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화산은 네가 지켜야 할 곳이 아니다. (1)
베어 낸 상처에 빗물이 파고들었다. 쓰라리다 못해 욱신거리는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청명의 신경은 오로지 흑시에게 쏠려 있었다.
까드드득.
흑시의 조가 연신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흑시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황소도 한 방울이면 절명하는 극독이다. 잘라 냈다고 한들, 그 정도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텐데……. 만독불침도 아닐 테고?"
청명의 얼굴에는 확연히 세 줄기의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의 조에 발린 독이 퍼질 시간은 이미 지났다.
하지만 중독의 증상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베인 뺨 주변이 거뭇하게 변한 정도.
평범한 이라면 이미 전신이 검게 물든 채 죽어야 했다.
물론 강대한 내력과 완벽한 기의 운용을 갖춘 절대고수에게는 독이 잘 먹히지 않는다. 독으로 그런 이들마저 완벽히 쓰러뜨릴 수 있었다면, 흑조단이 만인방의 일 개 대로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아직 어린 도사.
나이에 걸맞지 않은 강대한 내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무학을 배워 왔을 시간을 감안한다면 종사급의 운용마저 갖출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겪으면 겪을수록 알 수 없는 놈이군."
흑시가 손을 뻗어 조의 날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닿기만 했는데도 검은 붕대로 감싼 손가락 끝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찔린 부분이 살짝 아리는 것으로 보아 독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통하지 않는다라…….
"여하튼 좋아. 독이 잘 먹히지 않는다면 배에 구멍을 뚫고 직접 쑤셔 박아 주면 되니까."
흑시가 이죽거리자 청명이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실제로 상처를 통해 들어온 독기는 점차 퍼져 나가고 있었다. 독기를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제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싸우는 중에 따로 삼매진화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전투의 시작부터 호시탐탐 청명을 노렸던 흑시라면 그 틈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그가 매화검존일 때의 무위라면 애초에 독이 침범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설령 침범한다고 해도 간단히 배출해 버렸겠지만, 지금의 청명은 과거의 그와는 비할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다시 태어난 이후 스스로도 놀랄 만한 속도로 강해졌다. 이전의 삶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성장세다.
하지만 매화검존이 누구던가?
화산의 검학을 완성하고 스스로의 검을 정립하던, 종사의 반열에 이른 검수였다. 세상을 뒤흔들고 무참히 짓밟던 천마가 유일하게 인정했던 검수가 바로 매화검존이었다.
그 고고하고도 드높은 경지를 다시 되찾는 건 청명으로서도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잘라 낸 상처에 남은 잔독과 얼굴을 통해 들어온 독이 슬슬 번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으로써는 독기가 번지지 않게 억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나.
'아무래도 좋아.'
저놈만 쓰러뜨리면 이 독기를 태워 내는 일 정도는 별것도 아니니까.
청명은 천천히 흑시를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그극.
늘어뜨린 검이 바닥을 긁어 댔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몸이 조금씩 빨라진다 싶더니, 이내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흑시를 향해 쏘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흑시의 지척까지 달려든 그는 단번에 머리를 향해 강렬한 일 검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교차된 두 개의 조가 청명의 매화검을 막아 냈다.
검(劍)과 조(爪)가 서로 충돌하며, 쏟아지던 빗줄기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여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가가가각!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
노기가 타오르는 청명의 눈빛과 살기로 번들대는 흑시의 눈빛이 허공에서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흐핫!"
괴이한 고함과 함께 조가 청명의 매화검을 부러뜨릴 듯 조여 왔다. 검을 잡고 늘어지는 그 모습은 흡사 괴조의 발톱이 먹이를 낚아채는 듯 보였다.
기이이이잉.
조와 조 사이에 끼인 매화검이 비명을 질렀다. 흑시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놓치지 않……."
퍼억!
하지만 그때 청명의 발이 흑시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일순간 등이 굽어지며 몸이 둥글게 말렸다.
하지만 청명의 검을 조여 오는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가가가가각!
조가 매화검의 검신을 타고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검병을 슬쩍 흘려 낸 조의 날이 청명의 팔뚝을 노리고 들었다.
