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귀신이면 죽고 사람이면 뒈진다. (5)
"흐으으으으응."
누가 들어도 기분 좋을 만한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콧소리를 듣는 이들 중 진정으로 이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청명의 손끝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문양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취를 깎아 만든 듯한 녹빛의 물건은 빛을 받을 때마다 다른 색을 내뿜었다.
"그……."
그 모습을 보며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계형이 슬그머니 청명을 향해 다가갔다.
"도, 돌려주십……."
"동작 그만."
움찔.
"물러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형이 뒤로 화들짝 물러났다.
"앉아."
착.
"손……."
"에라이! 이 미친놈아!"
뻐엉!
백천이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청명을 걷어찼다. 공처럼 뻥 날아간 청명이 허공에서 회전하여 바닥에 착 내려섰다. 그리고 잔뜩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똥개 훈련시키냐?! 이 새끼야! 사람한테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지!"
"재밌잖아."
"끄으으응. 저놈이 정말……."
백천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고개를 돌려 계형을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나라 잃은 충신 같은 얼굴로 망연자실 주저앉은 계형을 보고 있자니 측은지심이 절로 샘솟을 지경이었다.
세상에 일이 꼬여도 정도가 있지.
하필이면 저 악마 같은 놈에게 장문령부가 넘어가다니.
이건 정말 참사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멋모르고 그 참사를 만들어 내는 데 동참한 화산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는 죄책감에 신음했다.
"후후후후후."
하지만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명은 손에 든 장문령부를 보며 피식피식 웃어 댈 뿐이었다.
'이게 뭐라고.'
장문령부.
이런 돌조각 하나가 한 문파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게 참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현실인 것을.
'이게 다 사람이 문제여서 생긴 일이지.'
온갖 시험과 꾸준한 평가.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인적성 검사를 하며 고르고 골라 뽑은 장문도 자신을 막을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눈이 돌아가 버리곤 한다. 심지어 비일비재하게.
화산처럼 장로들이 장문인을 어떻게든 뜯어말릴 수 있는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문파, 특히나 규모가 작은 문파일수록 장문인의 권위는 장로들은 씹어 먹기 마련이다.
그리되면 결국 견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 폭주하는 사태가 거의 필연적으로 벌어진다.
그 사태를 막기 위해 만들어지는 게 장문령부다.
대부분은 원로원 등, 장문인을 견제할 수 있는 곳에 두어 권력을 잡은 장문인이 이성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물건인데…….
'의도는 좋지. 의도는.'
하지만 좋은 의도로 만들어 놓은 물건을 좋지 않은 의도로 쓰는 것이 인간의 오래된 습성 아니던가?
만들어진 의도가 뭐든, 일단 이 물건은 들고 있는 것만으로 각 문파, 문도들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쥘 수 있다.
즉,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는 '보물'이다.
그러니 이제 와선 결국 각 문파의 장문인들이 그걸 쥐고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유령문의 보물이 지금 청명의 손에 있었다.
"쩝."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장문령부를 얻은 건 좋은데……. 뭔 문파가 거지도 아니고, 창고에 이거 말고는 돈 될 만한 게 없냐?"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계형이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 거지발싸개로도 안 쓸 인간 같으니.'
뭐?
남의 문파 장문령부를 낄낄대며 강탈해 놓고는 뭐?
돈?
도오오온?
'하늘도 무심하시지.'
유령문이 대체 뭘 했다고 이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인가?
유령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령문처럼 선량하게 살아온 문파도 많지 않을 텐데.
착하게 살면 복을 준다는 말은 다 거짓부렁이다.
"그래서."
"……예."
청명이 장문령부를 한 손으로 까딱까딱 흔들면서 계형에게 물었다.
"억울해?"
"……."
그걸 말로 해야 아냐? 말로 해야?
"근데 억울할 것 없잖아. 따지고 보면 장문령부를 이런 데다 처박아 놓고 관리 안 한 너희 잘못이지. 말이야 바른 말로, 대체 어느 문파가 장문령부를 이따위로 관리하냐?"
소림의 장문령부인 녹옥불장은 소림의 방장 손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방장이 녹옥불장을 내려 둘 때는 소림의 가장 심처에 있는 달마동에 보관하며 그 주위를 소림의 나한들이 철통같이 지킨다.
