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죽어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죽겠다. (5)
'더 빨리!'
청명의 발이 힘껏 땅을 박찼다.
콰앙!
디딘 땅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는 동시에 그의 몸이 쏜살처럼 대지를 가르고 내달렸다.
"허억! 허억!"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백천 일행과 홍대광이 이를 악물고 뒤따랐다.
평소라면 저들에게 보조를 맞춰 주었을 청명이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 순간에도 화산에서는 누군가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을지 모른다.
'안 돼!'
청명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끝내 찢어져 버린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가 방울방울 얼굴을 타고 흩날렸다.
이미 그런 꼴은 충분히 보았다.
그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는 없다.
그 짙은 무력감과 영혼이 타 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무슨 수로 또다시 감당하란 말인가?
'안일했다.'
세상은 결코 청명의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세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를 능력이 되었다면 그 빌어먹을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사형제들이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었는데.
으드드득.
악다문 그의 턱에 힘줄이 돋아났다.
"청명아!"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청명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우는소리 해도 더 늦출 수는…….'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더 달려라!"
"……."
백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크게 외쳤다.
"죽어도 따라간다. 우리한테 맞춰 주지 않아도 돼!"
"……."
청명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꽉 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더 빠르게 간다!"
"알았다!"
청명의 속도가 더욱 높아졌다. 동시에 일행이 모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그런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최대 속도로 달리는 유이설의 시선은 청명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느껴졌다.
지금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또 얼마나 다급한지.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울고 있는 아이 같아.'
말없이 그의 등을 응시하던 유이설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화산이 위험에 처했다. 혹여 사형제들이나 장문인이 목숨을 잃는 상황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유이설이 경공에 더 박차를 가하자 다른 사형제들도 필사적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서둘러!"
구름에 둘러싸인 화산이 점차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왔다.
* * *
쾅!
단단한 자단목으로 만든 대문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날렸다.
쿵!
희뿌옇게 일어난 먼지 사이로 탈명단창 손월이 한 발을 내디뎠다. 화산의 산문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가만히 주변을 훑었다.
"……뭐야? 이게 다인가?"
그리고 슬쩍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연무장에는 화산의 문도들이 도열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헤아려 봐도 겨우 백여 명 남짓이었다.
되레 자신들의 수가 더 많을 지경이 아닌가?
"이런 조무래기들 몇 잡자고 이렇게나 보내다니. 군사 양반도 슬슬 치매가 오는 건가?"
"주둥아리 조심해라."
저벅. 저벅.
그의 뒤로 독혈수가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을 얕보지 마라. 적사도와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어디다 그런 병신 놈을 가져다 대."
"만에 하나."
독혈수가 입꼬리를 뒤틀며 화산의 문도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너 역시 곱게 죽지는 못하겠지. 방주님의 진노를 온몸으로 받아야 할 테니까."
"……끔찍한 소리를."
"틀린 말도 아니지."
야도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터덜터덜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의 뒤로 만인방의 무력대가 뒤따랐다.
"매번 방심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상황이 상황 아니겠소? 방주님께서 제대로 화가 나신 것 같으니,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해야지."
탈명단창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야도와 독혈수를 노려보았다.
"잘도 지껄이는군."
노골적인 적의였지만 정작 그 대상인 두 사람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보다…… 거물이 나오시는 모양인데."
저벅.
화산의 장문인 현종이 천천히 걸어 도열해 있는 화산의 제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묵직하게 입을 뗐다.
"예의를 모르는 자들이로군. 남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왔으면 우선은 사과부터 해야지."
탈명단창이 천천히 고개를 뒤틀어 현종을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살기가 현종을 향했다.
"늙은이가 화산의 장문인인가?"
"그렇다네. 현종이라 하지."
"크흐. 이거, 화산의 마지막 장문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로군?"
현종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실로 예를 배우지 못한 놈들이로구나."
탈명단창이 손가락을 들어 미간을 북북 긁었다.
"거 설교는 적당히 해 둬. 나는 애초에 설교 듣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그러더니 허리춤에 찬 단창을 툭 쳤다.
"곧 죽을 늙은이에게 설교를 듣는 취미는 더더욱 없거든."
