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솔직히 이젠 저도 감당이 안 됩니다. (5)
강철로 만든 두꺼운 수레 위로 재물이 그득그득 쌓였다.
금자들이 탑처럼 높게 쌓였고, 보석들은 은은한 달빛에 영롱하게 빛났다.
“아이고오, 이거 너무 많아서 다 안 실릴 것 같은데?”
“거기, 거기 궤짝 옆으로 옮겨 봐! 그럼 공간이 나잖아!”
“부러지기 쉬운 건 위쪽으로. 위로.”
재물을 싣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백천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신났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말려 올라간 입꼬리까지는 미처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누가 산적인지.’
하지만 그런 백천 역시 자신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똑바로 박아라.”
“……끄으읍.”
청명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술을 꼴꼴 마셔 대고 있었다.
“크으.”
입가를 닦은 그는 앞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허리 점점 내려가? 뒤로 접어 줘?”
“아, 아닙니다!”
산적들이 기겁을 하며 냉큼 허리를 들었다.
“쯧, 여하튼.”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산채의 산적들은 지금 일렬로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었다.
“자신 있으면 내공 써. 어디 한번 써 봐. 단전 날아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봐.”
“아닙니다!”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산적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지탱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에휴. 나도 많이 착해졌다. 옛날 같았으면 그냥 모조리 산 채로 파묻어 버렸을 텐데.”
옛날이었으면, 어?
아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연신 혀를 차던 청명이 갑자기 열이 오른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생각할수록 열받네! 이 새끼가!”
그러더니 앞으로 와락 달려들어 가장 앞에서 머리를 박고 있던 곽경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진 곽경은 바닥에 처박히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청명이 있는 쪽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머리를 바닥에 박고 뒷짐을 쥐었다.
“뭐? 입에 풀칠이 뭐가 어째? 인생? 인새애애앵? 내가 살다 살다 산적 새끼가 인생 논하는 걸 듣는 날이 오네. 왜? 그 한 많은 인생 지금 편하게 종결시켜 드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청명이 다시 곽경을 걷어차 날렸다. 곽경은 이번에도 바람같이 다시 달려와 머리를 땅에 쑤셔 박았다.
청명의 시선이 그득그득 쌓인 재물들로 향했다.
“먹고살기가 힘들단 놈들이 알뜰살뜰 많이도 모았다. 여하튼 강도 새끼들 입 터는 건 믿으면 안 돼.”
그때 홍대광이 산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화산신룡!”
“네.”
“거지새끼들한테 들은 바로는, 이놈들이 진짜로 사람을 죽이고 그런 적은 없던 모양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던 거지.”
“그래요?”
“확실할 거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곽경을 바라보았다. 곽경은 조금 억울함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것 보십시오! 제가…….”
“제가?”
“사람은 안 죽였다고 했잖습니까! 저는 억울합니다!”
“에라이!”
청명이 아예 곽경의 다리를 콱 차서 넘어뜨리더니 자근자근 밟기 시작했다.
“아니, 이 새끼는! 도대체! 도덕관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야, 이 새끼야! 사람 입에서 사람 안 죽였으니 괜찮다는 말이 나오면 이미 끝난 거야, 이 새끼야! 공자님도 너를 보시면 사서삼경으로 대가리를 깨 버리시겠다. 어디 강도 새끼가 눈을 또랑또랑 뜨고 바락바락 대들어?”
단 한 번도 눈을 또랑또랑 뜬 적이 없고 바락바락 대든 적도 없는 곽경은 무척이나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 변명을 하는 건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디 사지 멀쩡한 것들이 강도짓을 해서 먹고살아! 나도 일해서 돈 버는데, 확 마!”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동시에 발길질이 점점 거세어졌다. 결국 보다 못한 백천이 나섰다.
“청명아. 그러다 죽는다.”
“죽으면 이득 아냐?”
“……그렇긴 한데, 어…….”
잠깐 말문이 막힌 백천은 명분을 찾느라 머리를 굴리다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야! 그래도 네가 도산데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쯧.”
백천과 대화를 하면서도 곽경을 잘근잘근 밟던 청명이 드디어 매질을 멈췄다. 그리고 널브러진 곽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승질 같아서는 진짜.”
모조리 다 잡아서 묻어 버리거나, 관아에 넘겨 버리고 싶었다.
“자자. 진정해라, 화산신룡.”
그때 홍대광이 눈치 좋게 끼어들며 중재를 했다.
