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솔직히 이젠 저도 감당이 안 됩니다. (4)
“그러니까…… 녹림?”
“그렇지.”
홍대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砦)에 새로 합류한 산채지. 얼마 전에 들었다.”
“……녹림칠십이채라는 게 바뀌고 그러는 겁니까?”
“당연하지.”
홍대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흔두 개나 되는 산채가 모두 잘나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녹림의 칠십이채는 계속 바뀐다고 보면 되네. 세력의 크기와 강함을 증명한 산채가 기존의 산채를 밀어내기도 하고, 망해 버린 산채 대신 그 자리에 들어가기도 하지.”
그 말을 들은 윤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치고는 대단해 보이지 않는데.”
“그야 당연한 거지.”
홍대광이 히죽 웃으며 말한다.
“개방의 분타가 뭐 그리 대단해 보이던가?”
순식간에 이해되는 느낌에, 윤종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개방은 천하의 인정을 받는 문파지만, 그 분타 하나하나는 중소문파 만도 못하지. 칠십이채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중원이 넓다고 한들 일흔두 개의 산채를 모두 강대한 세력으로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지. 그러니 사실상 반절 정도는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해.”
“아아.”
“진짜 녹림의 힘이라 볼 수 있는 건 녹림왕(綠林王)이 머물고 있는 본채와 녹림십걸(綠林十傑)이 채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채들이지.”
홍대광의 설명에 백천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의 산채들이 모두 중소 문파급으로 강했다면 이미 녹림은 소림을 넘어 천하제일문파로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했습니다.”
“음, 그래. 더 궁금한 건 없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하나 남았는데…….”
“응?”
“……그래서 저 산적 놈들이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난들 알겠는가?”
홍대광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 백천의 시야에 허공으로 번쩍 들린 술 단지가 들어왔다.
꿀꺽! 꿀꺽! 꿀꺽!
“크흐! 역시 호걸이십니다!”
“화산의 도장들께서 호방하기 짝이 없다더니! 그 소문에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이 커다란 술 단지를 단번에 비우시다니!”
아주…….
‘지랄들을 한다.’
사람 머리통만 한 술 단지를 단숨에 들이켜는 청명의 좌우로 털북숭이들이 모여 아이처럼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얼마나 신명나게 쳐 대는지, 그 장단에 백천의 어깨가 절로 들썩일 지경이었다.
“카아아아아아아!”
청명은 깔끔하게 비운 단지를 탁 하고 내려놓더니 옆에 놓인 닭다리를 집어 들고 호쾌하게 뜯었다.
“좋구나!”
“마음에 드신다니 저희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하하핫! 도장께서 산채를 빛내 주시다니 해가 뜨지 않아도 눈이 부신 기분입니다.”
“헤헤. 그래요?”
“그럼요, 그럼요! 도장을 모시게 되어 일생의 광영입니다!”
“헤헤헤헤. 뭐 그렇게까지. 헤헤헷!”
헤벌쭉 웃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백천의 가슴에는 천불이 났다.
‘저 미친놈이 진짜!’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용케도 화산임을 알아본 산적 놈들은 마치 범을 만난 여우처럼 덜덜 떨며 용서를 빌어 왔다.
거기까진 좋다. 뭐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화산의 영웅들을 이리 만나 뵈었는데 그냥 보낸다면 녹림의 형제들이 저희를 욕할 겁니다. 부디 산채로 모실 영광을 주시옵소서!
웃기지도 않는 수작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 칼을 들이밀던 산적 놈들이 산채로 따라오라는데 그걸 넙죽 따라갈 멍청이가…….
‘저기 있을 줄이야.’
왠지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청명이 놈이야 원래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렇다 치는데. 그런데 저것들은 명색이 산적인데 왜 저렇게 매가리 없이……?”
“매가리가 없는 게 아니지.”
홍대광이 혀를 찼다.
“녹림칠십이채 모두가 대단한 산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칠십이채일세. 그 안에 들 수 있다는 건 그들의 실력과 세가 웬만한 문파 못지않다는 뜻이지.”
“그런데 왜 저러는 겁니까?”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자네들이 화산파니까.”
“……그게 왜요?”
홍대광이 혀를 찼다.
