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384화 (384/1,567)

384화. 귀신이면 죽고 사람이면 뒈진다. (4)

"……."

"……."

화산의 제자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

전신을 두르고 있는 유백색의 무복은 사람의 것이 분명하지만, 얼굴은 사람의 그것이라 말하기 조금 애매해졌다.

'두 배는 부풀었네.'

'찐빵 같다.'

'얼마나 맞았으면.'

살짝 안쓰러운 얼굴로 얻어맞은 이를 보던 백천이 나지막이 헛기침을 했다.

"크흐흠. 그러니까……. 유령문이라는 곳의 문도시라고요?"

"……눼."

"유령문이라면……."

백천이 잠깐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 봤냐, 조걸아?"

"저는 처음 듣는데요."

화산의 제자들이 살짝 민망한 얼굴로 사내를 다시 응시했다.

"저……. 죄송하지만 저희가 식견이 짧아서."

퉁퉁 불어 보라색이 되어 버린 사내의 얼굴에 뭔가 억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청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유령문이라고?"

"넵."

"그런 데가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내가 들었던 건, 어…… 신법이 무척이나 뛰어나 강호일절이며……."

"맞네."

"기척을 숨겨 유령처럼 날아다니는……."

"맞네."

청명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치하네."

듣고 나니 왜 먼저 알아채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사실 귀로만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별개의 문제니 그럴 만도 하지만 말이다.

진지한 얼굴로 듣던 백천이 그에게 물었다.

"사파냐?"

"사파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고, 굳이 따지면 정사지간이라고 봐야 하는데……."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봐야 귀신이지."

"사람이잖아."

"그럼 도적놈이고."

유령문도가 억울함을 표하려 노력했지만, 부어터진 얼굴은 도무지 그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백천은 살짝 당황한 듯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유령문도를 바라보았다.

"여튼 그렇구나. 그럼 어……. 으음. 어……."

잠시간 머뭇거리던 그는 겸연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죄송하지만, 배분이 어떻게 되시는지? 지금 얼굴이 너무 자유분방하셔서 연배를 짐작하기가 좀 어려운데."

"……."

유령문도가 서글픔에 눈을 질끈 감았다.

'호락호락한 놈이 없구나.'

이 새끼는 멀쩡하게 생겨서 사람이 제일 열받을 말을 골라서 해 댄다.

"……불혹은 넘겼소."

"그럼 선배님이시군요."

"……이 마당에?"

유령문도의 입에서 살짝 뚱한 말이 나오자 청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덜 맞았나?"

청명이 다시 삽을 움켜잡자 유령문도가 새파랗게……. 아니, 원래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얼굴로 덜덜 떨며 물러났다.

"죄, 죄송합……."

"걸아."

백천이 말했다.

"예, 사숙."

"저 새끼 입에 당과 좀 물려라. 또 시작이다."

"예."

조걸이 청명을 질질 끌고 갔다.

양팔을 잡힌 채로 끌려가면서도 청명은 눈을 부라리며 내내 소리를 질러 댔다.

"대답 잘해라! 성불시켜 버리기 전에!"

백천은 골이 지끈거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유령문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신 겁니까?"

"그, 그게……."

유령문도가 끌려가는 청명을 힐끔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유령문의 12대 제자인 계형(桂炯)라 합니다. 강호에서는 무영귀(無影鬼)라 불리고 있습죠."

그러자 순순히 끌려가 주던 청명이 조걸을 뿌리치고 다시 다가왔다.

"유령문을 아는 놈도 없는데, 별호는 잘도 붙었네?"

"……."

백천이 조걸에게 눈짓하고는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십시오. 저놈은 원래 저럽니다."

"……."

"도둑놈 새끼한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계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죽여라, 이놈들아.'

하나는 욕을 하고, 하나는 위로를 하니, 입으로는 당근이 들어오는데 엉덩이로는 채찍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한다는 말인가.

화산 놈들이 이리 악독할 줄 알았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달아났을 것을.

