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죽어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죽겠다. (4)
'빌어먹을.'
소취걸 양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다면!'
정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어느 정도 대비할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백하게 정보가 늦었다. 적이 섬서까지 들어오고 나서야 알아챘으니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을 리 없잖은가.
하나, 이건 개방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개방의 거지들이 천하 도처에 깔려 있다고는 해도, 모든 이들을 감시할 수는 없으니까.
애초에 저 만인방이 무력대를 셋이나 차출하여 화산으로 보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만인방은 분명 녹림과 이전투구를 벌이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전력을 이만큼이나 빼낼 여력이 있단 말인가?'
"아니! 아니지!"
양표가 고개를 뒤흔들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중요한 건 당장 이곳이니까.
상황은 절망적이다.
만인방의 무력대 셋이라면 웬만한 중소 문파는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쓸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화산의 전력은 명백하게 중소 문파 이하다.
화산은 중진 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화산에서 명성을 날린 이들은 서안에서 아직 복귀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 화산에 남은 이들은 큰 전력이 되지 않는다.
'역시 무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곳에 있는 이들만으로 만인방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랑거철이란 이럴 때 쓰는 말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양표의 시선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화산에 남은 모든 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굳건한 바위처럼 선 그들을, 양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르는 건가?'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니야.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산 제자들의 눈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결연한 얼굴로 의지를 다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느껴지기는 했다.
미미한 두려움이.
앙다문 입술 끝이 가볍게 떨렸으며, 불안한 듯 검을 쥔 손을 연신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양표는 잘 알고 있었다.
용기 있다는 것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모두 모였느냐?"
"예, 장문인!"
대답이 우렁우렁 울렸다.
도열한 제자들의 앞으로 나선 현종은 가라앉은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런 현종의 곁을, 매화검을 꽉 잡은 현상이 지키고 있었다.
"소식은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은 얼굴과는 달리 현종의 목소리는 퍽 담담했다.
"만인방의 악적들이 지금 화산을 오르고 있다. 그들의 목적이야 명확한 바, 아마 우리는 오늘 화산의 운명을 건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장문인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건 분명 느낌이 달랐다.
손끝이 저릿저릿할 만큼 커다란 긴장감이 연무장을 휩쓸었다.
현종은 모두의 안색을 살폈다.
저마다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있지만, 숨길 수 없는 불안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겁이 나느냐?"
"아닙니다!"
대번에 튀어나온 대답에, 현종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겁이 난다."
"……."
모두가 조금 당황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나는 겁이 나는구나. 혹여 오늘 목숨을 잃을까 봐. 너희가 다치는 모습을 볼까 봐. 화산이 오늘로 그 운명을 다할까 봐.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현종이 잠시간 입술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을 새기듯이 하나하나 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죽고 내가 살아남아 비어 버린 자리를 두 눈으로 보는 것이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나는 혹여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너무도 겁이 난다."
"……."
제자들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사기를 올리기 위해 꾸며 낸 말 같은 게 아니었다. 현종의 진짜 속내였다.
"화산의 제자들아."
"예, 장문인."
"죽어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죽겠다."
현종이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감히 나보다 먼저 죽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피를 흘려야 한다면 내가 먼저 흘릴 것이고,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내어 놓을 것이다!"
목소리의 울림이 커져 갔다.
담담하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며 화산을 울리기 시작했다.
"하나 그 전에!"
챙!
현종의 검이 뽑혀 나왔다.
검신이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났다.
"감히 화산을 짓밟으려 하는 저들에게, 화산이 어떤 곳인지 가르쳐 줄 것이다. 다시는 그 누구도 화산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화산의 매화는 다시는 지지 않음을! 똑똑히 알려 줄 것이다!"
모두 이를 악물고 턱에 힘을 주었다.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검을 뽑아라!"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모든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를 믿어라. 너희가 해 온 것을 믿어라. 감히 화산을 우습게 본 저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예! 장문인!"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명성을 높여 간다는 것은 적을 만들어 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저 그 시기가 예상보다 조금 빨랐을 뿐이다.
"운암!"
"예, 장문인!"
"운자 배를 이끌어라."
"예!"
"운검!"
"예, 장문인!"
"백자 배와 청자 배를!"
"맡겨 주십시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지금 세 갈래 길을 통해 화산을 오르고 있다.
차라리 지형의 이점을 살려 요격을 하자는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나, 모자라는 전력을 다시 셋으로 나눈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믿는다.'
모두가 모였을 때, 저들보다 오히려 화산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이다.
"적을 맞을 준비를 하거라!"
"예, 장문인!"
가볍게 납검한 현종이 침중한 눈으로 산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저곳으로 만인방의 악적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소취걸이라 하였는가?"
고개를 돌린 현종이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양표를 향해 물었다.
"예, 장문인. 소취걸 양표입니다."
"서안으로 출발한 연통은 언제쯤 도착할 것 같은가?"
"이미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렇군. 그럼 타문파의 지원은?"
"……요청은 했습니다만……."
소취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종남이 봉문 하여 가까운 곳에 도움이 될 만한 문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낙양 분타에도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마……."
현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인방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정도는 나서야 한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종남이 봉문 해 버린 이상, 지원을 올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호북의 무당이나, 하남의 소림 정도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해도 그들이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상황이 끝이 나 있을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하자면.
'지원은 없다는 거로군.'