“검은 귀신같이 휘두르면서 왜 그렇게 어리숙하게 구는가? 막말로 지금 화산이 어떤 문파인가? 정파라고 어깨에 힘주는 곳들 중에서 저 구파일방을 제외하면 화산과 비견될 만한 문파가 있는가?”
“…….”
백천이 고개를 갸웃한다.
‘있나?’
그러고 보니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강호 견문이 짧아서 그런 건지, 정말로 비견될 문파가 없어서 그런 건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홍대광이 덧붙였다.
“아니지, 아니야. 설사 구파일방이라고 할지라도 만인방의 공격을 그리 깔끔하게 격퇴할 수 있을 거라곤 자신할 수가 없다니까. 물론 운도 따랐겠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금 화산이 구파 중 하나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들어가거나, 혹은 구파일방이 십파일방으로 바뀐다고 해도 이제는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말이지.”
“그렇게나요?”
“답답하기는!”
홍대광이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러니 저들이 저리 저자세로 나오는 것 아닌가? 녹림의 일개 산채 따위는 화산과 충돌하면 그날로 지푸라기 하나 남지 않을 테니까. 설마 이만한 산채가 만인방의 무력대만 하겠는가?”
백천과 다른 제자들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
‘우리 엄청 세구나?’
뭔가 들어도 들어도 실감이 잘 가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상대 문파의 위명에 눌려 물러서는 것은 언제나 화산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화산이 그 위명으로 다른 이들의 존중을 받게 된 것이다.
“이상한 기분인데.”
“그러게.”
어지간한 명문이라면 그 이름만으로 다른 이들의 양보를 받아내는 경우가 흔하니 익숙하겠지만, 쫄딱 망해서 명성이 존재하지 않는 수준까지 가 버렸던 화산의 제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 상황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원래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때, 정작 본인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홍대광이 히죽 웃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심심찮게 벌어질 테니, 자네들도 적응하는 게 좋을 걸세. 게다가 녹림은 좀 더 특별하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홍대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들이 누구랑 싸웠던가?”
“만인방이죠.”
“그래. 지금 녹림은 만인방과 전쟁 중일세. 다시 말하자면 자네들은 녹림의 적을 쓰러뜨려 준 은인인 셈이지. 그것도 무려 세 개의 대와 한 개의 단을 모조리 쓸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 그렇죠.”
“녹림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하지. 내 장담하건대 자네들은 지금 녹림왕을 만나도 술을 얻어먹을 수 있을걸?”
백천의 표정은 어쩐지 조금 전보다 더 복잡해졌다.
산적의 은인이라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지금 확실한 건 하나였다.
적어도 저 청명이 놈은 지금 아주 기분이 하늘 위에 있다는 것.
“크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
“헤헤헤헷!”
얼굴을 감싸 쥔 백천은 부쩍 지쳐 보였다.
“화산채니 어쩌니 하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내가 진짜로 산적 소굴에서 대접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근데 이 분위기 좀 친숙한 것 같기도 하고.”
“넌 좀 닥치라고! 좀!”
괜히 입 열었다가 본전도 못 챙긴 조걸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옆에서 모두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신경도 쓰지 않는 청명은 산적들이 계속 가져다주는 술과 고기를 게걸스레 퍼먹고 있었다.
음식을 우물거리며 청명이 물었다.
“그래서, 녹림이시라고?”
“예! 예! 그렇습니다, 도장! 적호채라 불리고 있습죠.”
거산대부 곽경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곰살궂게 말했다.
“물론 명성 높은 화산파의 도장들 앞에서 내세우기는 민망하지만, 저희도 당당한 칠십이채의 일원입니다.”
“헤헤. 그렇습죠, 그렇습죠.”
곽경의 옆에서 임생이 열심히 보조를 맞췄다.
비록 곽경에게 얻어맞아 이가 날아갔지만, 그런 건 지금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청명이 이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아저씨들은 산적이잖아요?”
“……예. 그렇죠.”
“그러고 보니 아까 모두 죽이니 어쩌니 하시던데. 산적질 하면서 사람 막 죽이고 그래요?”
“아이고. 도장님. 그게 설마 진심이겠습니까? 그건 그냥 영업용으로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요! 관리가 ‘네 죄를 네가 알렷다!’를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그놈들이 진짜 죄가 무엇인지 아는 건 아니잖습니까?”
“껍데기를 벗겨서 어쩌고 하는 소리도 들은 것 같은데?”
“하하하하. 이 미친놈이!”
