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것이다. (4)
청명이 나뭇가지를 박차고 뛰어오르자 나뭇잎 뒤흔들리는 소리가 파스스 울렸다.
어둠으로 물든 화산에 섬뜩하다 못해 저릿한 살기가 퍼지고 있었다. 청명은 피부를 아릿하게 만드는 그 기운에 되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파아아앗!
그 순간 아래에서 두 개의 검이 불쑥 튀어나와 청명의 배와 목을 향해 쏘아졌다.
가늘디가는 세검(細劍).
벤다는 목적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상대를 찔러 죽이기 위한 기형검(奇形劍)이다.
달빛을 받은 세검 끝은 불길할 만큼 검게 빛났다. 극독이었다.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두 개의 독검(毒劍).
하지만 청명의 검 끝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카아앙!
날아드는 검을 후려쳐 날려 버린 청명의 검이 일순 십여 개로 갈라지며 아래를 내리 찔렀다.
푸욱!
손끝에 걸리는 확연한 감각.
검이 살을 뚫고 뼈를 끊어 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만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래쪽에서는 작은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철저히 훈련받은 이들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탓!
나뭇가지를 밟고 다시금 몸을 띄워 올린 청명은 이내 비조처럼 낙하했다.
그가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나무 위에 은신하고 있던 두 명의 흑조단원이 사냥감을 향해 뛰어오르는 늑대처럼 청명을 향해 돌진해 왔다.
쇄애애애액!
길게 뻗은 검.
방어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공격만을 위한 검세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상처 하나는 내고 죽겠다는 악랄한 독심이 담긴 검.
단 하나의 상처면 상대를 중독시킬 수 있다.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이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는 이라면 악랄한 수에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 갈 것이다.
하나.
파아아아앗!
청명의 검이 허공을 빛살처럼 갈랐다.
상대의 검이 도달하기도 전에, 청명의 검기가 상대를 먼저 꿰뚫었다.
카드드득!
검기에 닿은 세검이 반듯하게 갈라졌다. 그러고도 기세를 잃지 않은 청명의 검기는 이내 상대의 육체마저 두 동강을 냈다.
반으로 갈라진 몸뚱이가 좌우로 튕겨 나가며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동료의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보았음에도 그 옆에서 공격해 오는 이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청명은 자신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오는 검을 차갑게 응시하다 옆으로 한 발을 뻗으며 몸을 빙글 돌렸다.
스읏.
옷자락이 살짝 갈라졌지만, 청명의 육체까지 스치진 않았다.
그리고.
서걱.
청명이 무심하게 휘두른 검이 흑조단원의 목을 베어 냈다.
털썩.
목의 절반가량이 잘린 그는 바닥에 그대로 처박혀 한차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후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흑조단원이 쥐고 있던 독검이 땅에 떨어지자 주변의 풀들이 순식간에 말라붙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독한 독이 발려 있으면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걸까?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청명은 코끝으로 스며드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더럽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피비린내와 살을 엘 듯 쏘아져 오는 살기. 빠르게 식어 가는 시체에서 느껴지는 한기.
마치 지난 삶의 어느 한 부분으로 돌아오기라도 한 듯 기시감이 청명의 온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쿠르르릉.
꾸역꾸역 먹구름이 몰려든다 싶었는데 끝내 하늘에서 천둥과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비가 쏟아졌다.
그 비를 오롯이 맞으며 청명은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상황은 저들에게 유리하다.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빈틈을 노리는 이들은 이 천둥소리와 빗속에서 그 기척을 한층 더 완벽히 감출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저들이 가장 원하는 전장.
그 전장에 뛰어드는 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빼는 저들을 뒤쫓았다.
그가 사냥터에 직접 몸을 던진다면, 누구도 그를 두고 화산의 제자들을 노리지 못할 테니까.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삽시간에 몸을 식힐 만큼 차가운 비를 맞으며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 온다면 내가 가지."
그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빛살처럼 쏘아져 간 청명은 어둠 속에서 붉디붉은 매화를 피워 냈다. 더없이 선명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그렇기에 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선 너무도 이질적인 그런 매화를.
