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죽어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죽겠다. (2)
"그럼 잘 부탁하겠네, 화영문주."
"장로님……. 이리 가 버리시면 어찌합니까. 화영문은 아직 장로님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허허."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화영문주 위립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겸손한 것은 좋지만, 너무 과한 겸양은 오히려 비례(非禮)가 되는 법일세. 속가를 운영하는 것에 있어서는 내 능력이 어디 화영문주의 능력에 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걱정할 것 없네."
현영이 위립산을 안심시키며 부드럽게 웃었다.
"서안에서 화산까지라고 해 봐야 그리 먼 거리가 아니잖은가? 화영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우리가 올 것이네."
"장로님. 그리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이 사람아."
현영이 위립산의 어깨를 다시 한번 다독여 주었다.
"이리 제자가 많고 딱히 경쟁이 될 상대도 없으니 화영문은 번창할 일만 남지 않았겠는가?"
"예! 물론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추가로 속가문을 여는 일을 따로 논의해 보도록 하세."
"예. 안 그래도 저희 사범들 중에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일문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허허. 참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야. 그리고……."
꽈악.
위립산의 어깨를 잡은 현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비는 은하상단을 통해 보내도록 하게."
"……예."
"허허.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네만……."
현영이 칼날 같은 눈으로 위립산의 뒤에 선 제자들의 수를 점검했다.
"솔찬히 들어오겠구만."
"……계속해서 제자를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도 참.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허허허허."
장로님…….
몸이 상하니 제자를 줄이라는 것인지, 몸이 상해도 제자를 더 받으라는 것인지를 좀 명확하게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굴이 너무 좋아 죽으시는데요…….
위립산이 슬그머니 현영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짐을 둘러멘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도장님들,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는데……."
"헤헤. 괜찮아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좀 더 머물러도 되는데, 여기에 있다 보니까 사형들이 좀 풀어지는 것도 같고. 수련할 시간도 좀 부족하고."
"……그만큼을 했는데 부족하다고?"
"저 마귀 새끼……."
뒤에서 악에 받친 원성이 들려왔지만, 청명은 깔끔하게 그들의 불만을 무시했다.
"그리고 속가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본산이 강해지는 거죠. 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아주! 완벽하게 도와드릴 테니까요."
아니…… 뭐…… 그렇게까진…….
위립산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살짝 질린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때 옆을 지키고 있던 위소행이 대신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도장님들."
"아, 그래. 그런데 소행아. 너……."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본산에서 수련을 좀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
"제가요?"
"응, 너 분명히……."
"언제요?"
"저번에 그러지 않았……."
"제가요?"
"……."
"언제요?"
위소행이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로 빤히, 당당하게 청명을 응시했다.
"……크게 될 놈이네."
확 마.
물론 과거에 위소행은 본산에서 수련을 해 보는 것이 원이었다.
화영문을 이어야 했기에 본산의 제자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화산의 속가라고 자부하려면 한 번쯤은 본산에서 지내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죽어도 안 가!'
지금도 죽을 판이다.
청명이……. 아니, 화산이 화영문에 전수한 수련 방식은 너무 과격해서 화영문 제자들의 입에서도 곡소리가 나고 있었다.
문주인 위립산이야 화산이 떠나는 걸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지만, 직접 몸으로 구르는 화영문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제발 좀 가라.'
'문주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다 진짜로 안 가고 더 있는다 하면 어떡합니까?'
'어제 구른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런데 여기서 약한 모습 보이면 또 굴리려 들겠지.'
불과 한 달여의 시간 동안 화영문도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죽 한 그릇 못 먹은 몰골이 되었다.
심지어 수련 양이 화산 제자들의 오분지 일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뭐?
본산에서 수련을 해?
"도장님!"
"응?"
"저는 아버지를 돕고 싶습니다! 전 화영문의 귀신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아, 그래?"
청명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위립산을 보며 말했다.
"문주님."
"예?"
"화영문 적당히 정리되면 얘 화산으로 보내세요."
"……."
"제가 완벽한 화영문의 후계자로 특별 관리해서 돌려드릴게요."
"……그러겠습니다."
"아, 아버님?"
위소행이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위립산은 그런 아들의 시선을 깔끔하게 외면했다. 그리고 되레 청명을 보며 한 술 더 뜨는 게 아닌가.
"화산 속가를 이으려면 본산에서 수련을 해 봐야지요."
잠시만요?
아버지는 수련 받으신 적이 없…….
