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3)
"운검아!"
현종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매서운 야도의 도는 그의 발이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카앙!
목을 노리고 날아든 도가 잔뜩 뒤흔들린 현종의 검과 부딪쳤다. 평정을 잃고 휘둘러진 검은 도를 완전히 막아 내지 못했다. 뒤로 튕겨 나간 현종의 검이 주인의 목을 얕고 길게 베었다.
"……이."
"침착하셔야지요, 장문인."
야도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평정심이 그쪽의 장기 아니었습니까?"
"……."
"아쉽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죽기 전엔 누구도 죽지 않는다는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군요."
현종의 눈에 핏발이 섰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운검을 도우러 가다가는 등을 공격당할 뿐이다. 그리고 운검과 그가 동시에 무너진다면 이곳의 모두가 죽기까지 불과 일각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분노로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간 현종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피를 너무 흘려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치솟은 노화와 울분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오라, 악적아. 너를 죽이고 저놈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이런이런."
야도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크게 웃어 젖혔다.
"지금까지는 조금 재미가 있었는데……."
그리고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하며 살기를 번뜩였다.
"이제는 재미도 없어지겠군. 소원대로 빨리 끝내 드리지."
그의 도에 한층 어마어마한 기세의 새파란 도기가 어렸다.
우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현상의 왼쪽 손목이 부러져 나갔다.
운검의 부상으로 인해 현상이 일순간 노출한 짧은 틈을, 독혈수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날린 일장을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막은 대가였다.
손목이 부러진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독(毒).'
상처 입은 손목이 순식간에 부어오르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내력을 밀어 넣어 기의 흐름을 틀어막은 현상은 이를 악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거칠고 살기 어린 참격이 독혈수에게 떨어졌다.
카앙! 카아앙!
하지만 그의 검은 여전히 독혈수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기껏해야 팔뚝에 작은 생채기를 남기는 게 전부였다.
"급해 보이는군. 크흐흐."
현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운검아.'
운검은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현종이야 운암을 총애했지만, 검수인 현상은 누가 뭐라 해도 운검을 가장 아꼈다.
지켜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흐뭇했다. 운검은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단 한 순간도 검수로서의 본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의 뒤를 이어 무각주가 될 이.
그가 바로 운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운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우수가 잘려 나갔다.
검을 들어야 할 손이.
제자들을 가르쳐야 할 그 팔이.
"으아아아아아앗!"
노호성을 내지른 현상이 답지 않게 거친 기세로 독혈수를 몰아붙였다.
"죽여 버리겠다, 이놈들!"
"하하하핫! 도사 입에서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군!"
독혈수는 여유롭게 웃어 가며 현상의 검을 받아 냈다.
'운검아.'
현상의 눈에서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운검아. 이놈아.'
'뭐지?'
정신이 흐릿했다.
마치 세상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제대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었지?
모호한 무언가를 찾아 한없이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숙조! 정신 차……."
어디선가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뭐라는 거지?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 웅웅거리는 느낌만 날 뿐, 무슨 말인지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사숙조!"
서서히 닫혀 가던 운검의 눈이 다시 느리게 열렸다.
'아…….'
그랬지.
나는 싸우는 중이었지.
익숙한 오른팔로 땅을 짚으려던 운검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지며 처박혔다.
그의 희미한 시선이 오른쪽을 더듬었다.
없다.
당연히 팔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 운검이 입술을 짓씹었다.
'피를 너무 흘렸나.'
제대로 지혈을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죽을 것이다.
부들거리는 왼손을 뻗어 힘겹게 오른팔의 혈도를 누른 운검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오?"
탈명단창이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낄낄 웃었다.
"그대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확실히 근성은 있는 놈이군."
노골적으로 비꼬는 말에도 운검은 그를 보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 말은 운검의 귀에 닿지도 못했다.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내 비틀대며 한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묫자리라도 찾는 건가?"
