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것이다. (2)
'빌어먹을, 화정검인가?'
그 적사도를 쓰러뜨린 이.
아마도 이제야 화산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야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물론 저런 애송이 몇이 합류했다고 전세가 역전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게 끝이 아니겠지.'
화정검이 지금 도착했다는 건, 서안에 있던 화산의 문도들이 지금 모두 돌아오고 있다는 의미다. 그 수가 그리 적진 않다고 들었다.
그들이 모두 도착한다면 지금보다 전세가 불리해질 것은 자명한 일.
"하아앗!"
마음이 조급해진 야도가 다짜고짜 현종을 향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를 줄여야 해!'
이긴다는 것은 단순히 마지막에 더 많은 수가 서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들을 쓰러뜨리며 많은 피해를 입는다면 그건 더 많이 살아남는 것에 불과할 뿐, 진정 '승리'라 칭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저들의 결속은 야도가 생각하는 문파의 결속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그건 더없는 힘이 되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장문인쯤 되는 이가 죽어 나간다면 그 충격도 클 터!'
가공할 기를 품은 도가 현종을 향해 내리쳐졌다.
콰아아앙!
현종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가까스로 그 기습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도에 실린 힘을 채 다 감당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어 뒤로 나뒹굴었다.
"죽어라! 늙은이!"
한순간 무방비해진 현종의 목을 향해 도가 자비 없이 날아들었다.
하나.
카아아아앙!
그 도는 어느새 끼어든 검의 의해 가로막혔다.
"……주둥아리 조심하는 게 좋아."
다른 곳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달려와 현종의 앞을 막아선 백천이 싸늘한 얼굴로 일갈했다.
"그 주둥아리를 찢어 놓기 전에 말이야."
"……이 애송이가?"
백천은 대답 없이 도와 맞닿은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투웅!
"큭!"
검에서 뿜어져 나온 내력에 튕겨난 야도는 곧바로 자세를 낮추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놈.'
만만치 않다.
적어도 내력은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니다. 손목으로 파고든 내력 때문에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적사도 놈을 쓰러뜨렸다고 하더니.'
단순히 요행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경계를 높이는 야도와는 다르게 백천은 우선 현종을 부축해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백천아……."
현종의 전신에 난 상처를 보며 백천은 다시금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출혈로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처였다. 조금 더 늦었을 때를 상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뱃속에서부터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너무 위험하다. 내가……."
"장문인, 보중하십시오. 혹여 장문인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됩니다."
"……."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상처를 수습하시고, 제자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백천은 곧장 현종의 앞으로 나섰다.
현종은 그런 그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현종이 느끼고 있는 격정은 단순히 백천의 육체적 강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끌어 주어야 할 아이로만 여겼던 백천이 어느새 당당한 한 사람의 검수가 되어 그를 지탱해 주고 있단 걸 실감해서였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벅찰 만큼 차올랐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야도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감히 네가 나를 상대하겠다고?"
명백한 비아냥거림에 백천은 뽑아 든 검을 겨누며 차게 말했다.
"못 할 이유라도 있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아니지."
"……뭐?"
백천이 피식 웃었다.
"나는 호랑이 새끼고, 너는 그냥 개에 불과하지. 덩치가 조금 더 크고 강할지는 모르나, 그래 봤자 너는 개야."
야도가 살짝 멍해져선 백천을 보았다.
시구(時句)나 읊으면 딱 자연스러울 듯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독설을 저렇게 물 흐르듯 줄줄 쏟아 내다니.
"화산에는 제정신 박힌 놈이 없는 건가?"
"평소에는 제정신이지. 나를 돌게 만든 건 네놈이고."
백천이 이를 갈아붙였다.
"감히 장문인의 몸에 칼을 댔으니 곱게 죽을 생각은 꿈에서도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개자식아!"
"그……."
야도가 무언가 대거리하려는 순간, 백천이 문답무용으로 짓쳐 달려들었다.
노한 얼굴과 폭급한 기세.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검이 그려 내는 검세는 더없이 날카롭고 정확했다.
'빌어먹을!'
목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는 백천의 검을 쳐 낸 야도의 몸이 차게 식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을지 모르겠군.'
야도는 이를 악문 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백천의 검을 맞받아쳤다.
"아미타불."
"……."
독혈수가 현상의 앞을 막아선 혜연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소림인가?"
"혜연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소림이 화산을 돕는 거지?"