"그렇죠!"
청명과 위립산이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구세대의 야합을 지켜보는 위소행은 환장할 지경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에게는 이 야합을 막을 힘이 없는 것을.
"그럼 다음에 뵐게요."
"버, 벌써 가십니까?"
"화산까지 돌아가려면 서둘러야죠."
위립산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서안에 온 후 워낙 폭풍 같은 일들을 겪었다 보니 지난 시간들이 더없이 짧게 느껴졌다.
"문주님."
"예, 소도장."
"서안을 잘 부탁드릴게요."
화영문을 잘 이끌어 달라가 아니라 서안을 잘
'부탁한다.'
였다.
그건 위립산을 단순히 한 속가의 문주로 보지 않고, 한 지역을 맡아 줄 동료로 본다는 의미였다.
정말 그런 의미를 담아 한 말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위립산은 이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도장. 화영문은 화산의 속가요. 그 어디에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문파로서 화산의 이름을 빛내겠소이다."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헤헤. 그래 주시면 저희는 고맙죠."
위립산이 가만히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그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 화산은 기억할 겁니다.
과거 청명이 그에게 했던 말을.
- 화산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문주께서 지난 수십 년간 화산에 다한 정성은 반드시 보답을 받을 겁니다.
위립산이 시큰거리는 눈가를 누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구나.'
세상이 달라지고, 화산의 위상이 달라졌으며 덩달아 위립산 그의 입지도 달라졌건만. 청명만큼은 과거 화영문에 걸어 들어왔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 물론 다른 사람과는 달리 청명에겐 그게 꼭 좋은 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소도장."
"예?"
"……고맙소이다."
위립산의 말에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그 따뜻한 미소에 위립산의 가슴도 절로 훈훈해지…….
"그럼 상납금 좀 올려 주세요. 요즘 화산 재정이 답보 상태라."
……지는 않았다.
"……아니! 돈 많이 벌더만!"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한 거죠!"
"벼룩의 간을 내어 먹으시오!"
"이젠 벼룩이 아닌 것 같은데."
"일 없소이다."
위립산이 피식 웃었다.
"화영문이 조금 더 크면 그때 가서 이야기하십시다."
"그럼 열심히 커야겠네요."
웃어 버린 청명이 마침내 몸을 돌렸다. 이리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한도 끝도 없다. 괜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청명 역시 이곳을 떠나는 게 조금쯤 아쉽기 때문이리라.
"문주."
"예, 장로님."
"혹 우리가 없을 때 문제가 생기거든, 우선 은하상단과 상의를 하게나. 내 상단주께 잘 이야기를 해 두었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현영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준비를 마쳤다는 걸 확인한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자꾸나."
"예!"
이윽고 그들은 문도들의 배웅을 받으며 화영문을 나섰다.
"도장님들! 조심해서 가십시오!"
"감사했습니다!"
"가는 길에 평안하십시오!"
"다시는 돌아오지 마십시오!"
마지막에 뭔가 끼어든 것 같았지만, 굳이 따져 묻는 이는 없었다.
"그럼 다들 다음에 봬요."
화산의 제자들이 손을 흔들자 화영문도들도 격하게 마주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다.
"간다! 간다!"
"크흐흐흑. 너무 길었다."
"다시 오지는 않겠지?"
"해방이다! 해방이야! 으하하하하하핫!"
잃었던 나라를 되찾아도 이리 열렬한 반응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등 뒤에서 들리는 제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위립산이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썩을 놈들.'
그리고 내일부터는 화산 제자들이 굴리던 것보다 더 과격하게 이놈들을 굴려 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는 멀어져 가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아주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감사하외다."
아쉬움과 고마움이 뒤섞인 한마디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이렇게 가도 되는 거야?"
"뭘?"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천은 잠깐 주저하다 말했다.
"……뭔가 좀 일을 하다만 느낌이라."
"애초에 천년만년 머물 것도 아닌데, 뭐."
청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백천이 말하는 게 뭔지는 알고 있었다. 일을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화영문도들을 좀 더 가르치고, 그 아래 제자들을 지도하는 것 역시 조금은 더 손봐 주어야 한다.
하지만…….
"화영문은 화영문이야. 저들은 화산이 제구실하지 못할 때도 문파를 잘 운영해 왔어. 따지고 보면 화산보다 더 나은 문파지."
"음. 그렇긴 하지."