퍼억!
“꺄울!”
순식간에 임생의 턱을 다시 돌려 버린 곽경이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요즘은 도통 무서워하질 않아서요.”
청명이 살짝 의심 어린 눈으로 곽경을 응시했다.
“진짜로 하는 건 아니고?”
“아이고, 도장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백주대낮에 사람을 죽입니까!”
곽경이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볼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서도 안 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 산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산적 손에 죽었단 소문이라도 나 보십시오. 누가 이 산에 오겠습니까?”
“……안 오겠지.”
“그렇지요! 세상에 어디 길이 하나인 것도 아니고, 여기가 위험하다 싶으면 다른 길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인데요. 싫든 좋든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산채를 차리면 좋겠지만, 그런 곳은 애초에 우리 같은 작은 산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곳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 저희는 적당히 겁을 주고 적당히 뺏어야 하는 거지요. 심지어 또 다 뺏으면 안 됩니다. 다 뺏는 척했다가 어느 정도는 돌려주고,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한데? 다시 한번 가 볼까? 운 좋게 안 걸릴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뭔 산적이 그래?”
“산적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곽경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봇짐 지고 산을 오르는 양민들이 무슨 큰돈이 있겠습니까. 결국 제대로 털 수 있는 건 상행인데…… 아시다시피 상인들은…….”
“무사를 고용하지.”
“아, 그게 아닙니다.”
“응?”
곽경이 히죽 웃었다.
“상인들은 관과 친하기 때문에, 몇 번 털린다 싶으면 관에 가서 드러눕습니다. 그럼 토벌대가 산으로 쫓아오죠. 그럼 그날로 장사는 접는 겁니다.”
“…….”
“이게 생각보다 굉장히 섬세한 직업입니다, 이게. 딱 관과 민심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털어 먹어야 장수하는 법이지요. 허허허.”
청명이 눈을 끔뻑였다.
“……생각보다 엄청 힘들게 사시네요.”
“허허. 쉽게 사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이 다 그런 거지요.”
곽경이 헤벌쭉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청명은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이리로. 이리로 잠깐만.”
“네?”
“잠시만, 잠시만.”
곽경이 고개를 갸웃하며 청명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왜 그러시는…….”
그때 벌떡 일어난 청명이 그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아아악!”
곽경이 붕 날아 바닥으로 처박혔다.
“이게 어디서 개소리를 그럴싸하게 늘어놓고 있어! 그렇게 힘들면 농사라도 지어서 먹고살 것이지! 가만히 산에 처박혀서 오가는 사람 돈이나 뺏는 놈들이, 뭐? 인생? 인새애애앵? 이것들이 단체로 돌았나?”
“아이고오! 도사님!”
바닥에 처박혔던 곽경이 무릎걸음으로 청명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더니 그 앞에 최대한 납작 엎드렸다.
“농사도 땅이 있어야 짓지 않습니까! 그렇게 먹고살 길이 없으니 산에 오르는 거지요. 막말로 사람도 없고 산짐승만 가득한 이 산골짜기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쯧!”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부라리고 있던 청명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정말 가난해서 그런 거지?”
“예!”
“먹고 살 길이 막막하고?”
“그럼요, 당연히 그렇지요!”
“그래?”
청명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이미 뭔가를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저 산적 아저씨 실수하셨네.”
“그러게. 꼬투리 잡히면 끝인데.”
“불쌍해.”
“응?”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홍대광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청명이 입을 뗐다.
“창고 열어 봐.”
“……예?”
곽경이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그렇게 먹고살기가 힘들면, 산채에 재물이 없겠지.”
“…….”
“그치?”
“…….”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뭐 하나라도 나오면 뒈지는 거야.”
“…….”
“앞장서.”
곽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짓장처럼 질렸다.
“도, 도장! 그, 그게…….”
그가 쉬이 움직이질 않자 청명이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끼기기기기긱!
청동으로 만든 술잔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끔 구겨진 술잔은 이내 작은 공처럼 작게 말렸다.
청명은 그 술잔이었던 것을 곽경에게 가볍게 던졌다.
툭.
얼결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은 곽경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네가 안내할래? 아니면 내가 직접 찾을까?”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대협!”
눈치가 빤한 산적답게, 그는 이번에도 빠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재물이 아무리 중요한들 목숨보다 중하지는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