조금 전보다 훨씬 노골적인 살기가 현종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현종의 표정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호오? 꽤 강단이 있는데? 다 쓰러져 가는 문파의 장문인치고 말이야."
"나이가 든다는 건……."
"응?"
현종이 담담히 말했다.
"많은 것을 겪는다는 거지. 작고 하찮은 것에 새삼스레 놀랄 일이 없도록 말이다."
"……이 늙은이가……!"
탈명단창이 막 발작을 하려는 찰나, 야도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좋은 말이로군."
그리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현종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건 오늘 살아남은 뒤에 해야 할 말이겠지? 목이 잘린 주제에 경험이니 어쩌니 논한다는 건 우스우니까."
현종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살짝 주름이 진 눈가에 정광이 어렸다.
담담하고 묵직한 그의 기세에 살짝 억눌린 야도는 무의식적으로 도를 움켜잡으며 표정을 굳혔다.
"만인방주 패군 장일소의 명으로 오늘 화산을 지운다. 감히 만인방을 건드린 것을 죽어서도 후회하고 또 후회해라."
"만인방?"
스르르릉.
현종의 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한 손에 든 검을 천천히 늘어뜨린 현종의 모습은 마치 산 정상에 자라난 노송처럼 굳건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
현종의 목소리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이곳은 화산이다. 감히 만인방 따위가 그 목을 빳빳하게 들 곳이 아니지. 횡행천하하며 협의를 지켜 온 선조들의 얼이 어려 있는 곳. 사파의 무리 따위가 흙발을 들일 곳이 아니다."
이내 현종의 검이 천천히 야도를 겨누었다.
"무기를 내려놓고 물러난다면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하지만 끝까지 싸우겠다면, 내 검이 무정타 원망하지 말거라."
야도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 입심처럼 실력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비틀린 입매에서 노기가 스멀스멀 묻어났다.
"비켜라!"
그런데 그때 탈명단창이 야도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파앗.
짧은 파공음과 함께 탈명단창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두 개의 단창이 그의 손에 들렸다.
"걱정하지 마라, 늙은이. 너는 죽이지 않으마. 네 제자 놈들이 하나하나 모두 죽어 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봐라. 넌 제일 마지막으로 목에 바람구멍을 내 주지."
"내가 죽기 전에는 누구도 죽지 않는다."
"크흐!"
탈명단창의 눈이 살기로 번들댔다.
"다 죽여 버려!"
"오오오!"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탈명단창의 수하들이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운암! 운검!"
"예!"
운암과 운검이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드는 만인방의 무사들을 맞아 갔다.
"현상!"
"예! 장문인!"
"놈들이 제멋대로 날뛰게 두지 마라!"
"예!"
현상이 지체 없이 검을 뽑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동시에 현종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노려보는 야도에게로 향해 있었다.
'막아 내야 한다.'
강호의 전투라는 것은 결국 절대고수의 역할이 반. 저 세 명의 대주들을 날뛰게 둔다면 화산에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할 수 있겠는가?
이미 늙어 버린 몸으로.
화산을 이끈다는 핑계로 검을 놓은 지가 언제던가?
저벅.
마음이 격동으로 가득 찼다. 손끝이 싸늘하고, 내딛는 다리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그래.
두렵다.
더없이 두렵다. 하지만…….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텐데. 잘도 나서시는군. 그 떨리는 다리로 말이야."
야도의 말에 현종이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때로는."
"……음?"
"두려워도 나서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
"오거라. 만인방의 악적이여.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내 너에게 새겨 주겠다."
야도가 얼굴을 뒤틀며 웃었다.
"그 대단하신 화산의 검을 어디 한번 견식해 보실까?"
그의 몸이 빛살처럼 현종에게 달려들었다.
쇄애애애액!
카아앙!
날아드는 도를 가까스로 검으로 막았다. 하지만 도에 실린 무게와 힘이 얇디얇은 검을 금방이라도 부러뜨려 버릴 것 같았다.
'가, 강해.'
삼대제자 청화(靑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 일 수를 교환했을 뿐인데, 상대의 강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는 이미 피를 뿌리며 쓰러졌을 것이었다.
어찌어찌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그그극!
상대가 힘으로 내리눌러 왔다. 손목이 뒤틀리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흐흐. 애송이 놈들."
