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5)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내뻗은 손이 덜덜 떨며 땅을 할퀴고 내짚었다.
다리가 잘려 나갔다. 그토록 멀쩡하던 다리가 순식간에.
하지만 탈명단창을 진정 지옥으로 몰아넣은 건 다리가 잘려 나갔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었다.
'대체 뭐냐고, 대체!'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다.
타인에게 내력을 밀어 넣는다는 건 운기를 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야 운기를 하는 중에 검기를 뽑을 수 있단 말인가?
탈명단창이 청명과 정정당당하게 정면에서 맞붙었다면, 단 일 격에 다리가 잘리는 결과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내력을 밀어 넣어 치료하던 놈이 그런 검을 날릴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방심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방심이 이런 결과를 빚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탈명단창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흐으으으……."
그는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검을 쥔 채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청명을 보았다.
심장이 조여 왔다.
피로 젖은 검을 늘어뜨린 채, 무심한 얼굴로 다가오는 청명의 모습은 사신(死神)과도 다를 게 없었다.
"일어나."
냉막함을 넘어, 감정의 고저조차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탈명단창의 귀를 파고들었다.
"말했지."
그그그극.
검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를 천둥처럼 뒤흔들었다.
"잔인하게 죽여 주겠다고."
탈명단창의 눈이 공포로 번들거렸다.
수하들을 베어 날려 버리는 손속이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상대의 다리를 잘라 버리는 독심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저놈은 그가 지금까지 봐 왔던 정파 놈들과는 달랐다. 저놈이라면 자신이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고도 남을 것이었다.
저벅.
마침내 그 소름 끼치는 발소리가 멎었다.
"뭐, 뭐하느냐! 막아! 막으라고! 당자아아아아아앙!"
탈명단창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대자 전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지금까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지켜보듯 멍하게 자리를 지켰던 이들에게 현실감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 막아라!"
"대주님을 지켜라!"
탈명단창이 이끌고 온 대가 기겁을 하며 청명과 탈명단창의 사이로 달려들었다.
"어딜!"
"못 보낸다! 이 새끼들아!"
하지만 이번에는 화산의 제자들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뒤쪽에 있는 이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검이 닿는 거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매서운 검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밀리기만 했던 화산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공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이 애송이 놈들이!"
"비켜라! 개자식들아!"
만인방의 무사들이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지만, 화산의 검은 그들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수라장에서 가까스로 몸을 빼낸 십여 명의 만인방 무사들은 기어이 청명과 탈명단창의 사이로 날아들었다.
"대주님은 못……."
서걱.
목이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
가장 앞에 나섰던 이가 단 일 검에 목을 잃고 통나무처럼 곤두박질쳤다. 그 모습에 모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발을 멈추고 말았다.
촤악.
청명이 짧게 검을 떨치자 검 끝에 묻은 피가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어차피……."
앞을 응시하는 청명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도 살려 둘 생각은 없었어. 일찍 죽겠다면 소원대로 해 주지."
쿵!
청명의 발이 땅을 짓이기듯 밟았다.
동시에, 내뻗은 그의 검에서 붉은 검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피로 검붉게 젖은 땅보다도 더욱 붉고 선명한 검기가 치솟는다 싶더니, 이내 수십, 수백의 매화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만인방의 무사들은 일제히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물론 처음 본 광경은 아니었다. 조금 전 저 화산의 애송이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도 저 검법은 몇 번이나 봤다.
하지만 다르다. 분명히 같은 검인데, 도저히 같은 검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똑같은 검법임에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이렇게도 다르단 말인가.
하나하나의 꽃잎이 제각각의 움직임을 보이며 허공에 수놓였다. 마치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생생함을 넘어 요사스럽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마, 막아야…….'
선두에 있던 이가 내력을 있는 대로 밀어 넣고 도를 들어 올렸다.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단전이 찢어지도록 내력을 끌어 올린 뒤 도를 폭풍처럼 휘둘렀다.
맹렬하다.