"우리가 더 간섭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야. 화영문의 일은 화영문이 한다. 화산의 속가는 먼 곳에서 화산의 일을 대신 하는 부하가 아니야. 스스로 하나의 문파로서 화산을 지탱해 주는 곳이지."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제는 멀어진 화영문을 바라보았다.
"위 문주는 훌륭한 문주님이야. 잘하실 수 있을 거야."
백천은 그런 그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청명이 어떤 사람을 이리 높이 평가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결국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유령문은?"
"화산으로 오라고 했으니, 그쪽으로 오겠지. 이건 장문인께 보고를 드려야 하는 일이거든."
"흐음."
백천이 기묘한 미소를 짓는다.
'이상한 데서 철저하다니까.'
평소에는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 대는 청명이지만, 장문인의 권한인 일에선 함부로 선을 넘지 않는다.
물론 너무도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백천은 그저 저 청명이 놈이 그 선을 지킨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럼 이제 진짜 화산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거로군."
"그렇지. 그런데……."
청명이 턱짓으로 관도를 막고 서 있는 이를 가리켰다.
"아직 하나 남은 모양이네."
"음."
백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화산의 행렬 앞을 막아선 이를 바라보았다.
남자명.
서월문의 문주이자 종남 속가의 대표와도 같은 그가 관도 한중간을 막고 선 채 화산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영이 가만히 남자명을 보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남 문주?"
"……떠나신다 들었습니다."
"그리되었소."
남자명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현영과 화산 제자들을 빤히 응시했다.
"그간 추한 꼴을 보인 것은 사실이외다."
"……."
"그리고 부끄러운 꼴을 보인 것도 사실이외다."
"그래서?"
"하나."
남자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 끝났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종남의 속가는 이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반드시 잃은 것을 되찾을 겁니다."
그 말을 가만 듣던 현영이 빙그레 웃었다.
"좋은 말이오."
"……무시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현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들이 잃은 것은 서안의 민심이오. 서안의 민심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낮은 자세로 협의를 이행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서안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테니 당연히 좋은 일이지."
"……."
"그리고…… 하나 기억해 두시오. 화산은 절대 다른 문파를 무시하지 않소. 그러기에는 긴긴 시간 우리가 받은 설움이 너무도 컸소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남 문주라면 이해할 것이오."
남자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영이 말을 이었다.
"화무십일홍이라, 모든 것은 언젠가는 쇠하기 마련이오. 하지만 쇠한다 해서 끝일 리가 있겠소? 겨울이 가면 언제고 꽃은 다시 피는 법이지."
가만히 현영을 바라보던 남자명이 천천히 옆으로 비켜나며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가만히 포권 했다.
"무운을."
그의 입장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을 것이다.
가볍게 마주 포권 해 준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자꾸나."
"예."
그들이 관도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남자명은 포권을 풀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작게 보일 때쯤에야 백천이 청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신기하네."
"응?"
"남 문주는 종남 속가 문주들 중 제일 지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는 사숙이 백자 배 중에 제일 나쁜 놈인 줄 알았어."
"……."
"근데 맞더라고."
"인마!"
농담에 발끈하는 백천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잖아. 진정으로 그가 어떤 이인지 알기 위해서는 밑바닥을 보는 수밖에 없어."
"……저 사람은 바닥만은 무인이었다는 거로군?"
"그럴지도 모르지."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젠가는 저 사람이 화영문에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종남이 봉문을 푼다면 종남의 속가도 다시 힘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고인 것은 언젠가는 썩기 마련이야. 아무리 화영문이라고 해도 편히 서안에 안주하다 보면 언젠가는 변하고 무뎌지겠지."
"무뎌지느니 함께 강해지는 게 낫다?"
"그렇지.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청명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과거, 청문이 그에게 말했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없애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물길이 방해가 된다고 물길을 틀면 언젠가는 수해가 닥치는 법이다. 그리고 숲이 방해가 된다고 불을 지르면, 언젠가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그저 두거라.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더냐. 그게 도고, 그게 삶이란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형.'
어설프게 그 말을 흉내 내긴 하지만, 그는 아직 청문이 도달했던 도(道)에는 닿지 못했다.
다만.
과거에는 그저 뜬구름처럼 느껴졌던 말들이 요즘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언젠가는…….
청명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저 먼 곳, 까마득히 멀게 보이는 희미한 봉우리를 쫓았다.
"돌아가자, 화산으로."
"그래!"
"응!"
화산의 제자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시각.
그 화산의 봉우리를 또 다른 이들이 바라보고 있음을, 이때의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