“그래도 사람도 죽인 적 없고, 듣자 하니 정말 싹 털어가는 경우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꽤 양심적인 산적이라고 할 수 있지.”
“뭐요? 아니, 산적이 양심적인 게 어디 있어요? 왜? 아예 살인자도 양심적인 살인자랑 양심 없는 살인자랑 구분하시지?”
어…….
그렇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청명이 주먹이 운다는 듯 부들부들 떨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쯧. 그래, 내가 너희를 패서 뭐 하겠냐.”
애초에 산적이라는 것은 박멸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여기서 이들을 싹 다 털어 버린다고 해도 산채가 있을 만한 곳에는 곧 새로운 산채가 들어선다.
새로 들어선 산채가 이들보다 악독하면, 괜히 잘 있는 산적 놈들을 쫓아내서 사람이 죽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기상.”
청명의 말에 산적들이 튕기듯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생각할수록 열받는데. 이것들이 미쳐서 섬서에서 산적질을 해?”
과거 화산이 중원을 때려잡던 시절에는 섬서에 사파라고는 씨가 말랐었다. 그러다 보니 강호행을 하는 이들이라면 필수적으로 한 번은 거쳐야 한다는 산적 토벌도 제대로 못 해 보지 않았던가.
“너 이름이 뭐라고?”
“과, 곽경입니다! 거산대부 곽경!”
“거산대부는 얼어 죽을.”
청명이 그 거창한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장사 잘해라.”
“예?”
“너희 내가 지켜본다. 이쪽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 들리면 그날로 여기 놈들은 다 뒈지는 거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쯧.”
청명은 살짝 복잡한 눈으로 곽경을 바라보았다.
‘거슬리네.’
그냥 두고 가자니 찝찝하고, 모조리 털어 버리자니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유령문이었다.
지금부터 그가 할 사업은 천하로 물건을 날라야 하는 일이다. 당장 유령문을 제외하고도 중원 각지로 차를 팔아먹고 있지 않은가?
‘미처 생각을 못 했어.’
차야 그렇다 치지만, 유령문도들이 물건을 나르다가 산적들에게 잘못 걸리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진다. 날라야 하는 물건의 가치가 큰 만큼 배상금도 크게 물어야 할 테니까.
다리가 빠르니 어지간해서는 잡히지 않겠지만, 유령문의 무력이 부족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유령문을 가르쳐 봐야 얼마나 세지겠는가? 그럴 시간에 하나라도 더 날라야 하는데…….
“흐으으음.”
살짝 고민하던 청명이 잠시 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예, 대협!”
“그냥 도장이라고 해라.”
“예, 도장!”
“너희 두목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
“예? 두목이요? 녹림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놈의 산적새끼들은 단체로 성장이 덜 됐나. 뭐 이름만 붙이면 호랑이에, 거산에, 뭐? 녹림왕? 뭔 산적 새끼도 왕이 어쩌고…….”
청명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홍대광이 히죽 웃었다.
“너도 용이잖아. 화산신룡.”
“그걸 내가 붙였냐고!”
청명이 홍대광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그거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구만.
‘안 되겠어. 빨리 누구 하나 때려잡아서 새 별호를 받아야지.’
민망해 뒈지겠네.
“여하튼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한다고?”
“노, 녹림왕은 만나 뵙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응? 그건 뭔 소리야.”
“장강과 황하가 있는 곳 어디든 흑룡왕(黑龍王)이 계시듯이, 푸른 산이 있는 곳 어디에도 녹림왕이 계십니다. 어디에도 존재하고 어디에도 없으신 분이 바로 녹림왕이십니다!”
“아…….”
청명이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뭔 개소리야?”
“…….”
“너희 그렇게 대답하라고 배우냐? 머리도 나빠 보이는데 외우느라 고생깨나 했겠네?”
“……예, 조금.”
“쯧쯧쯧쯧.”
아무튼 구구절절 한심하기는!
“긴말할 것 없고. 그 녹림왕인가 뭔가 하는 양반한테 내가 보잔다고 전해라.”
그 말에 곽경보다 더 화들짝 놀란 건 홍대광이었다.
“화산신룡. 녹림왕은 그렇게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는 사람이 아니다. 신주오패라니까! 신주오패!”
“안 오면 앞으로 내 눈에 띄는 산적들은 다 뒈진다고 해.”
홍대광이 망연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새끼는 글렀어.’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이해를 못 한다. 아니,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할 생각이 없다.
소는 듣기라도 하지, 벽을 무슨 수로 이해시키는가?
“바, 반드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쯧.”
“그,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지?”
