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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07화 (407/1,567)

407화. 아니! 알겠는데 못 참겠다고! (2)

차분해 보이는 중년인.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와 깔끔하게 정리된 수염은 그의 성향을 능히 짐작하게끔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청수한 중년 문사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양민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의 감상이다.

강호에서 칼 밥을 먹는 이라면 다른 점이 먼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녹포(綠袍).

전신을 두른 녹의(綠衣)와, 일반적인 의복에 비해 두 배는 더 넓은 소매.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일소는 요사스런 눈빛으로 한동안 말없이 중년인을 응시했다.

천하의 만인이 두려워하는 만인방의 대전에 홀로 걸어 들어온 그는 마치 이곳이 제집이라도 되는 양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다. 그 사실이 장일소의 신경을 긁었다.

"허락도 없이 함부로 막 들어오다니, 예의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네?"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물론 나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네만……."

녹의의 중년인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막질 않더군. 안내도 해 주지 않고. 그러니 별수 없지 않나."

그 말에 장일소는 짜증 서린 눈으로 안으로 박차고 들어온 이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가 몸을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쯧."

평소의 장일소라면 제 수하의 저런 추태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리 애들은 주제 파악이 빠르거든.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감히 독왕의 앞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녹의의 사내.

독왕 당군악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천하의 패군 장일소가 나를 바로 알아봐 주다니. 내가 인생을 헛살진 않은 모양이오."

"쯧."

장일소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며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당군악이라.'

겉으로야 태연했지만 장일소도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접점이라고는 없는 당가의 가주가 만인방 한가운데에 홀로 걸어 들어올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목이라도 내어 주러 왔나? 독왕 당군악의 목이면 선물로 나쁘지는 않지."

"내어 주는 정도야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만인방 정도가 감히 내 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표정은 더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 압박감에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먼저 다시 입을 뗀 건 장일소였다.

"해서, 무슨 일이지?"

"경고를 하러 왔소, 패군."

"경고?"

경고라는 말에 장일소의 눈이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호가명은 그 모습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표정은 장일소가 살심이 동할 때 나온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안 돼.'

지금 독왕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리 독왕이라고 한들 만인방의 배 속에서 살아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다.

당가가 가주를 잃는다는 건, 다른 문파가 장문인을 잃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군악이 이곳에서 화를 입는다면 당가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만인방으로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경고……. 경고라. 살면서 누군가에게 경고를 받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이번이 처음이 되겠지."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독왕 당군악. 걸물 중의 걸물이라고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하군. 그래, 어디 한번 지껄여 봐. 들어는 봐야지. 그래야 죽이고 나서 궁금하지 않을 테니까."

살기 어린 말을 듣고도 당군악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화산에서 손을 떼시오."

"……."

장일소의 눈썹이 살짝 꿈틀댔다.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비꼴 준비가 되어 있는 그였지만, 지금 저 말은 예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화산?"

"그렇소."

장일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당군악을 빤히 보았다.

"그러니까……."

수염 하나 없는 얼굴을 가볍게 긁은 그는 황당함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되물었다.

"잘난 당가의 가주께서 호위도 없이 홀로 만인방에 쳐들어와 하는 말이, 화산에서 손을 떼라?"

"……."

"심심해서 장난하자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럼…… 위대하신 당가주의 눈엔 만인방이 너무도 하찮았나 보지? 감히 그따위 경고를 입에 올릴 만큼?"

내내 비뚜름하게 웃던 장일소가 표정을 싸늘히 굳히며 침상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뱀이 미끈한 몸을 일으키며 긴 혀를 날름거리는 듯 요사하고 섬뜩한 기세였다.

하지만 정작 그 기세를 받는 당군악은 여전히 무감해 보였다.

"일단은 진정하지."

"굳이?"

"진정하라고 했을 텐데?"

당군악이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장일소를 마주 보았다.

'끄윽.'

두 거인이 대치하며 뿜어내는 존재감에 대전에 있던 이들은 거대한 바위가 내리누르는 듯한 압력에 신음했다.

그때 살기가 번들대는 눈으로 당군악을 노려보던 장일소가 돌연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재미없는 이야기 하면 목 잘라 버린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당가의 의지요. 만인방이 다시 화산을 노린다면 그때부터는 화산이 아닌, 사천당가를 상대해야 할 것이오."

"……당가와 화산이 무슨 관계기에?"

"당가는 이미 오래전에 화산과 동맹을 맺었소. 그러니 함께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하……. 하하핫? 하하?"

장일소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잠깐 웃음을 터트리더니 물었다.

"그깟 작은 문파 하나를 위해서 당가가 대신 만인방과 싸우겠다고? 당가가 미친 걸까, 아니면 만인방이 만만해 보이는 걸까?"

"물론 둘 다 아니오."

"그럼? 아, 내가 사천당가를 너무 우습게 봤나? 사천당가가 만인방쯤은 가뿐하게 상대할 수 있는 곳이었던가?"

비아냥거리는 장일소를 보며 당군악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천당가만으로 부족하다면 남만야수궁은 어떻소?"

