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솔직히 이젠 저도 감당이 안 됩니다. (2)
아침이 밝았다.
현종은 자신의 앞에 도열한 화산의 제자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요즘 좀(?) 사고를 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인방의 악도들을 물리친 자랑스러운 화산의 문하들이 아니던가?
오늘같이 특별한 날은 우선 이 아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마음을…….
늠름한…….
‘응?’
뭐지?
분명 늠름하다.
쫙 편 어깨는 말이다.
하지만 그 어깨 위의 얼굴이 뭔가 불그스름하고 푸르뎅뎅한 것이…….
“……맞았냐?”
“…….”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제자들이 대답 없이 현종의 시선을 피했다.
현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냉큼 누군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청명이 네이노오오오오옴!”
“네?”
멍하니 서 있던 청명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현종은 그 모습에 더욱 불같이 화를 냈다.
“이제는 하다못해 사형, 사숙들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
“저요?”
청명이 눈을 끔뻑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네가 아니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였겠느냐!”
“제가요?”
“그래! 너!”
청명이 고개가 천천히 한쪽으로 돌아갔다.
움찔.
그의 시선을 받은 백천이 낮게 휘파람을 불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하.”
살면서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어 본 적은 있어도, 본인이 억울해 본 적은 별로 없던 청명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청명은 누구보다 억울했다.
“저…….”
저 망할 사숙 놈이 지가 패 놓고!
청명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거 잘못했으면 좀 맞을 수도 있지.”
“너는 좀 다물어! 너는!”
현영이 슬쩍 청명을 거들고 나서자 현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슬픈 것은, 그 현영조차 아이들을 신명나게 패 버린 이가 청명이라는 데에 조금의 의심조차 품지 않는단 점이었다.
“진짜 제가 팬 거 아닌데요!”
“그럼 누가 팼겠느냐, 누가!”
현종의 물음에 제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
제자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인 현종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 황망함이 어렸다.
백자 배의 대제자이자, 화산을 대표하는 검수인 화정검 백천이 고개를 돌린 채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
너라고?
청명이가 아니라고 너?
백천아?
“크흐흐흠.”
백천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며 정광 어린 눈으로 당당히 말했다.
“문파의 기강이 뒤흔들리는 것 같기에, 화산의 대제자로서 아이들을 훈계하였습니다.”
“훈계?”
“예!”
“……언제부터 화산이 사람을 패서 훈계를 했느냐?”
“어?”
세상 당당하게 답하던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
할 말을 잃은 현종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러자 현상이 그 마음 다 안다는 듯이 현종의 어깨를 감쌌다.
“아이들이 떠나는 자리입니다. 진정하시지요, 장문인.”
“……글렀어. 여긴 이제 글렀어.”
“애들 앞에서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자자, 진정하시고. 현영아. 장문인을 잠깐 뒤로 모셔라.”
“예, 사형.”
현영이 현종을 다독이며 뒤로 이끌었다.
“……화산의 근본이……. 화산이…….”
현종이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안타깝게도 누구도 그 말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크흠.”
현상이 앞에 서서 대신 입을 열었다.
“이번 사천행에 청명이를 따라갈…….”
“장로님.”
백천이 평소보다 조금 작은 목소리로 슬쩍 말을 꺼냈다.
“제자들끼리 대화를 통해 이번 사천행에 따라갈 이들을 결정했습니다.”
“……그걸 왜 니들이 정하는데?”
“…….”
어이가 없다는 듯한 현상의 말에 백천은 그건 생각지 못했다는 듯 움찔했다.
“쯧쯧쯧. 이놈들이 이제는 아주 막 가는구나. 그래. 겨우 그것 때문에 사형제들끼리 드잡이를 했느냐?”
“드잡이는 아니고…….”
저 새끼들이 먼저 덤볐는데요?
하지만 백천은 차마 그 속마음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 말은 너무도 청명 같았으니까.
“백천, 윤종, 조걸, 유이설, 당소소. 그리고 백상.”
“예!”
호명된 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백천아.”
“예, 장로님.”
“본래 이번 일은 현영이나 내가 함께 가는 게 맞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구나. 운검이라도 딸려 보내고 싶다만, 그러기도 힘드니 별수 없이 네가 인솔을 해야겠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장로님. 걱정 마십시오.”
백천이 믿음직스러운 미소와 함께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미 한 번 가 본 곳이니,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 유령문주가 동행할 테니 모심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도록 하거라.”
“예!”
부드럽게 웃는 백천의 뒤쪽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거면 우린 왜 맞은 거야?”