탓!
청명의 발끝이 바닥을 박찼다. 일단은 다시 거리를 벌리겠다는 의미.
하지만 흑시 역시 바닥을 박차며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상대적으로 단병(短兵)을 사용하는 이상 거리가 가까울수록 유리하다.
카각!
그런데 그때 조 끝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이내 독수리 발톱처럼 굽은 날이 쭈욱 늘어나듯 튀어나왔다.
콰득!
날 아래 이중으로 장치된 작은 날이 청명의 팔뚝을 파고 들어가며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청명도 이 상황만은 예측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나 그대로 당하고 있을 청명이 아니었다.
쿵!
검을 휘두르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
하지만 청명의 무학은 단순히 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흑시의 얼굴에 청명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우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붕대로 감싼 흑시의 얼굴이 움푹 파였다. 고개가 부러질 듯 뒤로 젖혀졌다.
빗물에 젖은 검은 붕대에 붉은 피가 점점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고개를 젖힌 채로 청명의 팔에 박은 조를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우드드득.
조의 날이 끝내 청명의 팔을 뚫고 반대로 튀어나왔다.
"크흐."
젖혀진 흑시의 입에서 기이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내력이 가득 실린 청명의 주먹이 흑시의 턱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지며 흑시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조 날이 단번에 뽑혀 나갔다.
"……."
욱신!
청명이 굳은 얼굴로 구멍이 뚫린 팔을 바라보았다.
다섯 개의 구멍에서 시커먼 독혈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독기가 퍼져 나가며 팔 전체에 저릿한 통증이 번졌다.
내력을 밀어 넣어 독기가 퍼지는 걸 막은 그는 손끝에 힘을 줘 보았다. 다행히도 검을 잡은 손의 감각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그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예전이었다면 상대가 어떤 기형 병기를 들고 온다고 해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공격에 당한 이유가 그가 과거에 비해 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화에 젖어 안일해졌기 때문인지 바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최대한 지혈은 했지만 그럼에도 피를 제법 흘린 모양이었다. 시야가 미묘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때 바닥에 쓰러졌던 흑시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흐으."
그리고 자신의 얼굴 부위를 더듬었다. 기괴하게 목을 꺾으며 유령처럼 몸을 일으킨 그의 입가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크륵!"
그는 손을 뻗어 입가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잡아 뜯었다. 잘려 나간 혀 조각과 이가 턱을 타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미리 힘을 빼 놓지 않았더라면 내 목이 잘렸겠군."
혀끝이 잘려나가 발음이 뭉개졌지만, 그 기분 나쁜 눈만은 처음과 다름없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파앗!
발로 땅을 박차며 쏜살같이 돌진했다.
검이 허공에서 가볍게 떨렸고, 이내 붉은 매화를 줄기줄기 뿜어내기 시작했다.
매영조하(梅影造河).
이름 그대로 매화가 점점 그 수를 더하더니, 이내 호우에 불어난 강으로 화했다. 터진 둑을 타 넘은 매화의 급류가 모든 곳을 뒤덮으며 거칠게 밀려들어 갔다.
흑시의 눈이 경악과 놀라움으로 커졌다.
'이게 검으로 만들 수 있는 광경인가?'
수많은 고수를 상대했고, 수많은 검수를 보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흑시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굵은 빗줄기 아래, 매화의 강이 그를 향해 넘쳐흐른다.
아름답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장엄함 속에는 지독하리만큼 적나라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저 매화의 강은 빠져드는 모든 것을 조각 내고 분쇄할 것이 분명했다.
무릎이 접혔다. 조를 땅에 콱 박아 넣은 흑시는 거의 무릎이 바닥에 닿을 지경까지 자세를 낮춘다. 그리고 핏발이 선 눈으로 밀려오는 매화의 강을 주시했다.
"훕!"
짧은 호흡과 함께 흑시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저 매화의 강은 점점 더 불어날 것이었다. 어설프게 피하려 들었다가는 세상을 휩쓰는 저 매화의 강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휘말릴 것이다.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말이다.
활로는 오로지 전방!