호위 하나 없는 곳에다 장문령부를 처박아 두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이건 빼앗겼다 해서 억울하다 남탓할 일도 아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야 당연히 있겠지. 그리고 이제는 다시 장문령부가 필요한 일이 생겼겠지. 그렇지?"
"그렇습니다."
계형이 모든 걸 놓아 버린 듯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가 그 사정까지 알아줘야 할 이유는 없고."
청명이 장문령부를 손에 쥐고 약 올리듯 계형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어떻게 할래?"
"……예?"
"나도 한 고생이 있는데 이걸 공짜로 돌려주기는 그렇잖아?"
계형이 눈을 부릅떴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돌려준다?
그래도 저 마귀 같은 놈이 진짜 마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돌려주기는 할 모양이네!
하지만 그의 가슴에 확 들어찼던 희망은 청명의 다음 말이 나오는 순간 거품처럼 사라졌다.
"얼마 낼래?"
"……네?"
"얼마 줄 거냐고."
"……."
청명이 턱짓으로 깊게 파인 구덩이를 가리켰다.
"그래도 우리가 이거 파면서 들인 노동력이 얼만데. 쟤들이 생긴 게 맹해서 그렇지, 사실은 엄청 고급 인력들이거든."
"생긴 게 맹하다니!"
"지는 얼마나 잘생겼다고!"
"백천 사숙이 있는데 네 얼굴로 그딴 말을 해?"
순간적으로 비난이 폭주했지만, 청명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봐 봐. 나도 나름 원시천존을 모시는 도사란 말이지. 남의 문파 장문령부를 그냥 꿀꺽하기는 양심에 찔려서 말이야."
"양심? 저놈이 지금 제 입으로 양심이라는 말을 한 거냐?"
"에이. 설마요, 사숙.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잘못 들으셨겠죠."
"근데 이 새끼들이 아까부터?"
청명이 눈을 부라렸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되레 배를 쭉 내밀면서
'뭐. 뭐?'
하고 외쳤다.
"……."
아, 저것들 머리가 너무 굵어졌네.
날 한번 잡아야…….
여하튼.
"그래서."
청명이 계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얼마 낼래? 적당한 액수면 좋게 좋게 보내 줄 수 있는데."
"……돈이요?"
"응."
"그게…… 말씀드리기 참으로 민망합니다만……."
"응?"
"지금 유령문은 개방보다 가난하다고 확신합니다."
"엥?"
생각지 못한 말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말이나 돼? 천하제일의 신법을 가지고, 천하제일의 은신술을 가진 문파가 돈이 없다고? 도둑질만 해도 떼돈을 벌겠구만!"
"저희는 도둑질 같은 건 안 합니다!"
계형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유령문이 한창 활동하던 당시에, 강호에서 뭐만 없어졌다고 하면 다 우리가 한 짓이라고 몰아가는 놈들이 있어서 다들 도둑질이라면 학을 뗍니다."
"……아."
그거 슬픈 이야기긴 한데…….
"아니, 그럼 그렇게 처입고 유령 행세를 하질 말든가!"
"무, 무공 자체가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그따위로 희끗대면서 알짱거리면 공자님도 너희들부터 의심하겠다!"
"어, 억울합니다."
계형은 정말로 억울한 듯 가슴을 치며 항변했다.
"저희는 나름 깨끗하게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무학 때문에 시체를 부린다느니, 귀신들이 모인 문파라느니!"
"……."
"겉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다들 그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도장께서도 조금 전까진 도둑질만 해도 떼돈을 벌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어……. 미안하다."
움찔한 청명이 곧장 사과했다.
"……정사지간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저희 유령문은 지금까지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산 적도 없단 말입니다. 도우면 도왔지! 그런데 사람들은 죽어도 우릴 정파로 봐 주지 않습니다."
계형은 금방이라도 술 한 잔 때려 박을 듯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힘내세요."
"알고 보니 좋은 분들이셨네."
"청명이가 나쁜 놈이네."
"시끄러워!"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계형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말이나 돼? 신법은 뒀다가 국 끓여 먹냐?"
"물론 저희의 신법은 천하일절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그걸……."
