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4)
"처, 청명아!"
"청명아! 청명!"
무겁게 내려앉았던 정적 속에서 화산 제자들의 목소리가 발작적으로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처, 청명이, 이놈아!"
심지어 현종조차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는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앞에 둔 야도는 이 기이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냐, 대체?'
저 청명이라 불린 놈이 날린 검기가 각인이라도 된 양 아직도 두 눈에 선했다.
단 일 검에 탈명단창 손월의 단창을 잘라 버리고, 그에게 부상을 입힌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스스로 탈명단창에 비해 한 수에서 두 수는 더 앞선다고 자신하는 야도였지만, 아무리 그라도 탈명단창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팔 하나 정도는 내어 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탈명단창의 애병을 멀리서 날린 검기만으로 잘라 냈다니.
그것도 화산의 어린 도사가?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찌할 수 없는 공포감에 전율하던 야도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한 놈이 아닌가?'
절대고수가 전장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것은 사실이나, 만인방은 이미 이 전장을 접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와서 하나가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가?'
야도의 도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핏발이 선 그의 눈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청명에게서 떨어질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저벅.
청명의 발이 묵직하게 지면을 내리밟았다.
어느새 전투는 멈춰 있었다.
현종을 농락하듯 도를 휘두르던 야도도, 현상을 몰아붙이던 독혈수도. 조금 전까지의 격렬한 전투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손을 멈춘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쥐가 코앞에서 뱀을 맞닥뜨린 것처럼 말이다.
움직이는 순간 목이 잘려 나간다.
머리가 아닌 본능으로 상황을 이해해 버린 그들은 폐부에서부터 밀려드는 선득한 공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벅. 저벅.
청명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의 발이 향한 건 당연하게도 탈명단창과 운검이 있는 곳이었다.
청명과 탈명단창의 사이에 자리한 무인들은 저마다 긴장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마른침을 삼켰다.
"으……."
"……."
만인방의 무인들은 청명이 다가올수록 저도 모르게 아주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입술 새로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달아날 수 없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달아난다 해도 그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비켜."
그들의 바로 앞까지 온 청명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순 시선을 교환한 만인방의 무사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더니 되레 앞으로 짓쳐 달려들었다.
"죽여!"
"흐아아아아아압!"
누군가의 발작적인 외침과 함께 십여 명의 무사들이 동시에 청명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살기 위해서는 달아날 게 아니라 달려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많은 싸움을 통해 터득한 이들이었다.
쇄애애애액!
도와 창에서 선명한 기운이 섬뜩하게 휘몰아쳤다. 이는 어쩌면 그들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위력적인 공격인지도 몰랐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도기와 창기의 폭풍이 청명의 전신을 휩쓸어 갔다. 저 과격하고도 자비 없는 기운들에 맞서기에, 피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육체란 너무도 연약해 보였다.
하지만 발악에 그 기운들이 폭풍처럼 날아듦에도, 청명의 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우우우웅!
청명의 검이 기름에 불을 붙인 양 화르륵 검기를 뿜기 시작했다. 평소에 청명이 보여 주던, 섬세하게 절제된 그것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터질 듯 밀어 넣은 내력에, 매화검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비명을 질러 댔다.
그렇게 웅웅 진동을 일으키던 매화검이 이내 검신에 담긴 내력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세상을 갈라 버릴 듯한 참격(斬擊).
날아들던 창기와 도기가 타오르는 반월형의 검기와 맞부딪혔다. 그리고 바다에 이른 강처럼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흡수되고, 이내 맥없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기운의 폭풍을 말 그대로 분쇄해 버린 것이다.
그 기세를 잃지 않은 청명의 검기가 무방비 상태의 무사들을 그대로 덮쳐들었다.
"마, 막……!"
만인방의 무사들이 저마다 황급히 손에 든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막아 보았다. 하지만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었다.
콰드드드득!
검기를 막아선 병장기들이 갈대처럼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무시무시한 검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병장기를 잃은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곧 죽어 나자빠질 연약한 몸뚱이뿐이었으니.
"아, 안……."
"히이익!"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건 '베다'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검기에 휩쓸린 무사들의 육체는 당연하다는 듯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그뿐이랴. 검기에 실린 여력은 그 잘린 몸뚱이마저 거대한 무언가로 후려치 듯 사방으로 날려 버렸다.
십여 명의 육체가 일시에 반으로 갈려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투두두둑.
고깃덩어리처럼 허공을 가르던 몸뚱이들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뒤늦게 후드득 떨어졌다. 흡사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리는 듯했다.
저벅. 저벅. 저벅.
고요해진 세상.
움직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청명뿐이었다.
찰박.
그의 발이 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울리고서야 모두가 불에 덴 듯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모든 시선이 청명에게로 쏠려 있었다.
하지만 청명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탈명단창.
자연스럽게 청명을 응시하던 이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
탈명단창 손월의 얼굴이 더없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부르르 몸을 떤 그는 반토막이 나 버린 단창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반으로 잘려 나간 단창의 단면은 너무도 매끄럽고 깨끗해서 얼굴이라도 비칠 듯했다. 그 광경을 보자니 자꾸 등골이 서늘하고 소름이 돋아났다.
욱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베인 상처에선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 자신의 상처를 돌볼 여력 같은 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고 본능이 연신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당장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이에게서 달아나라고 몸이 먼저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달아날 수 있나?'
탈명단창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저 손에 잡힌 검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등을 향해 조금 전 보았던 그 검기가 날아들겠지.
그럼 이곳에는 탈명단창이라 불렸던 한 구의 시체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의 이마를 타고 굵은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대체 뭐지, 저놈은……?'
화산에 저런 괴물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후기지수 몇이 이름을 날리는 정도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봐야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찰박.