지금까지 쌓아 온 수련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도기를 머금은 도는 눈앞의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것처럼 맹렬하게 전방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아무리 도가 거칠고 강하게 휘둘러진다 한들, 물샐틈없이 기운을 뿜어낸다 한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모두 쳐 낼 수 있겠는가?
도가 미처 닿지 못한 미세한 틈 사이로 매화꽃잎이 밀려들어 왔다.
'아, 안 돼!'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서걱.
살랑거리며 날아든 꽃잎이 손목에 닿는 순간, 섬뜩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흩뿌려졌다.
손목의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에, 맹렬하게 움직이던 도가 잠시 그 기세를 잃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아…….'
정신을 차려 보니 세상이 온통 매화로 뒤덮여 있었다.
'미친…….'
꽃잎이 전신을 휩쓸고 들어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의 처절한 비명을 시작으로, 곁을 지키던 이들 역시 붉은 매화에 완전히 뒤덮였다.
잠시 후.
털썩. 털썩.
육중한 소리와 함께 전방에 서 있던 만인방의 무사들이 바닥으로 처박히듯 쓰러졌다.
"……."
지켜보던 이들은 그 광경에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산의 검.
과도하게 요사스럽고 살기가 짙어 정파의 검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마저 받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눈을 다 감기도 전에 이미 숨이 끊겨 버린 이들의 전신에서 피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이 차갑게 식어 갔다.
상대의 검에 당한 동료를 보는 게 어디 이번이 처음이겠는가? 하지만 이건 지금껏 봐 왔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쓰러진 시신은 한눈에 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일 검에 얼마나 많은 변초(變招)가 담겨 있으면 한순간에 사람이 저리 많은 상처를 입는다는 말인가?
그 상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일말의 승산조차 없으리란 것을.
저벅.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오직 청명만이 무심하게 주변을 보았다.
그가 걸음을 뗄 때면 땅에 고인 피가 청명의 발에 밟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
만인방의 무사들은 달려들지도, 도망가지도 못하는 채로 엉거주춤 몸을 떨어 댔다.
이가 절로 맞부딪치고, 전신이 얼음 굴에라도 들어간 양 차게 식었다.
막아?
막는다고?
'주제에 누굴 막는다는 말인가?'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움켜잡은 도의 끝이 덜덜 떨렸지만, 그건 이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당장 달아나지 않고 도를 들어 올린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었다.
머리가 텅 비어 간다.
"막아! 막으라고! 이 새끼들아!"
그 와중에도 탈명단창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 소리는 끊임없이 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복종하지도 못했고, 그 대책 없는 명령에 반기를 들지도 못했다. 저런 목소리 따위에 반응하기에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끔찍했다.
'어떻…….'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 검을 펼쳤는가?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은 이미 붉은 매화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그 매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저 광경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아름답다는 감상을 떠올린 것은…… 이들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이건 환상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굳어 버린 육체를 유린했다.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
환상처럼 피어난 매화의 비가 꿈결처럼 사라졌을 때.
탈명단창과 청명의 사이를 막아선 이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저벅.
검이 만들어 낸 광경은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운 환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혈인(血人)이 되어 쓰러진 시체들 사이에 선 청명은 아주 느릿하게 말했다.
"이제 네 차례군."
"후, 흐…… 윽!"
탈명단창의 눈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핏발이 섰다.
"개 같은……."
하나 남은 단창을 바닥에 박아 넣은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잃은 터라 크게 휘청거렸지만, 용케 몸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다.
"개 같은 새끼!"
실핏줄이 있는 대로 터져 거의 붉게 물들어 버린 그의 눈이 적의와 격노,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을 담고 청명을 노려보았다.
콰득.
땅에서 단창을 뽑아낸 그는 양손으로 단창을 움켜잡고 청명을 겨눴다.
"나를…… 나를 우습게보지……."
"주둥아리 닥쳐."
하지만 청명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이!"
탈명단창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얼마나 지독하게 물었는지 금방 살점이 움푹 파였지만, 그는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탈명단창은 남은 내력을 죄다 단창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과하게 회전한 단창이 와류를 일으키며 손아귀 살을 찢었지만, 탈명단창은 오히려 더욱 내력을 높여 단창에 밀어 넣었다.
