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아니! 알겠는데 못 참겠다고! (1)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다.
만인방이 섬서로 밀고 들어와 화산을 쳤다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천하에 퍼져 나갔다.
강호인이란 본디 이런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니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여느 때보다도 더 빨랐던 것은 상황을 파악한 개방이 기겁하여 온 사방에다 지원을 요청한 덕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채 다 퍼지기도 전에 새로운 소문이 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 화산이 만인방을 물리쳤다.
처음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헛소문이 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소식이 두 번 세 번 똑같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더는 딴죽을 거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
"세상에, 만인방을 쓰러뜨렸다고?"
"만인방 전체가 쳐들어온 건 아니잖은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만인방이라니까! 만인방! 무려 세 개의 대가 왔다고 하지 않은가? 그 만인방이 화산에서 적당히 물리칠 수 있을 이들만 선별해 보냈을 리는 없잖은가?"
"듣고 보니 그렇구만."
"허허. 여하튼 진짜 대단하군. 천하비무대회에서 명성을 날린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만인방이라니. 화산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날이 없구먼."
평범한 이들은 화산이 만인방을 물리쳤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했다.
신주오패로 불리며 강호를 질주하던 그 만인방이 이제 겨우 명성을 다시 날리기 시작한 화산에 패배했다. 호사가들에게 이보다 더 떠들기 좋은 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은 곳을 보는 이들은 다른 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무당(武當).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이가 천천히 붓을 그어 냈다.
붓이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화폭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난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화산이 본산으로 쳐들어온 만인방을 격퇴했다고 합니다."
난을 치던 이의 눈가가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가늘게 이어지던 선의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굵어졌다. 그 찰나의 어긋남으로 인해 난 전체가 그 생기를 잃어버렸다.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구나.'
무당의 장문. 허도진인이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허리를 쭉 폈다.
"……또 화산인가."
허도진인은 앞에 정좌한 허공진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허공."
"예, 장문인."
"화산의 이야기를 듣느라 귀에 딱지가 앉겠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무 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허도진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타인의 기쁨을 질투하는 건 도인의 자세가 아닐 테지만, 최근에는 내가 소인배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화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위장이 아플 지경이야."
허공진인 역시 그 말을 들으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강호를 통틀어 화산이 명성을 드높이는 걸 가장 싫어하는 곳은 당연히 종남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이들이니까.
문제는 종남 다음으로 화산의 약진을 바라지 않는 곳이 바로 무당이라는 점이었다.
섬서라는 지리적인 이해 때문에 서로 껄끄러운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두 문파와는 달리, 화산과 무당은 워낙 서로 닮아 있는 부분이 많아 양립하기가 애매한 관계였다.
같은 도가이기도 하고, 같은 검문이기도 하다. 천하제일 도문(道門)과 천하제일 검문(劍門)을 동시에 놓고 경쟁하는 관계라는 의미다.
얼마 전이었으면 화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허도진인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화산을 과거의 몰락한 문파로 여길 수 없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무엇을 물으시는지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
허공진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장문인의 의도를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저는 이 일은 단순히 화산의 일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화산에서 끝날 아니다?"
"다 아시면서 자꾸 그리 떠보지 마십시오."
허도진인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미안하구나. 못된 버릇이지."
허공진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만인방이 섬서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산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섬서 땅을 밟았다는 게지요."
"그렇지."
당금 중원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신주오패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다. 저 중원 밖의 새외오궁을 제외한다면 이들과 견줄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각각의 세력들은 서로 어지간해선 충돌하지 않았다. 마교와의 전쟁이 남긴 상흔이 워낙에 커서 제 문파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남의 영역을 함부로 넘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만인방이 그 불문율 아닌 불문율을 깨고 성(省)을 넘어 타 문파를 공격한 것이다.
"화산은 구파일방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허공진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두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장문인. 무당 역시 호북을 넘어 다른 성에 속가를 늘리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랬다가 화산과 충돌하고 검총에서 낭패를 보았다.
