분명했다.

살짝 열이 오른 조걸이 쏘아붙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다가는 큰코다칠 텐데?”

“호오?”

유령문의 제자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양 씨익 웃었다.

“자신감은 좋지만 한 가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음?”

“이 길이 어떤 길인 줄 알아?”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우리가 훈련용으로 사용하는 길이거든.”

“그게 뭐 어쨌다고? 자주 뛰어 봤으니 너희가 이긴다는 거냐?”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이죽이던 유령문의 제자가 앞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간다.

“엇!”

“겪어 보면 알거야!”

그 쾌속한 움직임에 조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걸아!”

그리고 그런 그의 뒤에서 윤종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왔다.

“뭐 하는 거냐!”

“아, 아니, 저 새끼가……!”

“됐다! 일단은 따라잡아! 선두를 놓치면 골치 아프다!”

“예!”

두 사람은 나란히 앞으로 돌진했다. 내력을 있는 대로 다리로 밀어 넣고 주저 없이 쾌속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으라차아아아!”

“거기 서……!”

그리고 그 순간.

콱!

‘응?’

힘차게 내디딘 발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린 조걸의 눈에 바닥이 그대로 푹 꺼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뭐, 뭐야!”

“함정?”

이내 조걸과 윤종이 내딛은 곳이 단번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아니, 미친!”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만 생각했던 탓에 순간적으로 바닥이 꺼진 것에는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쿵!

쿠웅!

달리던 속도 그대로 구덩이의 벽면에 충돌한 두 사람이 스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풍덩!

“꾸르르륵…….”

바닥에 가득 차 있는 물에 떨어진 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맥질해 물 밖으로 고개를 뺐다.

“푸우우우웃!”

“콜록! 에헤헤이! 콜록!”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기침하며 삼켰던 물을 뱉어 낸 윤종은 황당함에 입을 벙긋거리다 소리쳤다.

“이게 뭐야? 길에 왜 함정이 있어?!”

“그, 그러게요.”

그때.

이를 갈아붙이며 위로 솟아오르려던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한마디 더.”

언제 돌아왔는지 앞으로 튀어 나갔던 유령문의 제자가 구덩이 위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띤 그는 낄낄대며 말했다.

“이것 말고도 함정은 많으니까 조심하라고.”

그렇잖아도 잔뜩 부아가 치밀었던 조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아니, 근데 저 새끼가 진짜?”

“이건 선물.”

쿵!

유령문의 제자가 내디딘 진각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구덩이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게는 더욱 확연하게 와닿는, 강한 진동이었다.

“……어?”

그런데 그걸 그렇게 강하게 밟아 버리면?

“아, 아니…….”

우르르르르릉.

아슬아슬해 보이던 구덩이의 벽면들이 일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걸과 윤종의 머리 위로 대량의 토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기겁한 두 사람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개자식아!”

“히이이이익!”

우르르르르릉!

구덩이 주변이 폭삭 내려앉으며 조걸과 윤종이 있는 곳을 순식간에 메워 버렸다.

깔끔하게 뒤덮인 구덩이를 내려다보던 유령문의 제자가 싱긋 웃었다.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지만, 우리도 지면 꼴이 사나워서 말이야.”

파아아앗.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날려 앞으로 튀어 나갔다.

잠시 후.

어느새 잠잠하게 흙먼지가 가라앉은 토사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좌우를 두어 번 더듬은 손이 크게 휘저어지며 흙더미를 좌우로 밀어 냈다.

“끄으으으으으!”

“이익!”

이윽고 물과 토사로 뒤덮여 진흙 인간이 되어 버린 윤종과 조걸이 흙더미를 헤치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퉷! 퉤에에엣! 아아아악!”

“……걸아. 흙 먹지 마라.”

진흙으로 범벅된 얼굴로, 조걸은 눈에 핏발을 세웠다.

“사형.”

“…….”

“저 새끼들 모조리 죽여 버립시다.”

윤종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이번만은 공감이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광폭한 기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죽인다!”

“잡히면 죽는다, 진짜!”

현종이 들었으면 머리를 싸매고 앓아누울 만한 쌍소리를 쉴 새 없이 내뱉으며 두 사람은 산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하악! 하악!”

그 시각, 당소소 역시 땀을 줄줄 흘리며 앞으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옆쪽을 힐끔힐끔 돌아갔다.

“사, 사고!”

“안 돼.”

“제발 두, 두고 먼저 가세…….”

“안 돼.”

