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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10화 (410/1,567)

410화. 아니! 알겠는데 못 참겠다고! (5)

청명은 백매관 앞에 모인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아주 그냥……."

숙취로 얼굴이 반쯤 썩은 화산의 제자들이 연신 구역질하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사숙."

"으응?"

"검은 또 어디다 팔아먹었어?"

"……."

백천이 슬쩍 자신의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진검은 온데간데없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목검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설마 또 해 먹었어?"

"……."

백천이 대답을 못 하자 청명이 한심하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잘하는 짓이다. 아주 잘 하는 짓이야."

야도와 맞상대를 하며 검이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물론 저번처럼 아예 부러뜨려 먹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부러지지만 않았을 뿐, 군데군데 날이 나가 거의 톱날처럼 변해 버린 검은 제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어디서 재주 좋게 잘도 검 구해 왔다 했더니 그걸 또 해 먹네. 또!"

백천이 찔끔하여 시선을 슬쩍 돌렸다.

문제는 지금 찔리는 사람이 백천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목검 찬 사람 거수."

"……."

청명의 말에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어 올렸다. 거의 반절에 가까운 이들이 손을 들자 청명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주 잘들 나셨네요, 아주."

청명의 얼굴이 슬슬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내 버럭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명색이 검수라는 것들이 그깟 싸움박질 좀 했다고 검을 해 먹어? 그것도 당가에서 특수 제작한 검을? 어? 돈 한 푼 못 벌어 오는 것들이!"

"……그거 공짜로 받은 거잖아."

"시끄러워!"

괜히 딴죽을 걸었던 조걸이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한 시진만 더 붙어 싸웠으면, 검 날려 먹고 떼죽음했겠네! 쯧쯧쯧쯧."

혀 차는 소리 때문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에 이르자 화산 제자들의 입이 불퉁 튀어나왔다.

'아니, 좀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물론 그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이번에 쳐들어온 만인방의 방도들은 대체로 중병(重兵)을 사용했다. 대도나 거치도, 그리고 무거운 장창 등.

반면 화산의 매화검은 화산 특유의 화려하고 쾌속한 검법을 펼치는 데 용이하도록, 일반적인 장검보다 좀 더 가볍게 제작이 되어 있었다.

얇고 가벼운 검으로 만인방의 중병을 상대했으니, 검이 멀쩡한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하지만 청명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연신 턱을 매만졌다.

'이건 생각을 못 했네.'

과거 화산은 지금의 백자 배나 청자 배쯤 되는 이들이 다른 문파의 전력을 맞아 생사결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청명을 비롯한 당대의 청자 배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뛰는 판에, 서른도 넘지 않은 제자들이 나설 구석이 어디 있었겠는가?

때문에 청명은 간과한 것이다. 저들이 아직 검에 내력을 완전히 실을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을.

전투가 조금만 더 길어져서 검이 단체로 부러져 나가기 시작했다면 사상자가 엄청나게 늘어났을 게 분명했다.

"끄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는다.

'이거 무슨 수를 쓰긴 해야겠는데.'

막 청명이 해결 방안에 대해 고민하던 그 순간이었다. 조걸이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응?"

"왜 네가 거기에 서 있냐? 지금은 수련 시간인데."

"응? 못 들었어?"

"……뭘?"

청명이 피식 웃고는 뭔가 말하려는데, 마침 뒤쪽 전각 문이 열리며 운검이 걸어 나왔다.

순간 화산 제자들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다들 모였느냐?"

"예! 관주님!"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과거에도 화산의 제자들은 운검을 의지하고 따랐다. 청명이 나타난 이후로는 운검보단 청명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단 한 번도 그를 무시하거나 외면해 본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 운검을 바라보는 화산 제자들의 눈빛은 과거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그들 모두가 보지 않았던가.

운검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졌던 장면을 말이다.

눈이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전과는 그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기세들이 아주 좋구나."