탈명단창이 피식 웃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단창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내 멈칫하며 눈을 크게 치떴다.
"……허?"
질질질.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며 걸어간 운검은 느리게 자세를 낮추었다.
잘려 나간 팔.
운검이 도착한 곳은 그의 오른팔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다고 다시 붙일 수……."
무어라 얘기하려던 탈명단창이 입을 다물었다.
운검의 손끝이 향한 곳은 팔이 아니었다.
떨어져 나간 자신의 팔이 쥐고 있는 검. 그 검을 왼손으로 뽑아 들려 했다.
꾸욱.
손잡이 윗부분을 잡은 운검이 발을 뻗어 잘려 나간 팔을 짓밟았다.
몸에서 떨어져 나갔음에도 절대 검을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쥐어진 손가락을 뜯어내듯 밟아 버린 그는 기어코 검을 뽑아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
천하의 탈명단창조차 그 광경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그중에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잘려 나간 신체가 아닌 검부터 집어 드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미친놈인가?"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다.
피를 과도하게 흘려 시퍼렇게 질린 얼굴.
팔이 뜯겨 나간 고통에 연신 경련하는 어깨.
그리고 단창에 꿰뚫려 질질 끌리는 다리까지.
당장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몰골이다.
하지만 운검은 그런 상태로도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검을 쥐고 탈명단창의 앞을 막아섰다.
"……계속……. 계……속하지."
"……."
"왜?"
탈명단창을 보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나는…… 나는 아직 살아 있다."
"……."
"내가 죽기 전에는."
언제 힘없이 풀려 있었냐는 듯 운검의 눈에서 줄기줄기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내 제자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못 댄다."
그러자 탈명단창도 오기가 치솟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이놈이!"
순간적으로나마 기백에 밀렸다는 걸 깨달은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이런 징그러운 놈이 다 있지?'
그동안 협의니 뭐니 지껄이는 놈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하지만 아무리 번드르르하게 말하던 놈이라 해도 죽기 직전이 되면 일단은 제 목숨부터 지키려 들었다. 탈명단창은 그걸 정파의 위선이라고 불렀다.
제 목숨을 지키고 나서야 지키는 협의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건 창고에 쌀이 남아도는 부자가 거지에게 던져 주는 동전 한 푼에 불과한, 값싼 자기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 작자는 그런 놈들과는 달랐다.
"얌전히 죽은 체하고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탈명단창이 발작적으로 단창을 움켜잡았다.
"그따위 몰골로 감히 내 앞을 막아서?"
파아앙!
섬전처럼 쏘아진 단창이 운검의 아랫배를 꿰뚫었다. 운검은 그 공격에 조금도 반응하지 못했다.
푸욱.
견제 삼아 날린 단창이 배를 꿰뚫자 탈명단창조차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뭐…….'
사실상 시체나 다름없는 상황이 아닌가?
단창을 뽑아 회수하자 구멍 뚫린 몸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이미 출혈이 너무 심했던 터라 피가 뿜어져 나오는 기세마저도 약하기 짝이 없었다.
"곱게 죽을 기회를 날렸……."
떠들던 탈명단창이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배에 구멍이 뚫린 운검이 왼손으로 잡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려 중단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체의 무거움은 이미 무너졌다.
검 끝은 시종일관 흔들렸다.
눈은 반쯤 감겨 초점이 없었으며, 자세마저 올곧지 못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기백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절세의 검수가 기수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압박감이 느껴진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 개자식이……."
상대의 기백에 눌릴 때마다 탈명단창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어린아이도 쓰러뜨릴 수 있는 적에게 겁을 먹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어디 보자!"
푸우욱.
단창이 운검의 가슴을 얕게 찔렀다. 겨우 손가락 한 마디 남짓 찌르고 돌아온 단창은 재차 운검의 가슴을 찔러 댔다.
"네놈이 얼마나 버티는지!"
푸욱.
순식간에 가슴팍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렸다.