그 말에 장일소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확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남만야수궁 역시 화산을 친우로 여기고 있는 문파니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 거요. 어떻소, 패군? 화산과 당가, 야수궁을 동시에 상대할 용의가 있소?"

장일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기다란 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이 있다. 그들은 모두 정파를 표방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얽히지 못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구파일방 출신의 화산과 오대세가인 당가가 동맹을 맺었다? 거기에 중원이라면 덮어놓고 이부터 뿌득뿌득 갈아 대는 새외오궁 중 하나인 남만야수궁마저?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헛소리나 해 댈 이가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독왕 당군악이 아닌가?

"그러니까……."

장일소가 묘한 얼굴로 당군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화산에 사천당가, 거기에 남만야수궁까지 한 배를 탔으니, 주제를 알고 이쯤에서 꼬리를 말아라?"

"꽤 거친 해석이로군."

"재미있네. 재미있어. 이 장일소를 시정잡배쯤으로 보지 않고는 감히 할 수 없는 제안이지. 하하하핫. 아주 재미있는데?"

장일소가 살심이 동하는지 슬쩍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눈빛이 그의 눈을 새파랗게 스쳤다.

하지만 당군악은 그 어떤 반응도 없이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아슬아슬하던 대치 끝에, 장일소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 네 말대로 하지."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호가명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패군 장일소.

그는 손해 보는 걸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당가주가 저리 나온다고 해서 쉬이 물러설 이가 아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만류하는 그를 후려치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물러난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가?'

호가명이 얼이 빠진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장일소는 그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당군악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대신 적당히 보상은 해 줘야겠어. 무슨 뜻인지 알지?"

"뭘 원하지?"

"역시, 빨라서 좋다니까."

장일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군악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만한 고수들이 거리를 좁힌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군악은 딱히 그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옆으로 바짝 다가선 장일소는 당군악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듣자 하니 요즘 차 무역으로 쏠쏠하게 돈을 벌고 있다던데, 이왕이면 광서성(廣西省)에도 차를 좀 넘겨주면 어때? 이거, 이거 판로가 영 없단 말이야. 응?"

조금 전까지 당군악을 죽일 듯 위협하던 장일소가 지금은 마치 수십 년 지기를 보는 것처럼 넉살 좋게 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당황스러울 만큼 급작한 변화지만 당군악은 침착한 얼굴로 대응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

"좋아!"

당군악의 어깨를 한번 강하게 두드린 장일소는 장포를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연회다! 손님이 오셨으니 술을 한잔해야지!"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그리 한가한 사람은 아닌지라."

"에이. 재미없이."

계단을 오른 장일소가 침상 옆의 궤를 열더니 차게 식혀진 술병을 들어 당군악에게 던졌다.

"그럼 돌아가는 길에 한잔하라고. 귀주 특산의 백주(白酒)니까. 귀하신 분 입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입에는 나쁘지 않아."

당군악은 그가 던진 술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은 고맙게 받겠소."

그리고 할 말을 모두 끝낸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장일소의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한 가지만 더."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화산에는 뭐가 있지?"

"……."

당군악은 고개만 슬쩍 돌려 장일소를 일별했다.

"친구."

"……."

짧은 대답을 끝으로 그는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대전을 빠져나갔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흐으음."

궤에서 목이 가는 술병을 꺼낸 장일소가 마개를 열고는 입에다 들이붓기 시작했다.

새어 나온 맑은 술 줄기가 입가로 졸졸 흘러내렸다.

호가명은 그런 방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방주님."

"흐응?"

"방주님의 의중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운남의 차 무역이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준다지만……."

"차?"

"예. 이건 만인방의 체면이……."

"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가명이가 둔해졌구나. 차 운운하는 걸 보니!"

"……예?"

장일소가 순간 웃음을 뚝 끊더니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차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그거야 그냥 구실이고!"

"……."

"가명아."

"예."

"당가가 무섭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저 야수궁의 야만인들이 두렵더냐?"

"제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이는 방주님뿐이십니다."

"그래. 나 역시 그렇지."

"하면 어찌……."

"지도!"

쥐고 있던 술병을 과격하게 내려놓은 장일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도! 지도를 펴라! 당장!"

그러자 호위들이 다급하게 달려와 대전 한쪽에 둘둘 말려 있던 지도를 대령하곤 쫘악 펼쳤다.

"붓."

"예."

호가명이 준비된 붓에 직접 먹을 묻혀 장일소에게 가져다 바쳤다.

"보자! 보자꾸나, 어디!"

장일소는 잔뜩 흥이 난 듯 지도 앞을 빠르게 서성거리다 지도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운남, 사천, 섬서라!"

곤명, 성도, 그리고 화산에 점을 찍은 장일소는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아! 하며 다시 붓을 움직였다.

"그래. 서안도 있었지, 서안."

서안에도 점을 찍은 장일소가 네 곳에 찍힌 점을 이어 선을 그어 냈다. 이내 그의 얼굴에 광기 어린 웃음이 번졌다.

"하하하핫. 미친놈들 같으니!"

"……방주?"

"가명아."

"예."

"봐라. 이 미친놈들이 아주 재밌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호가명의 눈에 들어온 건 중원의 서부를 가로지르는 선이었다.