검과 도가 맞닿은 곳 뒤로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험악하게 살기를 뿜어내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눈앞이 깜깜했다.
할 수 있을까?
그가?
청명도 아니고 백천도 아닌 그가 저 신주오패 중 하나인 만인방의 무사들과 싸울 수 있을까?
'어, 언제 오지?'
청명은? 그리고 백천은?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흐흐흐흐! 이 맹랑한 놈이 감히!"
쿵!
검에 맞닿은 도에서 강렬한 내력이 밀려들어 왔다. 순간적으로 속이 진탕되는 충격에 청화의 다리가 훅 꺾였다.
"이 어르신을 앞에다 두고 딴생각을 해? 죽어라아앗!"
밀려난 그의 머리로 강렬한 도격이 떨어졌다.
'아…….'
죽음을 예감한 청화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저건 막을 수 없…….
콰앙!
하지만 그때, 커다란 폭음이 터지며 청화의 머리로 날아들던 도가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를 머리로 채 다 이해하지 못한 청화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누군가가 그런 그의 한 팔을 획 잡아끌었다.
"일어나거라."
"과, 관주님!"
어느새 다가온 운검이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의심하지 마라."
"……."
"너희 역시 그 고된 수련을 이겨 낸 화산의 검수들이다. 스스로에게 의혹을 가지지 마라. 그리고 기대지 마라!"
운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언제까지 그놈들의 뒷모습만 바라볼 생각이냐! 언제까지 그놈들이 이끌어 주기를 기다릴 셈이냐! 스스로 해 온 것을 믿고, 본인의 실력을 믿어라! 그리고!"
운검이 검을 떨치며 걸어 나갔다.
"돌아온 놈들에게 끝내주는 미소를 지어 줘야지. 그렇지 않느냐?"
대답할 틈은 없었다.
운검이 앞으로 치고 나가 달려드는 만인방의 무사들을 베어 나갔다.
빠르고, 정확하고, 또한 진중하다.
화산 검학(劍學)의 교과서와도 같은 그의 검이 적을 유린했다.
"과, 관주님!"
"물러서지 마라!"
적들을 힘껏 밀쳐 내며 운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혼자 할 수 없다면, 서로의 등을 지켜라! 쓰러뜨릴 수 없다면 버티는 것부터 시작해라! 그걸로도 충분하다!"
검을 잡은 청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두 다리로 굳건히 섰다.
'화산의 검수다.'
설령 적을 쓰러뜨릴 수 없다 해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파아앗!
운검의 검은 거침없이 적을 찌르고 베어 나갔다.
눈 깜짝할 새 십방을 점한 그의 검 앞에, 달려들던 이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아악!"
"비, 빌어먹을! 빨라!"
운검의 검이 만인방도의 어깨를 찌르며 피를 뿌려 댔다.
서걱.
물러서는 이의 허벅지까지 깔끔하게 베어 낸 운검은 자세를 낮추며 재차 검을 찔러 넣었다.
검으로 따지자면 화산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가 운검이었다. 같은 배분에는 적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통틀어 생각하면 사실상 기껏해야 무각주인 현상 정도가 그보다 나을 뿐이다.
운검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한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미숙한 이들.
실력은 둘째 치고 단 한 번도 실전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은 분위기에 휩쓸리면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러니 무조건 그가 해내야 했다.
선두에 선 그가 적들을 무찌른다면 뒤에서 지켜보는 아이들도 용기백배하여 적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침착해라! 머리를 차갑게 유지해!"
운검이 막 눈앞의 적을 베어 내고 소리치려는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뭔가 크게 회전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기세가 운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읏!"
운검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몸을 뒤집었다.
콰아아아아!
어깨의 옷자락이 뜯겨 나가고, 얼굴의 피부가 길게 갈라지며 선혈을 뿜었다.
탁.
바닥에 내려선 운검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화산에도 나름 한 수가 있는 놈이 있잖아?"
탈명단창.
양손에 짧은 단창을 쥔 그가 고개를 흔들며 운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네놈만 죽이면 쉽게 끝나겠군."
"이쪽이 할 말이로군."
"흐흐흐흐. 도사 놈들이 주둥아리가 제법 대단하다니까."
탈명단창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 아가리에 창을 박아 넣어 주마!"
그의 손안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던 단창이 순식간에 운검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