그때 돌연 청명의 발이 조금 빨라졌다. 순간 움찔한 탈명단창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이익!"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알아챈 그는 이를 악물고 단창에 경기를 밀어 넣었다.
저벅. 저벅.
하지만 청명은 그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걸었다.
"……."
탈명단창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몸을 튼 청명은 운검이 쓰러진 곳으로 주저 없이 걸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잘려 나간 팔.
그리고 어깨에서 아직도 쏟아지는 많은 양의 피.
그 모든 것이 청명의 눈에 콱 틀어박혔다.
"사숙조……."
한쪽 무릎을 굽히고 운검의 복부에 손바닥을 붙인 청명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소."
고요하다.
"소소!"
청명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자 주저앉아 있던 당소소가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퍼뜩 깨달은 그녀는 전력을 다해 운검과 청명을 향해 달려갔다.
비로소 운검의 몸을 제대로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 사형!"
"침착해."
하지만 청명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안 죽어."
당소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혼원단을 으깨어 운검의 입을 벌린 뒤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도 그녀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상태가 너무 위중……."
"안 죽어."
청명은 다시 한번 차게 일갈했다.
"……사형."
"안 죽는다."
그건 확신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간절한 바람.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 목소리에 담긴 무거움과 절실함이 외려 당소소의 떨림을 멎게 했다.
"살릴게요! 어떻게든!"
"……."
청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검의 몸에 내력을 있는 대로 밀어 넣었다.
한편 그런 그의 등을 보는 탈명단창 손월은 황당함과 두려움,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뭐 하는 거지?'
너무 이해가 가질 않으니 머리가 굳은 느낌이었다.
지나치게 황당한 일이라 일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탈명단창 손월이 있는 곳에서 환자를 치료한다? 그것도 등을 보인 채?
'머리가 완전히 돌아 버린 건가?'
그게 아니면 저 운검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저놈에게 그만큼 의미가 있는 자이기 때문인가?
아무래도 좋다.
평소라면 상대할 수 없을 강자다. 아까의 검기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 멍청하게도 등을 보인 채, 내력을 이용해 치료를 하고 있다.
타인에게 내력을 밀어 넣는다는 건 더없이 위험한 일. 이런 전장에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극도의 여유. 그게 아니면 극단적인 경험 부족.
어느 쪽인가?
탈명단창의 얼굴에 순간 갈등이 어렸다.
본능은 여전히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이 그를 계속해서 부추기고 있었다.
'일 격.'
단 일 격이면 된다. 하나 남은 단창을 저 등에 찔러 넣을 수만 있다면…….
그는 단창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그리고 머리가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단창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미칠 듯이 불어넣은 내력이 창을 과격하게 회전시켰다.
손이 찢겨져 나갈 만큼 맹렬히 회전한 단창은 이내 그 회전력을 온전히 담아 청명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죽……!"
서걱.
혼신의 힘을 담아 고함을 내질렀다. 머리는 분명 그리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고함이 채 흘러나오기도 전에 섬뜩한 소리가 먼저 울렸다.
동시에 탈명단창의 몸이 휘청거리다 고꾸라졌다.
'뭐?'
내가 균형을 잃는다고?
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의 눈에 기이한 무언가가 보였다.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길쭉한 무언가가 바닥에서 경련하며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더없이 익숙한…….
그 순간 탈명단창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저, 저거?'
피를 뿜는 기이한 형체가 자신의 오른쪽 다리라는 것을 이해한 순간, 오른쪽 허벅지에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격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쩍 벌어진 그의 입에서 흡사 짐승과도 같은 비명이 쏟아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그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선 더 이상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뿜어진 피만이 그의 손을 뜨겁게 적셔 댈 뿐이었다.
"너는 조금 기다려."
고통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그의 귀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재촉하지 않아도 죽여 줄 테니까."
말을 하는 중에도 청명의 손은 빠르게 운검의 몸 위를 누볐다. 내공을 불어넣으며 피가 흐르는 곳을 틀어막아 지혈했다. 그 능숙함은 곁에 있던 당소소가 놀랄 정도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누군가 죽어 가는 모습 따위는 수도 없이 보았다. 꺼져 가는 목숨을 부여잡기 위해 발악하는 것 따위는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다시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다시는.
청명의 시선은 운검에게 고정되기라도 한 듯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전신을 뒤덮은 깊은 상처와 잘려 나간 어깨. 그 처참한 모습이 청명의 피를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혼원단이 없었다면 손 쓸 도리조차 없었을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다.
그리고…….
"소소."
"예! 사형!"
"살려라."
"네! 반드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모두 마친 청명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도 잠시간 운검을 내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저벅. 저벅. 저벅.
조금 느리다 느껴질 만한 속도로 걸음을 옮긴 청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팔.
이제는 끝내 핏기가 빠져나가 새하얀 팔.
스스로 짓밟아 제멋대로 부러져 나간 손가락이 애처롭기만 했다.
운검의 팔을 조심히 들어 올린 청명은 그것을 운검의 옆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이 모든 과정을 끝내고서야 청명의 시선이 비명을 내지르는 탈명단창에게로 가 닿았다. 그야말로 차갑고 싸늘한 눈이었다.
꾸욱.
검을 잡은 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일어나."
비명을 내지르던 탈명단창이 숨을 헐떡거리며 공포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일어나."
그그그그극.
늘어뜨린 검이 땅을 긁었다.
청명이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서늘하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곱게 죽지 못할 거라고."
그의 몸에서 심장을 조일 만큼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서서히 분노로 일그러지는 얼굴은 악귀 같았다.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여 줄 테니까."
핏발 선 눈이 탈명단창을 똑바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