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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96화 (396/1,567)

396화.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것이다. (1)

청명이 무위를 보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미 그의 무위가 자신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청명이 보여 주는 무위는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화산 문도들을 놀라게 한 것은, 더없이 잔인한 청명의 손속이었다.

'청명아……. 이놈아.'

현종은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도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잔인한 검이었다.

하나 그는 감히 청명을 탓할 수 없었다.

저 아이의 가슴 안에 들끓는 분노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저 검에서 잔인함이 아닌 서글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녀석아……."

청명이 휘두르는 검 끝마다 자책이 묻어난다.

현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장내는 이미 청명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만인방의 문도들은 물론이거니와 만인방의 대주들조차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가 무위를 보여 준다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 하느냐!"

현종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쩌렁쩌렁 화산을 울렸다.

화산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현종을 바라보았다. 현종은 자신의 앞에 선 야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갈했다.

"청자 배 하나가 홀로 싸우게 두는 것이 화산의 검을 짊어진 이들이 할 짓이더냐?"

그 천둥 같은 불호령에 화산의 제자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검을 잡은 손들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늘어뜨리고 있었던 검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적들을 향해.

"화산을 지키는 건 다름 아닌 너희다. 누구도 화산을 홀로 지킬 수는 없다!"

이 말은 청명에게 의지하고 있던 화산의 문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청명에게 전하고픈 말이기도 했다.

'하찮구나.'

스스로가 너무도 티끌처럼 느껴졌다.

그가 강했다면, 화산이 더 강했다면 저 어린아이가 저토록 분노에 휩싸여 살검을 휘둘러 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파에 적이 쳐들어왔고, 누군가가 다쳐 사경을 헤맨다.

그건 슬픈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찌 청명의 잘못일 수 있단 말인가?

"검을 들어라!"

그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노기가 묻어났다.

"너희가 자랑스러운 화산의 검수임을 스스로 증명하라!"

더는.

누가 돌봐 주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라!

현종의 호령에 화산의 제자들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눈앞의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야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전장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반전됐다.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 사기가 끼치는 영향을 감안한다면 만인방의 승기는 거의 추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라.

화산의 문도들은 용기백배해서 이전보다 더욱 맹렬한 검을 떨쳐 내고 있는 반면, 만인방의 문도들은 누가 봐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등 뒤에서 범이 다가오는데, 눈앞의 여우에게 신경을 집중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앞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정신은 온통 등 뒤에 청명에게로 쏠려 있었다.

누구 하나가 청명을 막아서지 않는 이상,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래서 강호의 전투는 절대고수의 존재 유무가 가른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저 머저리 같은 놈이!'

야도는 처참한 시체가 되어 버린 탈명단창을 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탈명단창 손월은 절대 저렇게 쉽게 당할 이가 아니었다. 저 청명이라는 놈이 야도조차 손댈 수 없는 강자인 건 사실이나, 탈명단창 역시 그리 만만한 놈은 아니었다.

제 실력을 발휘만 했다면 적어도 백 합, 못해도 오십 합은 버텨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만인방의 대주니까.

마지막엔 끝내 당한다 해도 그렇게 검을 섞는 모습이라도 보여 주었다면 방도들의 사기가 이토록 급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병신은 결국 제 이름값도 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는데.

야도가 자신의 앞에 있는 현종을 노려보았다.

'늙은이가…….'

급격히 그 기세를 잃어 가던 현종조차 처음의 그 진중함을 되찾았다. 이렇게 된 이상 상대를 쉽게 제압하기는 글렀다.

슬쩍 시선을 돌려 독혈수를 확인하니, 그 역시 다시 기운을 차린 현상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발목이라도 잡고 늘어져 볼 셈이오? 그러다 죽는 것보다는 나를 저놈에게 보내 주는 쪽이 나을 텐데? 약해 빠진 그대가 날 상대하는 것보다는 저 새파란 놈이 낫지 않겠소?"

슬쩍 도발해 보았지만, 침착하게 가라앉은 현종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파와 사파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글쎄?"

"부끄러움의 유무다."

"……."

현종의 정광 어린 눈이 야도를 응시한다.

"물론 저 아이는 나보다 강하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강하지."

현종의 침중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저 아이를 싸우게 두고 뒤에서 뒷짐이나 지고 있을 생각은 없다. 수치를 아는 자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자라면 감히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말을 마친 현종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보듬어 주지 못한다.

이끌어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나눠 들어 줄 수는 있어야 한다. 그것마저 하지 못한다면 현종이 무슨 자격으로 화산의 장문인을 자처하겠는가?

"화산의 모든 문도들은 저 아이와 함께 걷기 위해 수련하고 노력하고 있다. 문파란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것이다."

야도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뭐라는 건지……."

그는 현종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를 이해하기엔 그들이 걸어온 길은 너무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강호에서의 정의란, 힘으로 스스로를 증명한 자의 것이다.

이곳에서 야도가 만인방을 이끌고 화산을 무너뜨린다면 현종의 말은 틀린 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누구도 현종의 말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야도는 지금까지 언제나 승리해 온 쪽이었다.

"확실히…… 기세가 오른 모양입니다만."

야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현종이 의문 어린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래서 군사의 말은 무시할 수 없다니까. 이 작은 문파 하나 처리하는데 왜 그리 많은 이들을 보내나 했더니."