"보렴. 이 서편으로는 기껏해야 곤륜이 있을 뿐이고, 같은 곳에는 점창과 아미, 종남이 있다. 하지만 곤륜은 항상 은인자중하는 곳이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곳은 아니야. 종남? 종남은 봉문 하여 서안의 영향력을 화산에 넘겨줬어.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점창은 운남에서 움직이지 않고, 아미는 이렇다 할 힘이 없지. 그렇다는 건……."

장일소의 말을 호가명이 대신했다.

"화산과 당가, 남만야수궁이 힘을 합친 게 사실이라면 중원의 서부는 완전히 그들의 영향 아래 들어갔군요."

"그렇지!"

장일소가 지도를 확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세력이라는 것은 명분과 힘이야! 그리고 돈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법이지! 차 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고 있고, 당가와 야수궁이라는 힘을 갖췄다. 게다가 화산도……. 하하. 그래! 화산도 힘은 있지. 우리가 피 흘려 가면서 증명해 줬잖아."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명분 하나라는 거지. 그 하나만 있으면 어찌될 것 같으냐?"

"……중원 서부의 지배자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쯧쯧쯧. 가명아, 가명아."

장일소가 나긋나긋하게 손을 휘저었다.

"너는 너무 가까운 곳만 보는구나? 더 먼 곳을 봐야지. 응?"

"죄송합니다."

"봐라, 가명아. 저곳의 중심이 되는 이들은 과거의 구파였던 곳, 그리고 오대세가의 실세, 마지막으로 새외오궁이다."

"……."

"사람들은 세상을 나눠 놓기를 좋아하지. 적당히 걸맞은 것들끼리 분류해서 불러 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그렇게 불리는 당사자들도 그 규격을 당연히 여긴다? 그게 지금 강호의 질서를 이루고 있잖아. 그렇지?"

"저 간악한 녹림 놈들과 대 만인방이 같은 신주오패로 불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지, 그렇지. 우리는 싫어하지만 세상은 그리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잖니. 그런데 이 미친놈들은 지금 수백 년간 강호를 규정하던 그 틀을 깨고 있다. 보렴. 구파와 오대세가, 그리고 새외오궁이 한곳으로 엮이고 있잖으냐?"

"……확실히……."

"기존의 강호를 규정하던 질서를 모조리 엎어 버리고 서로 동맹을 맺었다. 하하하하. 이건 완전히 새로운 거야! 굳이 말하자면……. 흐음, 그래! 서부맹이라 할 수 있지."

장일소가 혀를 내어 빠르게 입술을 핥았다.

"좋아. 이건 재미있어. 이 연합이 좀 더 명확해지면 강호는 지금까지의 강호와는 전혀 다른 곳이 될 거야. 새로운 바람이 불 수 있다는 말이지."

"……."

호가명은 마른침을 삼켰다. 장일소의 눈이 요사스런 광망을 토해 내고 있었다.

"대체 누가 그린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어. 그리고 아주 미친놈이 한 짓거리야. 피 냄새가 난다. 어쩌면 다음 전쟁은 동과 서로 나뉘어 벌어질지도 모르겠어."

"하나 그게 만인방에서 화산을 내버려 둘 이유가 되겠습니까?"

"이걸 누가 했겠느냐?"

"……."

장일소의 목소리에는 주체하지 못하는 흥이 어려 있었다.

"병신 같은 오랑캐 놈들이? 아니지, 아니지. 그럼 사천에 자리 잡고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는 그 사천당가 놈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지도를 쾅 내려놓은 장일소는 손바닥으로 화산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구겨 버리듯 움켜잡았다.

"이놈들이란 말이야, 이놈들! 서부맹의 구심점은 바로 화산이다. 화산이 무너지면 서부맹은 와해되는 거지."

"……그리되어선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재미있잖아?"

"……예?"

만면에 미소가 어린 장일소의 얼굴에선 섬뜩한 기운이 배어났다.

"피 냄새가 나는 곳에는 돈 냄새도 함께 난단다. 좋은 판이야. 아주 좋은 판이야."

호가명은 여전히 장일소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일소는 딱히 더 설명해 줄 생각 따윈 없는 듯 낄낄 웃어 대며 침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체면은 아무래도 좋아.'

체면이란 치세(治世)에나 필요한 것이다. 난세에는 누구도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난세에 중요한 것은 바로 힘이다.

'수레바퀴가 느리게 구른다면 조금 더 빨리 굴려 버리면 그만이지. 난세야말로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세상이니까.'

대전으로 밀려드는 바람에서 옅은 피 냄새를 맡은 장일소가 더없이 환하고 화사하게 웃었다.

"화산. 화산이라. 그래. 너희는 조금 더 남아 있어 줘야겠구나. 세상을 불태워야 할 불씨를 벌써 꺼 버릴 순 없지. 하하하핫!"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장일소가 이런 웃음을 지을 때마다 반드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호가명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놀아 보자꾸나. 즐겁게! 신나게! 하하하하하핫!"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듯 사치에만 빠져 있던 장일소의 눈이, 과거 패군이라는 별호를 얻었던 그 시절처럼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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