“그건 왜? 복수라도 하게?”
“보, 복수라니요!”
곽경이 싱싱한 생선처럼 팔딱 뛰어올랐다.
“언감생심 제가 어디 감히 그런 꿈을 꾸겠습니까? 그저, 도장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아야 제가 녹림왕께 전해 드릴 수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음, 그럼 유령문으로 오라고…….”
“으아아아아아아!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도자아아아아아앙!”
이 미친 새끼야!
이 사태에 휘말리기 싫어 먼 곳에서 지켜만 보던 유령문의 소문주 도운찬이 삶을 통틀어 가장 빠른 속도로 청명에게 돌진했다.
이 미친놈이 유령문에 녹림왕을 끌어들이네! 차라리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지!
“유, 유령문은 안 됩니다! 저희는 그런 거물을 감당할 수 없다니까요!”
“그래 봐야 산적인데?”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차라리 제 목을 따십시오.”
“거 소심하시네.”
청명이 혀를 찼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당가로 오라고 해.”
“다, 당가? 설마 사천당가 말씀이십니까?”
“그럼 당가가 거기 말고 또 있냐?”
곽경이 눈을 끔뻑였다.
사천당가는 정파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정파라 불리는 곳이다. 그런 곳으로 사파의 수장인 녹림왕을 부른다니.
‘난 이제 모르겠다.’
도무지 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가 없다.
“마, 말씀은 전하겠습니다만, 이게 제가 말한다고 그분께서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는 그냥 전하기만 하면 돼.”
“옙!”
청명이 영 못 미덥다는 듯 곽경을 슬쩍 보고는 백천을 향해 말했다.
“다 챙겼어?”
“말한 대로 다 넣기는 했다만…… 진짜 이거 다 털어 가도 되는 거냐?”
“괜찮아. 곡식은 남겼잖아.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 패악은 안 부리겠지.”
청명이 빙그레 웃으면서 곽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면 패악 좀 부려도 되고. 그렇지? 인연이라는 게 참 재밌더라고. 이 넓은 중원에서도 꼭 한 번은 다시 만나더라니까?”
“……그,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절대로!”
“아암, 그래야지.”
이제 수레에는 재물이 차곡차곡 모두 쌓였고 천으로 포장까지 끝났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네. 그럼 볼일 끝났으니…….”
“고, 고생하셨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뭘 가?”
“예?”
“와, 인정머리 없기는. 출발은 아침에 해야지. 가서 술상 다시 봐 와.”
“…….”
“얼른.”
“……예.”
“살펴 가십시오! 도장!”
“강녕하십시오!”
“또 들러 주십시오!”
꾸역꾸역 산길을 내려가는 수레를 향해 적호채의 산적들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행동과 속내가 같을 수는 없었다.
‘제발 빨리 가라, 이 개 같은 것들아!’
‘뭔 도사라는 놈들이 산적을 털어 가냐! 말세도 이런 말세가 없네.’
‘살면서 다신 보지 말자! 제발!’
사람이 끄는 기괴한 수레가 마침내 산 아래로 멀리 사라지자 임생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카아아악! 퉤! 저런 육시랄 것들!”
씩씩대며 허공에 삿대질까지 해 댄 그는 이를 갈며 고개를 획 돌렸다.
“대형!”
“……애들 있을 때는 채주님이라고 해라.”
“예. 채주님! 어쩌실 겁니까?”
“……뭘?”
임생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이리된 이상 산채를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저 지랄 같은 놈이 찾아와서 패악질을 부릴지 어떻게 압니까?”
“……임생아.”
“예! 바로 준비할깝쇼? 안 그래도 좋은 목을 봐 둔 데가 있는데.”
“……진대.”
“예?”
“옮기면 뒈진대.”
“…….”
임생이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곽경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출발하기 전에 와서, 토끼면 뒈진다더라. 주변에 괜히 다른 산채 안 생기게 관리 잘하고, 앞으로 뜯어먹는 것도 기존의 반의 반만 받으란다.”
“아, 아니. 우리가 토끼는데 지들이 뭘 어쩔 겁니까?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너 아까 그 누더기 입은 거지가 누군지 아냐?”
“……거지요?”
“개방의 칠결개다. 너 개방 눈 피해서 산채 차릴 자신 있냐? 있으면 가고.”
“……없죠.”
곽경은 결국 그 자리에 망연히 주저앉았다.
“우린 완전히 망했다. 어흐흐흑. 빌어먹을!”
처연한 울음소리가 적막해진 서산에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