손?
목숨 앞에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벼락같이 단창을 내질렀다.
"죽어라아아아아앗!"
그의 회심의 일격, 칠사탐와(七蛇探蛙) 초식이 이전에 없었던 기세로 내뿜어졌다. 일곱 줄기의 와류가 더없이 강렬하게 청명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한 다리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 기세만큼은 오히려 두 다리가 온전할 때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가 만인방의 대주 자리까지 올라 있는 이유를 확연히 증명하는 일초(一招)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청명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일곱 줄기의 와류를 보면서도 청명은 오히려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카아아아아앙!
와류의 옆면을 후려친 매화검이 부러질 듯 낭창하게 휘어졌다.
카아앙! 카아아앙!
날아드는 와류의 옆면을 후려쳐 방향을 틀어 내며 청명은 앞으로 전진했다.
남은 다섯 줄기의 와류가 청명의 전신을 노리고 코앞까지 날아든 그 순간.
'뭐?'
탈명단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청명의 몸이 퍽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탈명단창은 기겁하여 기감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눈으로 쫓는다면 늦…….
"이……!"
탈명단창의 고개가 부러질 듯 위로 꺾였다.
마침내 그의 시야에 비조처럼 떨어져 내리는 사람의 형체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늦어."
서걱!
검이 피륙으로 이루어진 무언가를 잘라 내는 소리가 섬뜩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조금 잠시 후, 또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텅.
쇠로 만든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탈명단창은 멍하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단창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여전히 그의 손에 잡힌 채로 말이다.
"……."
조금씩 시선을 옮기니 손목이 잘려 나간 것이 확연히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감은 사라졌다. 고통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의 떨리는 시선이 앞을 향했다. 청명은 손을 뻗으면 닿고도 남을 거리에서 그를 정확하게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야."
푸욱!
"아아아아아악!"
꿰뚫린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탈명단창을 다시금 현실로 끌어들였다. 어깨를 파고든 검이 휘저어지자 몸이 점차 뒤로 밀려났다.
탈명단창은 하나 남은 다리로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
이렇게는 죽을 수…….
"어딜 가."
서걱.
가슴께가 베여 나갔다.
서걱.
복부가 갈라지며 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서걱.
얼굴이 베이며 한쪽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청명은 마치 농락하는 듯 조금씩 탈명단창의 전신을 베어 냈다. 마치 조금 전 그가 운검에게 그랬던 것처럼.
"으아아아아아아아!"
탈명단창은 발악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하나 남은 그의 주먹이 내력을 담고 발작적으로 휘둘러졌다.
"이 개자식……."
서걱!
하지만 휘둘러진 그의 팔은 채 뻗어지기도 전에 팔꿈치부터 잘려 나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
서걱.
하나 남은 다리의 허벅지가 반 이상 베어졌다. 더 이상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던 탈명단창의 몸이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그의 드러난 상체로 청명의 검이 굶주린 뱀처럼 날아들었다.
파아아앗!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이 수십 차례 휘둘러졌고, 단 한 번의 파공음만을 만들어 냈다.
탈명단창의 가슴에 수십 개의 자상이 새로이 그였다.
"끄륵……."
그의 눈은 급격하게 빛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댔지만,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피는 그것마저 허락지 않았다.
"유언은 사람이 남기는 거지."
청명의 검이 탈명단창의 목에 닿았다.
"너는 벌레처럼 죽어라. 그것조차 네게는 과분하니까."
푸욱.
일말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청명의 검이 탈명단창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던 그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싸늘하게 식어 갔다.
검을 뽑아 낸 청명은 검에 묻은 피조차 더럽다는 듯 강하게 검을 떨쳐 피를 흩뿌렸다.
사위가 고요했다.
뭔가를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식어 가는 탈명단창을 바라보던 청명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움찔.
만인방도들이 경련하며 몸을 움츠렸다.
이윽고 청명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들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 버렸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