"이상한 말씀이십니다."
혜연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를 돕는 데 어째서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마음이 행하는 대로 따르는 것. 더구나……."
차분하고 순해 보이던 혜연의 눈이 점차 냉정히 가라앉았다.
"전신에서 피 냄새를 이리 짙게 풍기는 이를 막는 데는 더더욱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법이지요."
"고리타분하군."
독혈수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혜연이라.'
그 소림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 냈다는 이의 이름이 혜연이라 했다. 천하비무대회의 우승자이자, 언젠가 소림의 장문인이 될 이.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소림에서 피눈물을 흘리겠군."
"아미타불.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혜연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손끝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침착해라.'
아무리 혜연이라 해도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부터 살을 엘 듯 밀려오는 살기와 피 냄새가 그의 평정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아미타불."
누군가의 등을 잠깐 두 눈에 담은 그는 이내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부드러워진 얼굴로 독혈수를 바라보았다.
"너무 멀구려."
"……뭔 소리냐?"
혜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동안 부동심을 얻기 위해 수련해 왔거늘. 나는 이 작은 일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구나.'
반면 그가 좇으려는 이는 이 상황에서도 얼음 같은 부동심을 유지하고 있다.
뇌리에 확연히 새긴 청명의 등을 다시금 떠올린 혜연은 가만히 자세를 잡았다.
'화산에 오길 잘했다.'
그가 찾으려던 것은 확실히 이곳에 있다.
이제는 그저…….
"얼마나 따라갈 수 있는지 스스로를 확인해 볼 뿐!"
"뭐라 지껄이는 거냐!"
"오시오."
쿵!
강렬하게 진각을 내려밟은 혜연의 두 주먹에서 황금빛의 경기가 솟구쳤다.
"내, 내려놓거라, 이 녀석아!"
"가만히."
"나는 아직……!"
"가만히. 제발."
현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의 몸에 파고든 독은 이미 그의 육체를 심장께까지 검게 물들였다.
"이설아!"
"흥분하지 마세요. 독 퍼져요."
현상을 제압하듯 둘러업은 유이설이 전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현종이 훨씬 더 심하지만, 정말 위험한 건 오히려 현상이었다.
다른 이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으나 유이설만은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다급히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유이설이 마침내 당소소의 앞에 내려섰다.
"사고!"
당소소가 흠뻑 젖은 눈으로 유이설을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유이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끊어 말했다.
"소소."
"예, 사고!"
"해독."
당소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당소소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그녀는 당가의 여식. 독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천하에 비할 곳이 없는 가문의 자손이다.
독에 정통한 가문이라면 해독 역시 정통하기 마련.
여자란 이유로 독은 전수받지 못했지만, 해독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쪽으로 눕혀 주세요!"
당소소의 말을 들은 유이설이 현상을 바닥에 눕혔다.
뭔가 말을 하려 입을 뗀 현상의 어깨를 유이설이 가만히 잡았다.
"장로님."
"……이설아."
"믿으세요."
"……."
결국 현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유이설이 그의 어깨를 놓고 몸을 일으켰다.
현상은 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운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검아."
입술을 꽉 깨문 현상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소소야. 운검이는……."
"안 죽어요."
"……."
"돌아가실 리 없어요. 사형이 그랬거든요. 절대 안 죽는다고!"
그 말에 현상의 눈가가 확 붉어졌다.
죽을 리가 없다는 말은, 결국 달리 말해 죽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손을 뻗어 저 녀석의 몸뚱이라도 쥐어 보고, 또 도닥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중독이 된 몸으로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운검아……. 이 미련한 녀석아.'
알 수가 없었다.
미련스레 제자들의 앞에 버티고 서서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부상을 입었다.
스승으로서 그런 제자의 행동을 칭찬해야 하는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가?
끝내 현상의 눈가에 참았던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잘했다. 잘했어……. 참 잘했다, 이 멍청한 놈아."
조금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었을 것을…….
핏기 없이 누워 있는 운검을 보던 현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보거라, 운검아."
네가 키우고, 네가 지킨 제자들이 지금 화산을 지켜 내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콰아아앙!
강맹하게 도를 쳐 날려 버린 검이 일순 흐느적대듯 부드러워지더니 이내 화려한 매화검기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비,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되어 처먹은 놈들이냐!"
날아드는 매화 잎에 전신이 피범벅이 된 만인방의 무사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검기를 뿌린 이는 그들이 달아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 눈을 매섭게 빛냈다.