중얼거린 야도는 별안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흑시(黑豺)!"

그리고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 처먹을 새끼! 당장 기어 나오지 못해? 몇이나 더 죽어 나가야 파악을 끝낼 셈이냐!"

영문을 알 수 없는 야도의 고함이 끝나는 순간, 화산의 한쪽 담벼락 위에서 쇠끼리 긁히는 듯한 거슬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호들갑 떨 것 없다."

눈을 부릅뜬 현종이 황급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전신을 검은 붕대로 칭칭 감은 사내가 담벼락에 서서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산신룡 청명……."

까드득.

흑시가 손을 꽉 쥐었다 빠르게 펴니 기묘한 뼈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정보를 조사한 놈의 목을 잘라 버려야겠군.'

저런 놈을 겨우 후기지수라고 평가하다니.

"화산신룡 청명에, 화정검 백천이라."

화산의 손에 만인방 대주가 둘이나 당했다. 이건 쟁쟁한 정파의 명문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여긴 반드시 지금 지워야 한다.'

흑시는 화산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빠른 시일 내에 만인방에 강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화산을 미리 지울 수만 있다면, 대주 둘의 목숨 정도는 싸게 먹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흑시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청명 역시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아니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이쪽으로 신경을 쏟고 있었다. 마치 흑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까드드득.

그의 손이 다시 기묘한 뼈 소리를 자아냈다.

"흑조단."

작은 흑시의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의 좌우로 검은 그림자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저……."

"저거……."

담벼락 위에 올라선 검은 무복 차림의 무인들은 마치 검은 까마귀 떼처럼 불길하고 음산해 보였다.

그리고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제껏 공격해 오던 만인방의 평범한 무력대와는 그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기껏 잡았다고 생각한 승기가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처음부터 나섰다면 이럴 필요도 없었잖느냐, 빌어먹을 놈!"

흑시의 시선이 천천히 야도에게로 향한다.

정말로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러 대던 야도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입을 다물고는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빌어 처먹을.'

흑조단.

방주 직속으로 오직 방주의 명만을 받는 특수 집단.

그 잔인함과 독랄함은 같은 만인방도들 사이에서도 경원시될 정도였다. 특히나 흑조단의 단장인 흑시는 만인방의 대주들조차 은근한 두려움을 품는 존재였다.

흑시를 차마 마주하지 못한 야도는 시선을 돌려 현종을 바라본다.

억눌린 감정이 현종에게로 고스란히 쏟아졌다.

"영감이 잘난 듯 떠들어 대도, 상황이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저 청명인가 하는 놈이 합세하지 못한다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저놈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현종이 심유한 눈으로 야도를 바라보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지."

"……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신이 상처로 뒤덮였고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지만, 이 노검수는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느냐. 저 아이를 혼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모두가 이곳에 있다고."

"너희 따위가?"

"부족하더냐?"

야도의 눈이 못마땅한 듯 가느스름해졌다.

거슬린다.

흑조단이 나타난 순간 만인방은 전장의 우세를 잡았다. 저 화산신룡이 아무리 강하다고해도 흑조단을 홀로 상대할 수는 없을 터.

아니.

설사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변함은 없다. 저놈이 흑조단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화산의 문도들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 노인의 눈에서는 빛이 사라지지 않는가?

그 순간 현종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뭐?"

현종이 고개를 젓는다.

"무엇보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저 아이를 홀로 두지 않기 위해 가장 노력하는 이가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야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믿는다."

"……."

"설령 화산이 무너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 아이들만은 반드시 저 아이의 옆을 지키겠지. 그렇기에……."

현종의 시선이 청명의 등에 고요히 가 닿았다.

"나는 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청명의 등 뒤 절벽에서 하얀 무복을 입은 누군가가 하늘 위로 치솟듯 뛰어올랐다.

그에 이어 몇몇 인영(人影)이 뒤이어 절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솟구치듯 몸을 띄워 올린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청명의 좌우로 착지했다.

가장 앞에 내려선 이의 시선이 당소소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운검에게로 향했다.

"……사숙."

하얗게 질릴 만큼 입술을 꽉 깨문 그는 상처투성이의 현종 역시 보았다. 그리고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장문인!"

창백해진 그의 얼굴에 분노가 번져 갔다.

"이놈들이……."

윤종과 조걸 역시 분노를 참지 못했다.

특히나 유이설은 바닥에 내려선 순간부터 현종의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무심하던 그녀의 얼굴에 귀기(鬼氣)가 어렸다.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또.

"아미타불."

다른 화산의 제자들보다 조금 늦게 절벽을 오른 혜연이 반장을 하며 그들의 뒤로 다가왔다.

"저도 돕겠습니다."

백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의 좌우로 선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이 차가운 눈으로 만인방을 노려보았다.

백천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직이 말했다.

"……조금 늦었다."

"말은 됐어."

청명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지?"

"물론."

챙!

화산오검.

세상에 그리 불리는 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백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냉정을 잃지 마라."

"예!"

"단!"

그리고 으르렁대듯 일갈했다.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다!"

모두가 검을 움켜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짧은 긴장과 단단한 각오가 그들의 얼굴을 휩쓸었다.

"후!"

짧게 심호흡을 한 백천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모조리 쳐 죽여 버려!"

"간다!"

다섯 줄기의 빛살처럼, 화산오검이 화산의 정상을 가르며 만인방도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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