몸을 최대한 낮추고 조를 들어 올린 그는 조에 미친 듯이 내력을 불어넣었다. 깡마른 그의 몸이 회전하자 조가 과격한 조영(爪影)을 그려 냈다.
상처 입은 짐승이 발톱을 휘두르듯, 불규칙하고도 과격한 경기가 밀려오는 매화를 후려쳐 날려 대기 시작했다.
뒤이어 검은 그림자가 매화의 강으로 파고들었다. 조에서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경기로 자신의 전면을 메워 버린 흑시는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매화의 강은 급격하고도 도도했다.
밀려온다.
파헤치고, 밀어 내고, 또 후려 갈려도 매화는 끝없이 빈자리를 채우며 밀려오고 또다시 밀려왔다.
인간이 아무리 악을 써도 강을 밀어 낼 수는 없는 것처럼, 흑시의 조는 매화의 강을 뒤틀 수 없었다.
하나.
"카아아악!"
독기 오른 작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흑시의 목에서 울려 퍼졌다.
이윽고 그는 조로 땅을 힘껏 내리치며 몸을 사선으로 띄워 올렸다. 매화의 강을 뛰어넘은 검은 형체가 청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물론 그 선택에는 큰 대가가 따랐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매화의 강에 휩쓸린 흑시의 다리가 순식간에 수십 개 상흔을 입고 피를 뿜어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각조각 찢겨 나갔다.
일시에 다리가 수백 번 베이는 고통.
감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절대 참아 낼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흑시의 입이 벌어졌다. 쩍 벌어진 시커먼 공동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처절하게 토해졌다.
하지만 흑시의 몸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뛰어오른 속도 그대로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살기로 번들거리던 흑시의 눈이 새파란 광망을 토했다.
이 한 수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듯 가공할 내력이 끌어 올려졌다. 과한 압력을 이기지 못한 코에서 둑이 터진 듯 피가 쏟아졌고, 실핏줄이 모조리 터진 눈에선 피눈물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흐아아아아아압!"
양손에 든 조에서 세 척이 넘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리를 잃고 거대한 경기의 발톱을 드러낸 흑시의 모습은 흡사 사냥감을 노리고 활강하는 괴조처럼 보였다.
흑시가 그대로 청명을 덮쳐 들어갔다.
흐드러지게 매화를 피우던 청명의 눈이 일순 차게 가라앉았다.
"죽어라아아아앗!"
좌우로 활짝 펴진 열 개의 발톱이 청명을 조이기 시작했다.
하단세를 취한 청명이 가볍게 뛰어 뒤쪽으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
퍼엉!
작은 폭음과 함께 흑시의 등 쪽 붕대가 터져 나가더니 뒤에서 네 개의 조가 발출되었다.
발출되자마자 네 개의 조가 크게 호선을 그리며 물러서는 청명의 퇴로를 차단했고, 곧장 등을 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청명의 눈에는 여전히 한 점 동요도 없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그는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적이 노리는 지점을 조금 비틀어 낸 뒤, 날아드는 흑시의 육체에 순식간에 십여 차례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콰득! 콰득!
그럼에도 흑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상체에 순식간에 십여 개의 구멍이 뚫렸지만, 흑시는 오히려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사람의 몸통보다 더 긴 기운을 뿜어내는 조를 좌우로 끌어당겨 청명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큭!"
그대로라면 몸이 조각 날 상황.
청명은 흑시의 품 안으로 돌진하여 파고들었다.
푸욱!
매화검이 흑시의 복부를 찌르고 들어갔다. 조가 길어진 만큼 단병의 이점은 사라졌다. 안으로 파고들 수만 있다면 휘두르는 기운을 피해 낼 수 있다.
하나 그 순간.
덥석.
흑시가 앙상한 팔로 청명을 끌어안았다.
콰득! 콰득! 콰득! 콰득!
이윽고 청명의 등 뒤에서 날아든 네 개의 조가 청명이 아닌 흑시의 팔을 꿰뚫었다. 마치 자물쇠를 조이는 듯이.
청명이 부릅뜬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흑시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고루공(骷髏功)?'