"계 대협이셨군요."

"……대협은 제게 과분한 말입니다. 그냥 무영귀라 불러 주십시오."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그럼 계 공이라 부르겠습니다. 아무튼…… 계 공께서는 어찌?"

"그게……."

계형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여러분이 전각을 지은 이곳은 저희 유령문의 지부 중 하나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가(安家)라고 해야겠지요."

"……안가요?"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가라는 말은 그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살수나 도적들처럼 신분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이들은 '안가'라는 이름의 은신처를 곳곳에 만들어 두고 일이 있을 때마다 몸을 숨긴다고.

"여기가요?"

"예."

"……여기요?"

계형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무, 물론 좀 당혹스러우시겠죠. 여기에 안가가 있는 게 좀 이상하니까요."

"……그렇죠."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서안 성내에 가장 번화한 곳에다가 은신처를 만든다는 말인가?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이, 이 안가는 벌써 만들어진 지가 이백 년이 넘었습니다. 그때는 서안이 이리 번화하지도 않았고, 이쪽으로 관도가 나 있지도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게 오래된 곳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종이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럼 전에 폐가에서 귀신이 출몰했다는 게?"

"……예. 저희들입니다."

"……."

화산의 제자들이 뚱한 시선에 계형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애초에 이곳은 저희가 지어 둔 전각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서안의 시가지가 이백 년에 걸쳐 슬슬 넓어지더니 좌우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에는 비어 있는 전각이니 어쩌니 하면서 제멋대로 점거를 시작하는데……."

"실제로 비어 있었던 것 아닌가요?"

"……그렇지요."

계형이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저희가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주인이라고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어디 한두 번이지."

백천이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귀신 행세를 하며 사람들을 몰아낸 거군요. 귀신이 나오는 폐가라는 소문이 돌면 사람들이 이곳에 살려 하지 않을 테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저희의 무학은 그런 행세를 하기에 더없이 적합한지라."

"……그렇지."

"진짜 귀신인줄 알았으니까."

"그 정도면 그냥 귀신으로 인정해도 될 정도지."

희뿌연 무언가로 뒤덮인 형체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다니는데 귀신이 아니고 뭐라 생각하겠는가? 더구나 그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계형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생각은 나름 잘 먹혔고, 실제로도 그동안은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여 이번에도 관리를 위해 서안에 왔더니……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게 힘들게 관리해 온 폐가는 온데간데없고……."

"……하필이면 도관을 쓴 도사 놈들이 우글우글."

"그것도 칼 든 도사 놈들이."

"입장 바꿔 생각하니 지옥 같네."

여기저기서 나오는 공감에 계형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 여러분들 앞에서 이리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 도사들이 최근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화산파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그게 참, 차마……."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뭔가 잘못한 건 없지만,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그래서 일단은 어떻게든 예전처럼 귀신 행세를 해서 사람을 쫓아내 보려고 한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그제야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러게요. 누굴 해친 것도 아니고, 그냥 귀신 행세를 하며 놀라게 한 것뿐인데."

"저지른 잘못에 비해서는 과도하게 얻어맞았지."

"과도하게."

"응. 과도하게."

계형에게로 안쓰러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그 동정 어린 눈길에 계형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독한 놈을 만났다는 말인가?

"됐고."

하지만 그 독한 놈은 계형의 그런 사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너희 집이다?"

"그, 그렇습죠."

"증거 있어?"

"……예?"

청명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가 너희 전각이라는 증거 있냐고?"

"……증거요?"

계형이 눈을 뻐끔거렸다.

"아, 아니 증거라는 게……."

본인들의 것임을 숨기기 위해서 폐가로 만들기까지 했는데 증거랄 게 있겠는가?

"우리는 이거 샀어. 집문서도 있다 이 말이지."

"그, 그게."

"그리고."

청명이 씨익 웃으면서 파헤쳐진 구덩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원래 그 땅에서 나온 물건은 다 그 땅 주인 거야. 그게 법이지."

"네?"