그런 당소소의 바로 곁에서 유이설이 칼날 같은 눈빛으로 달리고 있었다.

“더는, 허억, 못 뛰겠어요.”

“할 수 있어.”

아무리 그녀가 당가의 여식이라 기초 체력이 탄탄하고, 내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화산의 평범한 제자들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직 그녀의 무위는 화산오검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러니 그녀가 무슨 수로 저들과 같은 속도로 달리겠는가?

문제는 유이설은 그런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적당히 달리면 사형들이 알아서 이겨 줄 거라고 생각했건만, 유이설은 출발부터 그녀의 옆에 딱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유이설의 속도에 맞춰 뛰다 보니, 당소소는 이제 하늘이 노랄 지경이었다.

“주, 죽는다고요!”

“괜찮아. 할 수 있어.”

내가 안 괜찮은데, 내가!

왜 사고가 괜찮다고 해요!

당소소의 얼굴에 원망의 기색이 스쳤다.

그때, 유이설이 슬쩍 앞쪽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앞으로 달려 나갔던 유령문 두 사람의 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잡았다고?’

아니, 아직은 아닐 텐데?

그럼 저쪽에서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데 앞쪽을 달리던 이가 마침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입가에 맺힌 희미한 미소를 본 유이설이 얼굴을 찌푸렸다.

“조심!”

“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앞을 달리던 이들이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힘껏 걷어찼다.

쿵! 쿠웅!

강력한 발차기가 나무를 뒤흔드는 순간, 유이설의 고개가 위쪽으로 확 꺾이듯 젖혀졌다.

“소소!”

“네?”

유이설이 당소소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동시에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쇄애애애애액!

너무 우거져 빛도 잘 들지 않은 나무들 위쪽에서 무언가가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죽창?’

정확하게 말하면 죽창이라기보다는 죽봉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끝을 날카롭게 자르지 않아 살상력은 없는 대나무.

하지만 이 속도로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끝이 날카롭지 않은 죽봉이라고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타앗!”

유이설의 입에서 짧고 강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검이 허공을 맹렬하게 가르며 머리 위로 쏟아지던 죽봉을 모조리 베어 냈다.

‘하찮은 짓을!’

파아아아앙!

하지만 그 순간 커다란 발출음이 터졌다. 죽봉에 이어, 이번에는 커다란 공 같은 것들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소용없어!”

유이설의 검이 다시 하늘을 갈랐다. 당소소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아아악! 안 돼요, 사고!”

응?

뭐가 안 돼?

서걱! 서걱!

검은 이미 휘둘러졌고, 날아들던 공들은 일제히 매끈하게 잘려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퍼어엉! 퍼어어엉! 퍼어엉!

잘린 공들이 폭발을 일으키더니 무언가 시커먼 것들이 좌우로 넓게 펼쳐지며 뻗어 나왔다.

‘뭐?’

유이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공에서 튀어나온, 쇠로 만든 그물들이 유이설과 당소소를 그대로 뒤덮었다.

촤악! 촤아아악!

한 겹! 두 겹! 이미 그물에 엉킨 두 사람의 위로 그물이 연이어 쏟아졌다.

“꺄아아아아아악!”

결국 발이 엉키고 만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내리막길을 굴렀다.

“아악! 악! 내 허리! 악!”

“…….”

쿵! 쿠웅! 쿵쿵!

흡사 둥근 공처럼 말린 둘은 바닥에 박혔다 튀어오르고, 다시 구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평지에 이르러서야 겨우겨우 속도가 줄어들었다.

“끄으……. 으……. 주, 죽어…….”

“…….”

힘없는 손이 흐느적거리며 그물을 벗었다.

철푸덕.

겨우겨우 그물을 모두 벗은 당소소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저…… 저 망할 놈들이…….”

그녀가 이를 빠득빠득 갈며 한숨을 푹 쉬는데, 그물을 모두 벗어 팽개친 유이설이 입을 열었다.

“소소.”

“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당소소는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머리를 묶었던 끈이 반쯤 찢겨 산발이 된 유이설이 끈을 아예 찢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검은 머리칼이 귀신처럼 흘러내렸고, 그 사이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

웬만한 담력을 가진 사람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유이설은 전신으로 귀기를 뿜어내며 씹어뱉는 듯 읊조렸다.

“먼저 간다.”

“……죽이지는 마세요.”

“생각해 보고.”

그녀는 악귀 같은 눈빛을 뿜으며 검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빛살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

홀로 남겨진 당소소는 저도 모르게 유령문의 문도들을 걱정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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