현종이 살짝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내리누른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서안 쪽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입술을 깨무는 옆모습에서 근심과 걱정이 묻어났다.
그가 진정 두려운 것은 현영과 청명 일행이 늦어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죽는 일이 아니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그들이 모두 죽어 쓰러지고 불타는 화산에 그들이 도착하는 것이다.
'그것만은 안 된다.'
특히나 청명은 살기가 짙은 아이다.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화산을 끔찍하게 아끼는 아이다.
그 아이가 무너진 화산을 그 두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감히 짐작할 수 없지 않겠는가.
"걱정 말거라, 청명아."
이 아이들은 반드시 내가 지켜 낼 테니까.
목숨을 다해서라도.
* * *
"슬금슬금 속도 줄어들지?"
"……."
땀으로 흠뻑 젖은 백천이 힐끔 청명을 돌아보았다.
"뭐?"
"……."
수레에 드러누워 다리를 꼬고 있는 청명을 보자니 속이 뒤집어지고 울화가 솟구쳤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그의 허리에는 여지없이 목검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검수가 검을 깨 먹어?"
"으……."
"어휴, 그 검이 좀만 일찍 깨졌으면 그 모가지도 해 먹었겠어?"
백천은 결국 허망한 눈으로 다시 앞만 응시했다.
'나쁜 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공이 과보다 큰데, 그 쥐꼬리만 한 잘못 하나를 이렇게 철저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진짜 귀신은 뭐 하나!'
유령문 같은 얼치기 말고 진짜 귀신이 나타나서 저놈 좀 잡아가야 할 텐데.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박차를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응?'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은 백천이 고개를 획 들었다.
"어?"
"왜?"
"아니, 저기."
백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조걸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그와 박자를 맞춰 속도를 낮췄다.
"저기 뭐가 오는데?"
"응?"
청명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저 먼 곳에서 작은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작은 점 같았던 것이 순식간에 다가오며 점점 커졌다.
"거지 아저씨 아냐?"
"홍대광 분타주님?"
"맞는 것 같은데?"
청명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는 홍대광을 보며 피식 웃었다.
"또 뭘 빼먹었나. 하여튼 제일 바쁜 사람이야."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 홍대광의 옆으로 흙먼지가 잔뜩 일었다.
이죽거리며 한마디 하려던 청명은 순간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펴정을 굳히며 입을 닫았다.
"……무슨 일 있나?"
"화산신룡!"
마침내 도달한 홍대광이 몸을 날려 청명의 앞에 내려섰다.
"큰일 났다, 화산신룡!"
"왜요, 또? 뭔 일 있어요?"
"만인방! 만인방이 지금 화산으로 몰려가고 있다!"
쿵!
뭔가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수레 위에 올라타 있던 청명이 어느새 홍대광의 바로 앞에 나타나 그의 양어깨를 움켜잡았다.
"……뭐라고?"
"마, 만인방! 지금 만인방의 무력대 셋이 화산으로 향하고 있다. 아마 지금쯤은 화산에 도착하여 산을 오르고 있을 거다!"
청명의 허리가 순간적으로 크게 회전했다. 그리고 그는 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리려 했다.
"안 된다! 청명아!"
콰악!
하지만 어느새 낌새를 채고 달려온 백천이 그의 팔을 콱 움켜잡았다.
"놔!"
"너 혼자 간다고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으냐! 같이 가자!"
"이……."
청명의 눈에 귀화가 타올랐다.
"느려 터진 것들까지 데리고 갈 상황 아니야!"
"죽어도 따라가마. 기어서라도 따라갈 테니! 우릴 데리고 가라!"
"……."
백천의 단호한 외침에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정리한 것은 현영이었다.
"청명아! 아이들을 데리고 가거라."
"……."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할 수는 없다. 네가 모두 감당하려 한다면 결국은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굴을 굳힌 채 잠시 고민하던 청명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런 걸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사숙!"
"그래!"
"사고!"
"준비됐어."
"사형!"
"그래."
"간다!"
백천과 유이설, 윤종과 조걸이 당연하다는 듯이 달려 나와 청명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소승이 따라가겠습니다."
어느새 수레에서 내려온 혜연이 청명을 보며 반장을 취했다.
"몰랐으면 모르되, 알고도 손을 놓을 수는 없지요. 소승도 데려가 주십시오."
"죽을 수도 있어."
"생사여일(生死如一) 아니겠습니까."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
"오냐. 나도 제자들을 이끌고 최대한 빨리 도착하겠다."
"예!"
확인을 마친 청명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처, 청명아!"
"……."
누군가의 목소리가 청명을 막아 세웠다. 어지간하면 무시했겠지만, 목소리에 어린 간절함이 청명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백상.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청명과 그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 청명아. 사질들을…… 그리고 사형제와 사숙들을 부탁한다. 부디……."
"걱정하지 마."
청명이 싱긋 웃었다.
"내가 누구야. 먼저 쓸어 버리고 있을 테니 빨리 오기나 해."
"……그래."
"간다!"
청명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백천 무리와 혜연이 그의 뒤를 따라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 화산신룡!"
홍대광 역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청명의 뒤로 따라붙었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제자들을 보며 현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장문인, 부디!'
간절한 마음으로 먼 곳의 화산을 일별한 그가 급히 소리쳤다.
"서두르자꾸나! 어서!"
"예!"
수레를 버리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현영의 눈에, 어찌할 수 없는 걱정이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