"어딜 달아나, 이 새끼들이!"
조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쫓아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자리를 지켜!"
뒤쪽에서 터져 나온 노호성에 조걸이 찔끔하며 내디뎠던 발을 회수했다.
조걸이 슬쩍 돌아보니 윤종이 평소와 달리 차갑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을 쓰러뜨리는 게 중요하더냐?"
"아, 아닙니다, 사형!"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사형제들이 죽어 나가도 괜찮더냐?"
"아닙니다!"
"그럼 자리를 지켜라! 네가 앞에서 버텨야 한다!"
"예!"
조걸이 다시 정신을 다잡으며 하체에 힘을 주었다.
그 와중에도 윤종의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아아아악!"
그리고 다른 화산의 제자를 몰아붙이던 만인방도의 어깨를 그대로 꿰뚫었다.
조걸이 전방을 확실하게 막고, 뒤쪽에서 윤종이 지원하는 방식. 딱히 그리하자 말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제 위치를 찾아 들어간 둘이었다.
"흥분하지 마라. 방심도 하지 마라. 머리를 식혀! 차갑게!"
"예!"
조걸이 검을 움켜잡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백천 일행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윤종이지만, 사형제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그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조걸이 찍소리도 못 하고 그 명에 따를 만큼 말이다.
실력으로 따지자면 조걸은 확실히 윤종보다 뛰어났다. 처음부터 그는 윤종보다 강했지만, 이제는 그 차이가 어느 정도 보일 만큼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사숙! 뒤쪽으로 물러나십시오!"
"아, 알았다!"
윤종의 고함소리에 백자 배들마저 군말 없이 움직였다. 조걸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사형은 사형이야.'
그렇기에 윤종은 훗날에 장문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고, 조걸은 그저 그런 그를 보좌하게 될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걸아!"
"예, 사형!"
조걸의 형형한 두 눈이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을 응시했다.
곧 그의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나는 이게 더 적성에 맞거든!'
윤종과 백천이 화산을 이끈다면 조걸은 그 검이 될 것이다.
화산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
그게 조걸이 걷고자 하는 길이었다.
그래. 마치…….
조걸의 시선이 담벼락을 향해 걸어가는 청명의 등을 슬쩍 바라보았다.
"혼자?"
"충분하지."
흑시의 짧은 물음에 청명 역시 짧게 대답했다.
"……뒤쪽의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아 보이는데?"
청명의 시선이 흘끗 뒤로 향했다.
모두가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하고 있다. 서안에서 현영이 이끄는 인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마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충분해."
단호한 목소리.
"약하게 키운 적 없거든. 그리고……."
청명의 시선이 백천 일행에게 가 닿았다.
"……요즘은 내가 다 감당이 안 될 지경이라."
호랑이 새끼들이 이제는 다 컸다고 슬슬 이를 드러내는 판이었다. 이 기회에 적당히 풀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청명이 흑시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런 곳에 승냥이 떼를 풀어 놓을 만큼 멍청하지 않거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놈들은 위험하다. 이 전장에 이런 놈들을 풀어놓는다면 막대한 희생자가 생길 것이다.
단순히 거친 놈들과는 다르다. 이들에게서 풍겨 오는 피 냄새는 과거의 한때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건 동감하지. 저놈들과는 취향이 도통 맞질 않아. 나는 저렇게 쉽게 누군가를 죽이는 걸 이해할 수 없거든."
검은 붕대에 싸인 흑시의 입가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죽음이라는 건 조금 더 천천히 즐겨야 되는데."
그 말에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참 다행스러운 일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미소를 머금었던 흑시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반면에 청명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나도 너희 같은 놈들이 취향이거든."
아무 거리낌 없이 쳐 죽일 수 있으니까.
그 마교에게 악귀라고 불렸던 사내.
매화검존 청명이 스산한 살기를 내뿜으며 흑조단을 응시했다.
그 농밀하고도 섬뜩한 살기에 흑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너 정말 도사냐?"
"그럼."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희 같은 놈들을 쳐 죽이는 게 도사가 해야 할 일이지. 마침 착한 척하는 것도 지겹던 참이었어. 그러니까 시작하자고. 너희가 죽든, 내가 죽든."
꾹꾹 눌러 왔던 것들을 모조리 풀어낸 청명이 섬뜩한 웃음을 날리며 흑조단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