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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86화 (386/1,567)

386화. 죽어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죽겠다. (1)

화산.

방 안으로 모여든 이들이 장문인 현종에게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장문인. 서안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화영문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아 더는 제자를 받을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오오. 그게 언제 출발한 연통인가?"

"이틀쯤 전일 겁니다."

"하하하. 그렇구나. 그래."

현종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겼거늘.'

하기야.

어디 저 아이들이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에 쉬운 일이 있었던가?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한 일들을 척척 해결해 온 아이들이 아닌가?

"서안으로 옮긴 뒤로 지출이 많아 아직은 정해진 금액을 모두 채우기가 어려우나, 다음 달부터는 다시 일부분이나마 보내올 수 있을 것 같다 합니다."

"어디 돈이 중요하겠느냐? 저 서안에 화영문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그렇습니다."

현종이 슬쩍 서안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 안이니 벽에 가려 보일 리가 없음에도 말이다.

'애썼다.'

현영도 제자들도, 그리고 화영문도 다들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 청명이 놈을…….

아니지, 아니지.

청명이도 고생이 많았겠지. 분명…… 분명 고생이…….

'진짜 고생했을까?'

이거 고민을…….

"장문인?"

"아."

현종이 두어 차례 헛기침하고는 슬쩍 현상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 외에는?"

"전에 따로 말씀을 드렸지만, 만인방과 충돌한 일 말입니다."

만인방이라는 말이 나오자 부드럽던 현종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느냐?"

"혹시 몰라 그 이후에 혹여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따로 연락을 달라 했습니다만, 아직은 그런 기미가 없는 모양입니다."

"흐음."

현종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쉰다.

"만인방. 만인방이라……. 아직은 너무 이른 곳이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던 일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게지. 그놈들이 그리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닐 텐데."

"그런 놈들을 이겨 낸 것이 우리 아이들입니다.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과히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되어야 할 텐데.'

그의 시선이 운검에게 가 닿았다.

"운검아."

"예, 장문인."

"서안으로 아이들을 조금 더 보내 보는 건 어떻겠느냐? 혹여 만인방이 그 아이들을 다시 노린다면……."

"저는 반대입니다."

하지만 운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화산에 남은 아이들은 서안으로 간 아이들보다 실력이 조금 처집니다."

"그렇지."

"그러니 남은 아이들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수련을 하고 앞서는 아이들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사형제 간에 실력이 너무 벌어지게 되면 결국은 파벌이 나뉘게 되고, 자신감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파벌? 화산에? 청명이 앞에서는 모두 평등한 것 아니더냐?"

"……그렇긴 한데."

운검이 입을 다물었다.

정론을 이야기하는데 청명을 끌고 오는 건 반칙이 아닌가.

"여하튼 서안에서는 수련에 전념하기가 힘듭니다. 저는 이 기회에 남은 아이들을 더욱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현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많은 녀석 같으니.'

본디 스승이란 더 높은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더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운검은 오히려 노력만으로는 남들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썼다.

타고난 잔정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아이들 하나하나에 모두 정이 들어서인지.

현종은 그런 운검이 아이들의 스승이라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떠맡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불평 하나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성장도 놓지 않는다.

평범한 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안에 가 있는 아이들은 어디에서도 빠지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 만인방도 한차례 크게 화를 입었으니 신중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를 강화하고 조금 더 조심하라 이르겠습니다."

운검의 말이 끝나자 운암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 한마디 거들었다.

"이번 일은 저들이 서안으로 들어오리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개방에 부탁하여 만인방의 동태를 주시해 달라 하겠습니다. 그럼 괜찮지 않겠습니까?"

"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나."

현종이 깊게 미소 지었다.

'참 많은 것이 달라졌구나.'

과거 화산에서 벌어지는 회의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들끼리 없는 답을 찾아 고뇌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 화산은 그렇지 않다. 더 좋은 방향과 더 나은 선택을 위해 모두가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

이 모든 것이 화산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듣거라."

"예, 장문인."

"서안에 화영문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화산의 기틀은 모두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예."

"화산다운 화산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너희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 모두가 나를 도와주거라."

"물론입니다, 장문인!"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현종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즐거움이고 행복이겠지.'

물론 여전히 걱정스러운 구석은 있다.

'세상이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길이 있다면 화도 있는 법.

언젠가는 화산에도 지금 얻은 복만큼의 화가 닥칠 일이 있을 것이다.

다만 현종은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늦어지길 바랐다.

"무량수불."

모두가 조금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 * *

"다들 모였나?"

차갑고도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일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십니까?"

"군사님 앞이다.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그나마 멀쩡한 한쪽도 마저 찢어지고 싶지 않으면."

그 말에 입 한쪽에 긴 흉터가 있는 사내가 스산하게 고개를 돌렸다.

"오호라. 독혈수(毒血手)께서 소화가 잘 안 되시는 모양이로군. 배에 구멍이 뚫리고 싶어서 발악을 해 대시는 걸 보니 말이야."

"아가리 닫으라고 했다."

"호오?"

독혈수라 불린 이가 싸늘하게 일갈하자 흉터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메웠다.

그런데 그때.

"계속해 봐."

만인방의 군사 호가명이 고저 없는 말투로 말했다.

"방주님께서 하명하신 일을 하기도 전에 너희들끼리 싸움을 벌였다고 보고하면 그만이니까."

"크흠."

"음."

방주라는 말이 나오자 살기를 뿜어내던 사내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는 크게 헛기침했다.

호가명이 말했다.

"손월(孫越)."

"말씀하시오."

탈명단창(奪命短槍) 손월이 입맛을 다시며 대답한다.

"방주님의 명을 전하는 자리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예이."