"그런데 그것도 누가 일을 맡겨 줘야 써먹을 것 아닙니까."
"……."
"가만히 있어도 도둑놈 소리를 듣는 판에, 누가 저희한테 의뢰를 하겠습니까.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 것도 아니고."
"……."
이상하다.
왜 눈가가 시큰하지.
뭔가 듣다 보니 예전 다 망해 가던 화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괜스레 감정이 이입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돈이 없다고?"
"……먹고 죽을 돈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가난한 문파였는데, 최근 문주를 새로 뽑는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전대 문주께서 후계자 둘 중 하나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급사해 버리시는 바람에."
"전쟁이 났군."
"……그리 큰 규모는 아니라 전쟁이라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여하튼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 다툼이 이제야 끝났고요."
"그래서 장문령부를 회수하러 왔다?"
"예. 결과가 나기 전 장문령부가 모습을 드러내면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흐으으음."
청명은 살짝 복잡한 얼굴로 무영귀 계형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아니지?"
"정말입니다. 저희는 나름 협의를 지키려는 문파입니다. 제가 최근에 저지른 잘못이라고는 배가 너무 고파서 여기 부엌에 있던 고기 몇 점 주워 먹은 것밖에는……."
"……용서해 줄게."
"감사합니다."
청명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돈이 없으면 안 되는데.'
건수 하나 제대로 물었다 싶었는데, 이래서야 고생만 한 꼴이 아닌가?
게다가 저놈들을 핍박하기에도 뭔가…….
'이상하게 순박하단 말이지.'
따지고 보면 저놈이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귀신 행세를 했을 뿐. 혼자 다니는 화산, 화영문 제자를 공격한 적도 없잖은가?
물론 청명에게 달려들기는 했지만, 뭐……. 한 대 때려 보지도 못하고 신명나게 처맞기만 했으니 그것도 잘못이라기에는 뭐하고.
결과적으로는…….
'이것도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건데.'
청명이 장문령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돈 없는 문파의 장문령부를 대체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쟤들이 센 것도 아니고. 한번 붙어 보니 신법과 보법을 제외하고는 형편없었다. 그러니 문파가 돈이 없…….
"잠깐."
청명이 돌연 획 고개를 들어 계형을 바라보았다.
움찔.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을 본 계형이 아, 뜨거라 몸을 움츠렸다.
"돈을 벌기 싫은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요. 세상에 돈 싫어하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무공이 우선이라지만, 입에 풀칠할 돈이라도 있어야 무학도 익히지요. 소도장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호오……."
청명이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의 신법을 가진 문파가 돈을 벌 수단이 없어서 가난하게 산다 이 말이지?
이윽고 청명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내걸렸다.
"야."
"……예?"
"너희 장문인 데리고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
"……정확하게는 지금 유령문의 문주 자리는 비어 있고, 장문령부를 회수해 가면 새 문주가 선출됩니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그 새 문주 될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리겠냐?"
"그야……."
계형이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금세 대답했다.
"아무리 늦어도 열흘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좋아!"
청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람한테 가서 장문령부 돌려받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해. 오는 길에 너도 같이 오고."
"……도, 도장님! 저 이대로 돌아가면 맞아 죽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가서 이 말 한마디만 전하면 안 맞아 죽을 거야."
"……한마디요?"
청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떼돈 벌게 해 줄 테니까,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고 해."
"……떼돈…… 말씀이십니까?"
"아암. 그냥 돈 아니지. 떼돈이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계형을 보며 청명은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없어 본 놈들은 돈 앞에선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청명이 딱 그러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슬슬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 시점이었는데.'
- 전 중원 열흘 내 배송 가능. 귀신같이 가져다드립니다. -
이건 먹힌다!
반드시 먹힌다!
조금 전까지는 그냥 조금 예쁜 돌덩어리처럼 보였던 장문령부가 이제는 금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유령표국이라. 낄낄낄낄. 이거 진짜 괜찮을 것 같은데. 으히히히힛!"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자지러지는 청명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불안에 떨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제발 사람답게 살자, 청명아.'
청명이 일을 벌이면 그 수습을 하는 건 늘 백천과 그 일행들이 아니던가.
또다시 고생이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에 모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