어둠 속에 은신하고 있던 이들의 몸에 매화가 내려앉는다.
서걱.
여리게 피어난 것 같은 매화는 그 소담스러움에 걸맞지 않게, 닿은 모든 것을 날카롭게 저며 냈다.
"……끅."
미처 참아내지 못한 희미한 비명과 함께 또 하나의 육체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그 순간.
촤아아아아아!
쏟아지던 빗줄기를 가르며 십여 개의 검은 그림자가 청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쏟아지는 비보다 더 차가운 안광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쿵!
이윽고 진각을 내리밟은 청명의 검이 독을 품은 독사처럼 영활하게 허공을 누볐다. 그 요사스러운 검 끝에서 태어난 아름답고 화려한 매화가 날아드는 이들을 또다시 뒤덮었다.
그 검 끝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카가가가각!
혼신의 힘을 다해 내질러진 독검은 구름처럼 피어나는 매화의 숲을 뚫지 못했다. 매화에 부딪힌 검들이 사방으로 튕겼다.
그때.
파아아앗.
청명의 발아래에서 시커먼 독검이 솟아올랐다. 청명은 반사적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독검에 꿰뚫리는 것은 피했지만, 검세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매화의 형상이 흩어지자 흑조단원들이 좀 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돌진했다.
청명이 이를 악물고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검을 사방으로 뿌려 내기 시작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중 낙매분분(落梅紛紛) 초식이 허공에 수많은 매화의 형상을 그려 내었다. 폭우를 맞은 매화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지듯, 비와 함께 숱한 매화가 쏟아져 내렸다.
"흡!"
순간적으로 피어난 매화에 달려들던 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 물러나기는 늦은 상황이었다.
흑조단원들은 제 안위를 돌보지 않고 그 매화우(梅花雨) 속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서걱! 서걱!
몸 곳곳에 매화검기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살이 갈라지고, 뼈가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독기를 잃지 않고 오로지 청명을 향해 검을 찔렀다.
단순한 일수.
화려한 변초도, 상대를 속이기 위한 운용도 없는 직선 일변도의 그저 빠를 뿐인 공격.
하지만 그런 검이 십여 개가 모이는 순간 세상 무엇보다 무서운 살검이 되어 버린다.
죽음을 불사한 공격이 청명의 육체로 쏟아졌다. 몇 개의 검은 기세를 잃고 그저 찔러 댈 뿐이지만, 그중 몇은 매섭고 날카롭게 청명을 노리고 들었다.
탓!
땅에 내려선 청명은 그 광경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되레 바닥을 박차며 쏘아지는 검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콰앙!
얇고 날카로운 검이 청명의 매화검과 부딪히며 산산조각 부서졌다. 검의 파편들이 가공할 속도로 비산하며 날아드는 흑조단원의 육체를 잔혹하게 파고들었다.
파아아앗!
상대들이 살짝 주춤한 틈을 타 청명의 검이 선두에서 날아오던 흑조단원의 목을 쳐 날렸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청명이 진각을 내리 밟으며 사방으로 검을 떨쳤다.
피어나는 매화.
뿜어지는 핏줄기.
순간적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숲이 붉은 피와 붉은 매화로 물들었다.
잘린 팔다리가 튕겨져 나가고, 갈라진 육체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땅에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지만 청명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서걱.
때마침 날아든 독검이 청명의 어깨를 얇게 베어 낸 것이다.
"돼, 됐……."
파아아앗!
하지만 청명의 어깨에 검을 찌른 이의 머리는 이내 걷어찬 공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과격하게 적의 목을 쳐 날린 청명은 역수로 검을 돌려 잡았다. 그리고 독검이 스친 자신의 어깨에 검을 스스로 쑤셔 박았다.
서걱.
살이 베이는 섬뜩한 소음과 함께 검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날카로운 날이 살을 잘라내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기괴하게 퍼졌다. 자신의 어깨를 베어 내는 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한 움큼 살덩어리를 잘라 낸 그는 어깨를 지혈한 뒤 검을 다시 돌려 잡았다.