"다른 문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더는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흐음."
"이번 만인방의 움직임이 그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침음성을 흘리는 허도진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강호는 언제나 같은 역사를 반복해 왔다. 달이 차면 기울 듯, 문파의 힘이 강대해지면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그리하여 문파와 문파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이윽고 강호 전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그렇게 힘을 소진하면 한동안 소강상태를 이루다가 다시금 충돌하기를 반복한다.
이 법칙을 깬 것이 바로 마교와의 격전이었다.
마교는 그들이 비축한 힘을 모조리 털어 버릴 정도로 강대했고, 이를 막아 내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문파들은 감히 타문파와 충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백 년간의 평화가 지켜진 것이다.
'하나, 이제는 그 끗발도 다됐다는 거로군.'
허도진인의 얼굴에 일순간 근심이 스쳤다.
"상황은 더없이 좋지 않아."
이윽고 그의 입에서 웬만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본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파와 오가, 그리고 신주오패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누군가는 충돌을 일으키고 전쟁을 시작하겠지."
"그러합니다."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게지."
허도진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림의 방장이 낭패를 보고 있는 모양이더군."
"소림이 말입니까?"
"그래. 북해의 일을 해결할 실마리를 영 잡지 못하는 모양이다."
"……."
북해라는 말에 허공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북해.
마교의 종적이 발견된 곳.
"본래 마교의 일이라면 전 강호가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일이다. 문제는 현재 강호에는 각 문파들을 정리하고 명령을 내릴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지."
"본래 소림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러하다. 이번 일 역시 원래대로라면 그리되었겠지. 하지만 법정은 욕심을 너무 부렸어. 이번에 소림이 주최했던 비무대회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소림은 손가락 하나로 전 무림을 부리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도진인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화산이 그 모든 것을 망쳤지."
"……그렇지요."
이번 천하비무대회에서 소림은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차라리 비무대회 예선에서 소림이 모조리 떨어지는 게 나았을 정도로 말이다.
강호에선 실력도 중요하지만 체면도 중요한 법.
체면이 땅에 떨어진 소림이 아무리 협조를 구해 봐야 돌아오는 반응은 미적지근했을 것이다.
"각 문파들은 슬슬 날뛰기 시작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마교에 대한 일은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신흥세력마저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지. 허공. 너는 이런 시대를 뭐라 부르는지 아느냐?"
"……글쎄요."
"난세라 한다."
허도진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달은 차면 기우는 법이고, 평화가 지속되면 난세가 오는 법이지."
"……난세."
허공진인의 얼굴에도 긴장의 어두운 빛이 서렸다.
"난세에서 살아남는 법은 스스로를 단단히 지키는 것이다. 한동안 자중하며 외부의 정보를 수집해라. 분명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그리고……."
"예."
"화산에 대한 감시를 더 강화하라."
"……화산 말입니까?"
"그렇다."
허도진인의 말에 허공진인은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 외람되오나……."
"음?"
"화산이 그 기세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지녔고 만인방마저 격퇴한 곳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화산은……."
"난세에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무언 줄 아느냐?"
허도진인이 허공진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는 듯 말허리를 끊어 버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영웅이다."
허공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산은 만인방을 격퇴해 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느냐? 일대제자도 몇 없는 화산이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만으로 그 만인방의 무력대를 쓰러뜨렸다는 뜻이다."
"하나 그 정도는 무당도 얼마든지……."
"실전 경험 한번 해 보지 못한 아이들이 만인방을 격퇴했다. 그 경험은 그들의 무위를 한층 더 높여 주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마저 불어넣었겠지."
"……."
"화산을 얕보지 마라. 결코 만만찮은 문파다. 당대에는 무당이 그들에게 밀릴 리 없겠지만,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후대의 언젠가에는 화산의 이름이 무당 위에 울려 퍼질지도 모른다."
"……명심하겠습니다."
허공진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여전히 이해하기 못하겠단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겠지.'