"네가 쓰러지는 순간 네 제자들은 모두 죽는다. 어디 몇 번이나 버텨 낼지 한번 보자고!"
탈명단창의 움직임은 흡사 발작처럼 보였다.
절대 운검이 죽지 않을 만큼, 하지만 그 고통만은 생생하도록.
순식간에 가슴께에 십여 개의 구멍이 뚫린 운검이 휘청였다. 하지만 더듬더듬 뻗어진 다리는 어찌어찌 몸을 지탱해 냈다.
"이……."
탈명단창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운검의 다리에 단창을 깊게 박아 넣었다.
콰당!
다리가 또다시 꿰뚫리고도 서 있을 수는 없었던 모양으로, 운검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기백? 의지?"
탈명단창이 비웃음을 흘린다.
"엿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실력이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지. 결국은 시간 좀 끈 것뿐이지. 이제 그만 죽어라. 네 제자들은 내가 하나 남김없이 네 곁으로 보내 주지."
한 손으로 단창을 치켜든 그는 쓰러져 신음하는 운검의 목을 정확히 겨눴다.
화산의 제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비켜, 이 새끼야! 죽여 버리겠어!"
"사숙! 사수우우욱!"
"비키라고! 으아아아아아아! 이 빌어먹을!"
하지만 탈명단창의 수하들은 화산의 제자들을 잡고 늘어지며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어느덧 화산의 제자들은 퍼붓던 공세가 무색할 만큼 수세에 몰려 있었다.
속이 타들어 가고 피눈물이 흘렀지만, 이들을 뚫어 낼 수가 없었다.
"관주니이이이임!"
누군가의 처절한 고함과 함께 탈명단창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죽어라, 병신아."
그의 단창이 운검의 목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어발기는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탈명단창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날아들었다.
'뭐?'
그 어마어마한 기세에 탈명단창이 눈을 부릅뜨며 획 고개를 돌렸다.
검기.
어마어마한 속도의 검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몸이 반으로 갈릴 위기를 직감한 그는 운검의 목에 꽂으려던 단창의 궤도를 바꿔 앞을 틀어막았다.
하나!
가가가가가가각!
날아든 검기는 단창을 마치 갉아먹듯 파고들었다.
'이, 이게 뭔……!'
까아아아앙!
끝내 잘려 나간 단창의 윗부분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도 멈추지 않은 검기가 탈명단창의 가슴께를 찢어발겼다.
"……."
촤아아아악!
피분수가 뿜어진다.
탈명단창은 거의 뼈가 드러나도록 갈라진 자신의 가슴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뭐냐?'
이 말도 안 되는 검기는?
그의 떨리는 시선이 검기가 날아온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화산으로 올라오는 가장 짧은 길.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절벽을 박차고 솟아오른 한 사내가 바닥으로 내려서는 모습을 말이다.
턱.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격렬히 타오르는 불꽃같았던 전장이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쓰러져 있는 사형제들.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가까스로 선 장문인.
독으로 몸의 절반이 검게 문든 장로.
그리고…….
"……."
바닥에 쓰러진 운검과 그의 잘려 나간 오른팔.
당소소가 석상처럼 굳어 버린 사내를 보며 절규했다.
"사혀어어어어어어어엉!"
울음기 섞인 그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들어 탈명단창을 바라보았다.
움찔.
그 순간, 탈명단창은 움찔 경련했다.
'뭐, 뭐냐, 저놈은……?'
뭔가 결이 달랐다.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탈명단창 역시 전장에서 살아온 이. 적이 얼마나 죽음과 살인에 익숙한지는 눈빛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토록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을 지니기까지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도를 겪어야 하는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극도로 분노한 이는 오히려 냉정해진다던가?
청명은 무감한 눈으로 가만히 탈명단창과 만인방 무리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 모두……."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는 듯, 잠깐 입을 다문 그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이윽고 검을 늘어뜨린 청명이 귀신같은 기세를 내뿜으며 탈명단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