운검이 가볍게 웃었다.

여전히 안색은 창백했지만, 운신하는 게 확실히 덜 힘들어 보이는 것이 어느 정도는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제자들을 둘러본 그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몸이 완전하지가 않다."

그 담담한 말에,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본래 백매관의 교육은 내가 담당했으나, 지금 내 몸 상태로는 너희를 가르치기가 힘이 드는구나."

"괜찮습니다, 관주님!"

"아무 걱정 마시고 쉬십시오! 절대 농땡이 피우지 않겠습니다!"

"건강이 제일입니다!"

제자들의 든든한 격려가 우레처럼 쏟아졌다.

운검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구나."

하지만 저들의 말대로만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 해서 훈련을 너희의 자율에만 맡겨 둘 순 없다. 이미 자율 훈련은 충분히 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운검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내가 몸을 회복할 때까지……."

운검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본 화산 제자들은 술렁술렁 동요하기 시작했다.

"……왜 저길 보시지?"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지만 운검은 그들의 기대를 깔끔하게 배반했다.

"내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청명이를 백매관의 교관으로 임명하고 한동안 백자 배와 청자 배의 수련을 일임하기로 했다."

"관주님!"

"아니, 대체 왜 그러십니까!"

"미치셨습니까?!"

"아니, 이 새끼가?"

"컥!"

윤종의 죽빵이 조걸의 턱을 돌려 버렸다. 너무 놀라 도를 넘어 버린 조걸은 처절하게 응징당해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한 방에 조걸에게 버릇이 뭔지를 알려 준 윤종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안 됩니다, 관주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청명이 그동안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을 훈련시켜 온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백매관의 기본 수련이 끝난 뒤의 추가적인 수련에 적용되던 일이었다.

그런데 백매관 자체를 청명이 운영한다고?

이건 망아지의 고삐를 푸는 수준이 아니라 호랑이를 우리에서 자유로이 풀어놓는 수준이다.

"어허."

그때 청명이 혀를 차며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쯧쯧쯧. 문파의 기강이 이래서야! 관주님이 정하신 일에 어디 제자들이 불만을!"

"문파 기강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양심은 서안에다 팔아먹고 왔냐!"

"……아뇨, 사숙. 말씀은 바로 하셔야……. 그런 건 원래 없었죠."

"아. 그렇지."

그 소란한 분위기를 보면서도 운검이 평온하게 말했다.

"당황스럽겠지만 이해해다오. 최대한 빠르게 정양을 마치고 돌아오마."

"아, 아닙니다, 관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푹 쉬셔야 합니다!"

"네! 푹 쉬시고 천천히……. 아니, 되도록 빨리……. 아니, 그게 아니라 천천히……. 하, 모르겠다."

조걸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운검은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동안 우리가 나름 눈 가리고 아웅 하던 것이 있지 않았느냐. 배분과 법도 때문에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던 일이었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며 내 나름 느낀 바가 있느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그 말에는 모두가 부정할 수 없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운검은 청명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숙께서 정양에 드셔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죠. 맞긴 맞는데."

"……왜 하필 저놈한테."

사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해는 된다.

수가 부족한 운자 배에서는 딱히 운검의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운검을 제외한 운자 배의 무위는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백매관을 맡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현상 정도인데, 현상 역시 이번 전투에서 심하게 중독이 되어 아직 몸이 완전하지 못했다.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저 새끼는 왜 저리 쓸데없이 건강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잔뜩 다쳐 놓고 왜 벌써 쌩쌩하냐고요!"

조걸이 눈을 부라렸다.

"이건 소소 잘못이다!"

"제가 뭐요?"

"네가 치료를 너무 잘해서 벌어진 일 아니냐! 책임을 통감……."

"조걸아. 제발 닥쳐라. 주둥아리 다시 돌려 버리기 전에."

"넵."

아무래도 이 소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청명이 숨을 들이켜고 입을 열려는 바로 그 순간.