"저건 이제 우리 거야."

청명이 더없이 화사하게 웃었다.

"억울하면 관아에 가서 따지시든가."

"……."

계형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러다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저기……."

"뭐?"

"무, 무림의 일을 속가의 법으로 따지는 게 그게 좀……."

"무림인은 백성 아닌가? 이거 큰일 날 양반이네?"

"……그, 그게……."

계형이 당황하여 항변한다.

"저, 저기 저 밀실이 있잖습니까. 제 말대로! 그럼 증명이 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그게 어떻게 증명이 돼. 우리가 먼저 파고 나서 네가 왔는데."

"……."

"너희 집 바닥에서 금궤가 나왔는데, 내가 거기 가서 내가 묻어 놓은 거라 우기면 내 게 되나?"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쏟아지는 궤변에 계형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됐고."

청명이 싱긋 웃었다.

"어쨌든 저건 우리 거니까. 긴말할 것 없이 장원에서 나가. 한 번만 더 기웃거리면 그때는 정말 성불시켜 버릴 테니까."

"이, 이런 법이 어딨……."

"남의 집에 와서 귀신 행세를 해 사람 쫓아내는 법은 있냐?"

계형이 움찔 몸을 떨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기분 안 좋았으면 넌 진짜 유령 됐다."

청명이 그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치고, 돌아서는 그 순간이었다.

"거, 거기에는 보물이 없소."

뚝.

청명의 몸이 그 자리에 우뚝 굳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목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뒤쪽으로 꺾였다.

"……뭐?"

계형이 유령 흉내를 낼 때보다 몇 배는 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청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히익!'

기겁을 한 계형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재, 재물! 그러니까 재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이거요! 다른 게 있……."

"그래?"

청명의 얼굴이 다시 눈 녹듯 화사하게 풀렸다.

"에이, 그게 뭐 중요하나. 그걸로 돈만 벌 수 있으면 그게 보물이지. 그래서 저 안에 뭐가 있는데?"

"그……."

계형이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인다.

그러자 청명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거참 답답하게 구네. 이러면 내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볼 수밖에 없잖아. 어차피 결과는 같은데 서로 힘 빼지 말자고."

그 말에 계형이 모든 걸 포기해 버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령부입니다."

"응?"

"장문령부입니다. 저 창고 안에는 유령문의 장문령부가 들어 있습니다."

"……어?"

천하의 청명도 이번에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장문령부?"

"……예."

"그러니까. 그게 문파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장문인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문령부?"

"예."

"상황에 따라서는 장문인보다 오히려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그 장문령부?"

"……그렇습니다."

"그게 저기 들었다고?"

계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사실 절대 발설되어선 안 되지만, 어차피 그에게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을 힘이 없었다.

저 악귀 같은 놈은 어떻게든 저곳을 열어 뒤져 볼 테니까.

"그게 왜 여기에 있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합니다. 그게……."

"복잡하면 됐어. 설명하지 마."

"……."

그럼 왜 물었는데, 이 새끼야?

"흐음. 그러니까 저 안에 장문령부가 있단 말이지?"

"예. 유령문에는 더없이 중요한 물건이니 부디……."

"장문령부가……."

"……예?"

청명의 입꼬리가 실실 말려 올라갔다.

"그러니까, 지니기만 하면 장문인과 동급의 명령권을 가질 수 있는 장, 문, 령, 부가 저 안에 있다 이 말이렷다?"

"……."

"그래? 헤헤헤헤. 그렇다고? 에헤헤헤헤헤헷!"

"……."

너무도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청명이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낀 계형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넌지시 그를 불렀다.

"그, 소도장?"

"아니지."

"……예?"

청명이 어깨를 쫙 펴더니 더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계형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장문령주(長文令主)라고 불러야지."

"……."

"앞으로 잘 부탁한다. 헤헤헤."

뭘 부탁해, 이 미친놈아…….

진짜 답도 없네, 진짜…….

간신히 버티고 있던 계형이 끝내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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