백천에게 맞은 건 그나마 버틸 만했다. 진짜 아픈 곳은 중간에 난입한 유이설에게 걷어차인 정강이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들!”
“그래도 우리가 사제인데, 그렇게 무자비하게 패나?”
“확 가다 엎어져라.”
백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작게 속삭였다.
“다 들린다.”
“…….”
“출발 전에 한 번 더 할까?”
“……아닙니다.”
대제자로서의 위엄을 보인 백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편, 뒤쪽에서는 청명과 운검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거라.”
“걱정은요. 저는 항상 관주님을 믿죠.”
청명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딱 하나 걸리는 것은…….”
“음?”
“헤헤. 그, 좀 그런 게 있거든요. 막상 구르는 제자들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고,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고. 그런데 그게…….”
“이번 만인방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아이들의 목숨을 살린다는 거겠지?”
“바로 그거죠. 역시 관주님!”
“내가 악귀가 될수록 아이들이 안전해진다는 말이로구나.”
“정확해요.”
운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운검의 눈에서 시퍼런 빛이 쏟아졌다.
“네가 돌아와서 깜짝 놀랄 정도로 단련을 시켜 놓으마.”
“네, 관주님.”
“그리고…….”
운검이 가만히 청명을 보다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맙구나.”
“에이. 그게 뭐 별거라고요.”
“…….”
청명을 바라보는 운검의 눈빛이 심유하기 그지없었다.
어젯밤 청명이 그를 찾아와 두 권의 비급을 내밀었다. 하나는 육합. 또 하나는 칠매(七梅). 누구나 아는 화산의 기본검공들이었다.
하지만 청명이 준 비급은 특별했다. 한쪽 팔을 잃어 좌수검을 익혀야 하는 운검을 위해 맞춤으로 재해석된 비급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팔을 잃으며 바뀐 무게의 균형마저 고려해 새로 써진 비급이었다.
‘그런 비급을 쓸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굳이 운검 하나만을 위해 새로 비급을 써 낸 그 노력과 정성이었다.
“걱정 말고 다녀오거라. 제자들도 강해지겠지만, 나도 함께 강해질 것이다.”
의지로 활활 타는 그의 두 눈을 보며 청명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너무 과했나?’
설마 누구 하나 잡진 않겠지?
에이.
* * *
화음현.
잘라 낸 비고가 커다란 수레에 실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분주하게 만년한철을 동아줄로 엮어 수레에 고정시켰다.
“……근데 이거 수레가 통주물 쇠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한철도 무거운데, 이걸 끌고 갈 수가 있나? 어지간한 명마라도 금방 퍼질 것 같은데?”
수레를 가만 살펴보던 백천이 입을 뗐다.
“청명아.”
“응?”
“말은 몇 마리나 준비했느냐?”
“일곱 마리.”
“음. 일곱이면 좀 적은 것 같은데? 이걸 일곱 마리로 끌고 갈 수 있겠느냐?”
“괜찮아. 힘 좋거든.”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말은 어디에 있느냐? 이제 수레에 엮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은하상단 지부에…….”
“여기 있잖아.”
“응? 어디?”
“여기.”
청명이 턱짓으로 백천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백천의 곁에 선 나머지 화산의 제자들까지 쭉 훑었다. 백상, 윤종, 조걸, 유이설, 당소소까지.
“…….”
“내공도 쓰고, 경공도 쓰고. 크으, 이만한 말이 없지.”
“…….”
“걱정 마. 아무리 세게 달려도 수레 안 부서지게 내가 특별히 주문한 거니까. 마음껏 신나게 달려도 돼.”
“개새…….”
“응?”
“……아니다.”
백천이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것도 없다. 저 망할 놈이 그들을 순순히 쉬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이 정도면 그래도 양호…….
“청명 도장님! 여기에 옮기면 됩니까?”
“오, 왔구나. 안 그래도 기다렸는데. 여기 놔 주세요.”
“옙!”
다가온 상단원들이 끙끙대며 날라 온 무언가를 청명의 앞에 내려놓았다.
쿠웅!
여러 상자가 땅에 떨어지며 커다란 소음을 빚었다.
‘뭐지?’
청명을 제외한 모두가 불안 가득한 얼굴로 상자 안을 바라보았다.
‘공?’
쇠로 만든 커다란 공들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공에 사람 주먹보다 살짝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신기한 물건이네.”
“오? 잠금쇠가 달려 있네? 이거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하하…….”
거참 희한하지.
희한…….
“차.”
“……응?”
“팔다리에 차면 돼.”