"조용!"

"……."

백천이 눈을 찌푸리며 제자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의 준엄한 시선에 제자들이 모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뭐가 불만이냐?"

백천이 호통을 쳤다.

"배에 헛바람이라도 들어갔느냐?"

"아닙니다!"

"만인방을 이겼다고 뭐라도 된 것 같더냐?"

"아, 아닙니다, 사숙!"

"절대 아닙니다!"

그의 눈빛은 흡사 호랑이 같았다.

"만인방과 싸우며 뭘 느꼈느냐?"

"……."

"나는 내가 얼마나 모자라는지,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먼지 느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우리는 힘이 부족하여 저 만인방을 응징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가 힘이 충분했다면 장문인께서는 이미 우릴 이끌고 광서성으로 향하셨을 것이다!"

정확하게는 현종이 아니라 청명이겠지만.

"그런데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잘한 불만이나 늘어놓고 있단 말이더냐?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수련을 해서 실력을 끌어 올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너희가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한 놈들이었느냐!"

노기 어린 그의 꾸지람에 화산의 제자들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만인방을 이겨 냈다는 사실에 부풀어 있던 가슴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갔다.

"청명아!"

"어? 응?"

"사정 봐줄 것 없다!"

두 눈에 정광이 어린 채로 백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 이번 전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사정 봐주지 말고 단련시켜 다오! 누구 하나 다치고 죽지 않도록!"

"……."

청명이 입을 뻐끔거렸다.

어…….

저거 내가 하려던 말인데, 그거…….

어…….

이상하지. 정말 이상하네.

청명이 하려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백천의 입으로 들으니 왜 이리…….

'왜 재수가 없지?'

아……. 이게 내 말을 듣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구나?

청명이 잠깐 말을 잃고 있자 백천이 다시 다그쳤다.

"뭐 하느냐!"

"아! 알았어!"

뭔가 몰아붙이려다 되레 당해 버린 청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사숙 말이 다 맞아. 이번에는 다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이제부터 더 강한 적들과 싸워야 해."

"……."

"이번에 다들 느꼈겠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자길 지켜 주는 건 실력밖에 없어.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해!"

스릉.

청명이 검을 뽑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다져야지. 육합부터 다시 시작한다."

진검과 목검이 일제히 뽑혀 나왔다.

어느새 더없이 진지해진 제자들의 눈을 보며 청명은 결국은 웃고 말았다.

'이젠 내가 되레 재촉당하는 기분이네.'

뭐, 좋지.

어디 저 입에서 곡소리가 나오게 해 보실까?

"기수식부터 시작!"

* * *

"이곳이 화산이로군."

두 사내가 우뚝 솟은 화산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한 발 앞에 서 있고, 다른 한 사내는 그 뒤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퍽 이상한 광경이었다.

하는 양을 봐서는 앞선 이가 좀 더 신분이 높아 보이건만, 그의 복장은 마치 밭에서 막 돌아온 것처럼 수수하기 짝이 없었다.

"계형."

"예, 소문주님."

"장문령부를 가진 이가 지금 이 화산에 있는 것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흐으음."

소문주라 불린 이는 불만 어린 얼굴로 깎아지른 산세를 노려보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그래도 화산이면 정도를 걷는 문파일진대! 타 문파의 장문령부를 강탈하고 이리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다니!"

"말씀드렸다시피, 화산의 문도들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되었다!"

소문주라는 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계형이 목을 움츠렸다.

"화산이 만인방을 물리쳤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만큼 강해졌으니 당연히 안하무인으로 굴 만하겠지. 하나 그렇다고 해서 고분고분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내 이 일에 대해 도리를 따져 묻겠다!"

유령문의 소문주.

유령귀수(幽靈鬼手) 도운찬(都韻燦)이 단호한 얼굴로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계형이 말없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겪어 보면 아시겠지.'

겪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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