청명을 끌어안은 흑시의 팔이 더없이 단단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내력을 끌어 올리며 밀어 내려 했지만 마치 만년한철로 만든 사슬에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큭!"
청명이 매화검을 더욱 거세게 찔러 넣었다. 흑시의 배가 길게 갈라지며 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어진 팔은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안 되지, 크큭."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면서도 흑시는 희열에 찬 사람처럼 웃어 젖혔다. 그리고 외쳤다.
"지금이다! 죽여!"
파아아아아아앗!
바닥이 터지는 듯 한차례 솟구치더니 검은 인영 하나가 청명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지막 한 사람의 흑조단원이 흑시의 명을 받고 청명의 등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진 것이다.
쇄애애애애액!
시커먼 검신에 새파란 검기가 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청명의 눈에 정확하게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얇은 세검이 똑똑히 보였다.
"죽어라!"
청명의 눈이 순간적으로 새파란 광망을 토했다.
생각은 짧았고, 결정은 순간적이었다.
콰드득!
그는 고개를 내려 자신을 끌어안은 흑시의 목을 주저 없이 물어뜯었다. 목 부분의 살점이 한 움큼 뜯겨 나가며 잘려 나간 경동맥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끄륵."
몸을 으스러뜨릴 듯 조여 오던 힘이 마침내 살짝 약해진 틈을 타, 청명은 흑시의 가슴에 어깨를 박아 넣었다.
쿠웅!
그의 가슴뼈가 움푹 함몰되며 검을 휘두를 공간이 만들어졌다.
촤아아아아악!
빛살처럼 검을 뽑아낸 청명이 흑시의 팔을 끊어 냈다.
그리고 흑시의 몸을 쳐 날린 그는 몸을 빙글 돌려 자신에게 날아드는 흑조단원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급변한 상황에 흑조단원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 안…….'
촤아아아아악!
더없이 간결하게 휘둘러진 검이 날아드는 이를 절반으로 갈라 버렸다.
털썩.
반으로 쪼개진 시체가 힘을 잃고 추락했다.
"……후욱."
거친 숨을 토해 낸 청명은 꿰뚫린 팔을 움켜잡고 바닥에 쓰러진 흑시를 향해 다가갔다.
저벅.
팔다리가 모두 잘려 나간 흑시의 코앞에 선 청명이 검을 들어 정확히 목을 겨누었다.
"……너는 화산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흑시의 두 눈에서 빠르게 빛이 꺼져 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 드러난 감정은 공포도, 경악도 아닌 의문이었다.
"……어째서?"
말을 하는 중에도 입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어째서 매복이 오지 않……."
바로 그때였다.
툭!
어디선가 날아든 세 개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흑시가 덜덜 떨리는 고개를 돌려 구르는 목들을 바라보았다.
"……찾는 사람."
여인의 목소리였다.
어둠이 내린 숲에서 무복을 피로 흠뻑 물들인 유이설이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사고? 사고가 왜……."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턱짓으로 흑시를 가리켰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흑시를 돌아보았다. 독기 어린 그의 눈이 청명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푸욱.
청명의 검이 흑시의 목을 꿰뚫었다.
앙상한 몸이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그대로 축 늘어졌다. 부릅뜬 그의 두 눈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문과 절망이 가득했다.
청명은 검을 뽑아 회수한 뒤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왜 또 굳이 왔어."
"사고니까."
쏟아지는 빗속, 유이설은 가만히 청명을 보며 말했다.
"사고는 사질을 지키는 거야."
"……."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는? 독이 있었을 텐데?"
"이들과는 달랐어."
"……그래."
흑조단뿐 아니라 다른 매복 인원까지 준비한 모양이었다.
청명이 흑조단원을 모조리 시야에 넣었을 가능성까지 생각해 다른 이들을 미리 준비한 거라면, 이놈은 정말 끔찍한 놈이 아닌가.
흑시를 상대하는 중에 그 매복까지 왔다면 상황은 훨씬 어려워졌을 것이다.
청명이 차게 식어 가는 흑시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자. 화산을 정리해야지."
"그래."
청명과 유이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