손월이 손을 들어 입가에 난 흉터를 살짝 어루만졌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저 행동이 그가 살심이 끓어오를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진 않았다.

"그리고 독혈수."

"예."

"함께 임무를 수행할 사이다. 쓸데없이 자극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잠잠해진 둘을 가만 바라보던 호가명이 물었다.

"야도(野刀)는 어디에 있나?"

"조금 늦었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내가 전각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몸에 바짝 붙은 무복 위에 짐승의 모피를 입은 그는 허리에 커다란 도를 도집도 없이 차고 있었다.

호가명이 차가운 눈으로 세 사람을 보았다.

"이야기는 들었겠지."

"무슨 이야기? 적사도 그 병신이 화산 놈들에게 사지가 잘려 진짜 병신이 되었다는 이야기?"

탈명단창 손월이 히죽 히죽 웃어 댔다.

동료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논하고 있음에도,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일말의 연민조차 비치지 않았다.

"적사도니 뭐니, 허명을 얻고 제멋대로 날뛸 때부터 언젠가는 그 꼴이 날 줄 알았지."

내내 그와 부딪치던 독혈수마저 거들었다.

"동료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하지만 그 내용은 동감한다."

야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화산파라면 과거의 구파일방이었던 그 화산파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그 화산에 적사도를 상대할 이가 있었다는 건가?"

그의 물음에 호가명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정검이라는 화산의 이대제자에게 패했다더군."

"……그거 참 놀라운 소식이군. 여러모로."

세 사람이 동시에 미간을 눈살을 찌푸렸다.

적사도 엽평은 분명 이들보다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니다. 강호의 명성과 실제 실력에는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적사도 엽평은 아주 전형적인 예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사도 엽평이 무시해도 될 만한 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애송이에게 당할 자는 아니었다.

"방심했군."

"그럼 죽어야지."

야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송이를 상대할 때는 그게 문제란 말이야. 방심하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방심하게 되지."

호가명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방심하는 건 너희 멋대로 해라. 다만 그럴 거면 반드시 죽어라. 살아 돌아오면 너희는 방주님의 진노를 오롯이 감당해야 할 테니까."

"……명심하겠소."

방주라는 말이 나오자 세 사람은 어김없이 동시에 움츠러들었다.

패군 장일소.

만인방에게, 아니, 사파는 물론이고 강호에 몸을 담은 모든 이들에게 패군의 이름은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밑에서 벌써 수십 년을 버텨 온 이들조차도 패군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저 작아질 뿐이다.

"쯧쯧. 그나저나 방주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릴 모두 부르다니."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채주 한 놈 정도는 목을 잘라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네 목이 날아갔겠지."

또다시 슬금슬금 싸움의 기미가 보이자 호가명이 눈을 찌푸린다.

"사담은 나중에 해라. 어차피 섬서까지 가는 길에 지겹도록 보게 될 테니까. 너희에게 내릴 명은 하나다. 각 대를 이끌고 화산으로 가라. 그리고 그곳의 개미 새끼 한 마리 살려 두지 말고 모조리 죽이고 전각에는 불을 질러라. 우리는 화산이라는 이름을 강호에서 완전히 지운다."

"……그렇게까지?"

가장 여유로워 보이던 탈명단창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화산이 구파에서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정파일 텐데. 그런 곳을 지워 버리고 뒷감당이 되겠소이까?"

"상관없다."

호가명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차피 구파일방 놈들은 화산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적당히 생색이야 내겠지만, 화산의 복수를 위해서 우리와 본격적으로 싸우려 들 곳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일이라는 게……."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그는 처음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려 드는 이가 있다고 해도 나쁠 것 없지. 슬슬 굳은 세력도를 바꿔야 할 시간이니까."

탈명단창은 더는 따져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님의 지시겠지?"

"그렇다."

"그럼 따라야지."

이곳의 모두는 알고 있다. 저 패군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분명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런데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독혈수가 입을 열었다.

"고작 화산을 상대하는데 세 개의 대나 가야 한다는 말이오? 아무리 적사대가 당했다지만……."

"세 개의 대가 아니다. 이번 일에는 흑조단(黑爪團)도 함께한다."

"……제정신이겠지?"

"물론."

그 말과 함께 그들의 등 뒤에서 검은 붕대로 전신을 휘감은 사내가 휘적휘적 다가왔다.

"……흑시(黑豺)."

세 사람이 모두 눈을 찌푸리며 흑시라 불린 이를 돌아보았다.

만인방의 군사 호가명 앞에서도 딱히 저어할 것 없어 보이던 이들이지만, 흑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은근한 두려움과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흑조단까지……."

"방주님의 의지다."

호가명이 싸늘하게 이의를 잘랐다.

"그러니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화산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마라."

"존명."

명이 떨어지자마자 흑시가 가장 먼저 몸을 돌려 전각을 빠져나갔다.

남은 세 사람도 고개를 슬쩍 숙인 뒤 전각을 나섰다.

"방주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로군."

나가는 길, 야도가 슬쩍 말을 꺼내자 탈명단창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목이 달아날 판이군. 화가 난 방주님은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탈명단창이 간지럽다는 듯 목을 벅벅 긁어 대었다.

"실수는 없다."

독혈수가 이를 슬쩍 악물며 말했다.

"일말의 방심도 없이 화산을 지운다. 그 외에는 생각할 것도 없다."

"크흐. 간만에 피 맛 좀 보겠군."

"화산까지 길어야 나흘인가. 늦지 마라."

"왜? 내가 없이는 겁나나?"

"죽일 놈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거라면 늦어도 된다."

"그건 안 되지."

세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고는 각자의 방향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모두가 각자의 대를 이끌고 섬서로 향할 것이다.

섬서의 화산.

그 가파른 봉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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