쾅!
그때 기다렸다는 듯 폭음이 터지며 땅거죽이 뒤집히더니, 또다시 다섯의 흑조단원이 땅에서 솟구쳐 청명을 향해 검을 찔렀다.
파아아앗!
날아드는 이들의 목을 일시에 쳐 날려 버린 청명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기 무섭게 또다시 자신의 옆구리에 검을 가져다 댔다.
서걱.
절제된 동작과 함께, 옆구리에서 한 움큼의 살덩어리가 잘려 나와 땅에 떨어졌다.
이번에도 무심한 얼굴로 지혈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한곳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어둠이 내린 숲을 꿰뚫고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던 흑시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흐……."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웃음소리가 청명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
흑시는 뱀 같은 눈으로 청명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묘하군.'
몸이 싸늘히 식는 느낌이었다.
'저런 놈은 본 적이 없어.'
유례없이 흑시가 당황한 까닭은, 저 어린놈이 이런 전투에 너무도 익숙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살인이라고는 단 한 번도 저질러 보지 못했을 것 같은 어린놈이 사람의 목을 베어 목숨을 끊어 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단번에 십여 명을 죽이고도 조금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독이 파고든 부분을 미련 없이 잘라 내는 저 과감함.
지금껏 수많은 적을 상대해 온 흑시지만, 저런 이는 단 한 번도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스물이 목숨을 잃었다.
흑조단 총원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목숨을 잃을 동안 해낸 것이라고는 놈의 몸에 고작 생채기 두 개를 만든 것뿐이었다.
물론 평소라면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작은 생채기일 뿐이니 상대는 방심했을 테고, 그곳으로부터 퍼져 나간 독은 상대를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갔을 테니까.
하지만 저놈에게는 그 어떤 방심도,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까드드드득.
흑시의 손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은 분명 강하다.
하지만…….
'강한 자의 비명 소리만큼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도 없지.'
나약한 것들을 잡아 죽이는 것은 벌레를 짓눌러 죽이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고 시시한 일이다. 그러니 딱히 이렇다 할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강자의 피는 특별하다.
우득.
자신의 혀를 지그시 깨문 흑시는 입 안을 채우는 피 맛을 느끼며 정말로 즐거운 듯 나직이 웃었다.
칭칭 감긴 검은 붕대 사이로 드러난 흑시의 두 눈이 소름끼치는 빛을 발했다.
청명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고 있음에도 무복의 어깨와 옆구리 쪽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은 섬뜩하리만치 선명했다.
하나.
피에 물든 몸으로 검을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그 모습은 흑시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공포. 그래, 이건 공포였다.
'내가 공포를 느낀다라…….'
카가가각.
흑시의 소매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긴 발톱 형상의 조(爪)가 서로 맞부딪치며 거슬리는 금속음이 일었다.
'반드시 죽여야지.'
저놈을 여기서 죽이지 못한다면 언젠가 만인방은 저놈의 손에 무너질 것이다. 놈의 나이와 성장세를 감안한다면 훗날에는 만인방주조차 저놈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반드시 여기서 죽여 없애야 한다.
"……칠형(七形)."
그의 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숲 곳곳이 미묘한 들썩임을 일으켰다.
칠형.
목숨을 도외시하고 어떤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상대를 죽이라는 명.
흑조단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지시된 적 없는 명이 지금 이 자리에서 떨어진 것이다.
저벅.
하지만 자신을 향한 그 적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청명은 검으로 바닥을 긁으며 무심한 눈으로 흑시를 향해 다가왔다.
"자, 말해 봐."
태연해 보이는 그의 입에서 비보다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죽여 줄까?"
번뜩이는 눈으로 그런 그를 보던 흑시가 흑조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죽여."
끽끽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신호로 숲이 뒤흔들리며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가 청명을 향해 쇄도했다.
청명이 피에 젖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도 좋지."
비가 내려 다행이다.
이 더러운 피가 비에 씻겨 내려갈 테니까.
조금은 처연하고 서글픈 매화가 청명의 검 끝에서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