단 한 번도 무당이 화산에게 뒤진 적이 없었다고 알아 온 저들이라면 지금 허도진인의 우려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알고 있었다.
한때, 화산의 이름 앞에 무당이 고개를 숙여야 했던 시대가 있었음을.
'다시는 그 치욕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무릎 위에 얹힌 허도진인의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화산에 대한 감시가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하면 어째서입니까?"
"만인방이 이대로 가만히 있겠느냐?"
"아……."
허공은 그제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인방주인 패군 장일소는 폭급하고 잔악한 성격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가 이런 개망신을 당하고도 꼬리를 뺄 리는 없었다.
"만인방은 지금 여러 상황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인간이란 때로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극단으로 치달을 때가 있지. 만약 장일소가 만인방을 모두 이끌고 섬서로 진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허도진인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조용했던 강호 한가운데에서 화약고가 터지는 꼴이 될 것이다."
* * *
"그래서……."
사내의 눈이 요사스레 빛났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전신을 두른 새하얀 장포가 살짝 부풀어 올랐다.
중성적으로까지 보이는 선이 가는 얼굴과 붉은 입술은 바라보는 이들을 더욱 공포에 질리도록 만들었다.
짤랑.
그의 열 손가락을 모두 치장하고 있는 반지가 맞부딪히며 맑고도 섬뜩한 소음을 자아냈다.
"모두 뒈졌다?"
"……모두는 아닙니다만."
"대부분 뒈졌다?"
"그렇습니다."
침상에 모로 누워 있던 장일소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그리고 한 다리를 침상에 걸친 채 턱을 괴었다.
"가명아."
"예."
만인방의 군사인 호가명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세 개의 대를 내줬다. 그리고 흑조단까지 내어 줬어. 과할 정도로 병력을 보냈던 건, 그 화산 놈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싶어서였거든. 그런데…… 한 놈도 남김없이 죽인 게 아니라, 한 놈도 남김없이 당했다 이 말이지?"
"……."
호가명은 차마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응?"
"……화산의 전력이 저희가 예상한 이상이었습니다."
"그래. 그건 당연하지. 너무 당연하지. 그 뻔하고 당연한 걸 몰라서 내가 지금 이리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더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조금의 노기도 느껴지지 않는 그 음성이 호가명을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일이야. 아주 재미있어. 세상 사람들이 만인방과 나를 비웃고 있겠구나. 그렇지? 그 작은 문파 하나 어쩌질 못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주제도 모르고 설치다가 발톱까지 잃었다고 말이야. 하하하핫. 재미있지 않니? 발톱 빠진 호랑이라니."
한참 흐르던 웃음이 별안간 뚝 멎었다. 장일소의 눈이 순간 섬뜩하리만치 푸르게 빛났다.
"방도들을 모두 모아. 화산으로 간다."
"바, 방주님! 지금은 움직일 수 없……!"
쾅!
호가명의 몸이 날아가 대전의 벽에 처박혔다. 입으로 울컥 피를 토한 그가 바닥으로 힘없이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선후를 몰라, 선후를. 응? 내 누누이 말했을 텐데?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먼 곳의 이익을 보아야 한다고."
"쿨럭."
호가명이 힘겹게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사(邪)를 표방하는 이들은 비웃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할지언정 그 손가락엔 두려움이 담겨 있게 해야 한단 말이지. 알겠니?"
"……명심하겠습니다."
"방도들을 모아. 내가 직접 화산으로 간다."
흰 장포 자락이 크게 휘날렸다. 장일소가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
"바, 방주님!"
누군가가 다급한 얼굴로 대전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대주 중 하나였다.
장일소의 얼굴에 순간 짜증이 스쳤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소, 손님! 손님이 왔습니다."
"으응?"
의외의 소식에 잠깐 짜증을 잊은 장일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이라니.
이곳에 찾아올 만한 이가 있었던가? 그것도 대주 중 하나가 저리 사색이 될 만한 이가?
장일소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누군가가 대전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섰다.
그 얼굴을 확인한 장일소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