“…….”
백천이 청명과 상자 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걸?”
“응.”
청명이 흐뭇하게 웃는다.
“제시간에 완성됐네. 이거 돈 좀 들었어.”
“…….”
“뭐 해?”
모두의 눈가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팔다리에 이걸 차고, 저 쇠수레를 밀고, 사천까지 간다고?
‘저…… 마귀 같은 놈이…….’
실수다.
청명이 놈을 너무 얕봤다. 아무리 화산에서의 수련이 힘들어도 저 마귀 놈이 그보다 못할 리 없는데!
“시간 없으니까 빨리 차. 아니면 내가 채워 주랴?”
“……아니다.”
모두 다 채념해 버린 백천은 힘없이 상자 안의 쇠공들을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뭐, 이거 뭔데 이렇게 무거우냐?”
“묵철(墨鐵)이라는 거야. 웬만한 쇠보다 열 배는 무겁지.”
황종의가 흐뭇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구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웃지 말라고 이 양반아!
아니, 저 양반도 이제 머리가 좀 이상해진 거 아냐? 이걸 보고도 웃음이 나오나?
“아, 빨리빨리 차. 시간 없어.”
“어휴…….”
모두가 양 손목과 발목에 묵철을 찼다.
“끄읍.”
“와……. 와……. 이거.”
“어, 어깨가 빠질 것 같은데?”
팔이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자, 다 찼으면 이제 가서 자리 잡아야지.”
청명이 쇠수레의 앞쪽을 가리켰다.
화산의 말……. 아니, 제자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수레 앞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는 말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사람이 자리한 기괴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너는 뭐 해?”
“……예?”
“왜? 타고 갈려고?”
“…….”
은근슬쩍 수레 뒤에서 청명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 피우던 혜연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빨리 차.”
“……예.”
철컥. 철컥.
팔다리에 쇠공을 찬 혜연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수레의 앞쪽으로 향했다.
“하여튼 빠져 가지고는.”
청명이 혀를 차고는 웃으며 황종의를 돌아보았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어쨌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 문제는 잘 해결해 주세요.”
“예. 마침 방금 상단주님께서 보낸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은하상단은 도장과 운명을 함께할 것입니다.”
“……확실히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으시네요.”
“하하하. 그게 상인 아니겠습니까?”
의뭉스런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자, 그럼…….”
“야! 야! 화산신룡!”
이제 정말 출발하려는데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너 또 어딜 가려고! 나도 데리고 가야지!”
청명이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거지 아저씨는 뭐 빌어먹을 것도 없는데, 왜 자꾸 찾아와?”
청명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홍대광이 허리를 숙인 채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다 벌떡 고개를 들고 외쳤다.
“인마! 어딜 가면 간다고 나한테 재깍재깍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같이 가려고요?”
“당연하지! 내가 없으면 누가 너한테 정보를 전해 주냐? 내가 이번에 화음 분타를 확장하면서 보고 체계를 만들었다. 나를 데리고 가면 화산에 변고가 생겨도 금방 알 수 있다.”
“흐으음.”
하지만 청명은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홍대광이 가슴을 쳤다.
“하……. 화산신룡! 나 홍대광이다, 홍대광!”
“그래서요?”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냐? 내가 이번에 네가 엄청 놀랄 정보를 가지고 왔다.”
“놀랄 정보?”
청명이 드디어 흥미를 보이자 홍대광이 좌우를 슬쩍 살피고는 그에게로 바짝 붙었다.
“이번에 들어온 정보대로라면, 사천당가의 가주가 홀로 만인방에 쳐들어갔던 모양이다.”
“엥?”
청명의 눈이 커진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글쎄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 얼마 되지 않아 무사히 만인방에서 빠져나와 사천으로 돌아갔다고 하던데?”
“…….”
청명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돌려 사천 쪽을 바라보았다.
‘무리하셨네.’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좋은 술을 준비해야겠지.
“봐라! 내가 이만큼 쓸모가 있는 인간이다! 그러니 나는 꼭 데려 가야 한다.”
홍대광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쫙 폈다. 청명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를 훑어보다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뭐. 같이 가시죠.”
“후후후. 그래야지!”
청명은 고개를 돌리며 황종의에게 말했다.
“소단주님.”
“예?”
“쇠공 남는 거 있어요?”
황종의가 청명과 홍대광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합니다만.”
“잘됐네요.”
“응? 쇠공?”
늦게 와서 사정을 모르는 홍대광이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으아아아아아! 빌어먹으으으으을!”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온 거지가 수레를 끌며 사천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