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귀신이면 죽고 사람이면 뒈진다. (1)
화려하기 짝이 없는 공간.
자색(紫色)으로 칠해진 기둥과 방 이곳저곳을 장식한 질 좋은 비단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안을 채운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장식품들은 이곳에 있는 이가 얼마나 부유한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특이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건 따로 있었다.
커다란 옥좌가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화려한 계단 위, 옥좌 대신 너른 평상이 놓여 있었다.
물론 이 역시 값비싼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미묘한 위화감을 가져오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너른 평상 위에 한 사내가 턱을 괴고 누워 있었다.
이 사내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전신에 두른 순백의 장포에는 황금용이 수놓아져 있고, 소매 아래로 삐져나온 손에는 형형색색 보석이 박힌 반지들이 열 손가락 모두 빼곡하게 끼워져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곱게 틀어 올렸고, 순백의 관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요란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지만, 이 사내의 면전에서 비웃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이 사내가 바로 천하를 뒤흔드는 만인방의 방주인 패군(覇君) 장일소(長一笑)이기 때문이다.
"흐으음."
장일소가 살짝 지루한 듯 목소리를 흘렸다. 화려하게 치장된 외양에 어울리게, 그의 눈빛에선 짙은 나른함이 묻어났다.
"그래서?"
"바, 방주……."
방승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적사도 엽평의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던 그가 염왕(閻王)이라도 만난 것처럼 전신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려 대었다.
"종남이 봉문 한 서안에 들어가서, 복날의 개처럼 얻어맞고 쫓겨났다?"
"그, 그게…… 거, 거기에 화산이 있을 줄은 저희도……."
"아니겠지."
장일소는 심드렁하게 방승의 말을 잘랐다.
"네가 아무리 멍청하다고는 해도, 서안에 화산 놈들이 들어와 있다는 걸 모를 수는 없지. 그저 화산 놈들이 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렇지 않니?"
"그, 그렇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방승이 기겁을 하며 바닥에 이마를 바짝 붙였다. 덜덜 떨리는 등이 그가 얼마나 큰 공포에 질려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장일소가 느릿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럴 수 있지."
장신구 부딪치는 소리가 절그럭 울렸다.
"판단은 나쁘지 않았어. 그래, 판단은 나름 나쁘지 않았지. 나라도 그 상황에서는 서안으로 들어가 봤을 거야. 거기까진 좋은 판단이었지."
"가, 감사합니다, 방주님."
"그런데 있잖아."
장일소가 천천히 그 몸을 일으킨다.
평상에 걸터앉는 그 가벼운 움직임에 순백의 장포가 물결을 치고, 사이로 언뜻언뜻 붉은 무복이 드러났다.
"다음이 문제지, 다음이."
장일소가 미소를 지었다.
선을 그어 놓은 듯 가느스름해진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서안으로 들어갔다가 화산의 애송이들에게 얻어맞고…… 저 머저리 놈은 사지 근맥이 잘린 걸로도 모자라 단전까지 꿰뚫렸다?"
"그, 그게……."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장일소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런데 말이야. 나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방승."
"예! 방주님! 예!"
그리고 가만히 방승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왜 아직 살아 있어?"
"……."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무람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 얼핏 들으면 친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덕담같이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방승의 몸은 얼음 굴에라도 내던져진 듯 식어 가기 시작했다.
"바, 방주……."
"아,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어렵지?"
저벅.
장일소의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걸음이 마치 산보라도 하는 듯 느긋했다.
"적사대가 내게 허락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그만한 성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나는 지금까지 어떤 일로도 너희를 탓한 적이 없는 거란다. 그렇지 않아?"
"그,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게 위대하신 방주님의 은총……."
"하지만 모든 권한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장일소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화사하기 그지없는 그 미소에서 그가 가진 악의(惡意)를 읽을 수 있는 이가 천하에 몇이나 되겠는가?
장일소의 또 다른 별호가 소리장도(笑裏藏刀)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제멋대로 서안으로 들어가 아직 영글지도 않은 놈들에게 대패를 당하고도 얼굴을 들고 돌아왔단 말이지?"
"바, 방주님! 하지만 저, 저는 어떻게든 대주를 이곳으로 옮겨 와야 했습니다!"
쿵! 쿵!
방승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마를 타고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그냥 두었더라면 대주께서는……."
"죽었어야지."
방승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담담하면서도 싸늘한 장일소의 목소리가 방승의 심혼을 파고들었다.
"천하의 적사도가 무명(武名)도 없는 애송이에게 창피를 당할 바에는 거기서 죽었어야지. 그럼 이름이라도 지켰을 텐데. 그렇지?"
"……그, 그건."
"그리고 그리 죽었다면 적어도 만인방이 화산에 몰매를 맞고 서안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은 돌지 않았을 테지. 차라리…… 차라리 모두 죽었으면."
장일소의 목소리에 한기가 어렸다.
"그런데 너는 왜 살아 있어? 그 굴욕을 당하고, 병신이 된 놈과 같이 거기서 죽었어야지. 그리고 죽지 않고 달아났다면……."
목소리를 높이던 장일소가 살짝 눈을 감았다.
그 눈이 다시 느릿하게 뜨였을 땐, 장일소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서 쥐 죽은 듯 살았어야지. 방승아, 방승아. 똑똑한 척 제 머리만 믿고 살더니, 왜 이리 어리석게 굴어, 이 녀석아. 응?"
저벅. 저벅.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장일소가 바닥에 바짝 붙은 방승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무서웠구나?"
"바, 방주."
우드드득.
장일소의 발이 방승의 손을 짓밟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지만 방승은 핏발이 선 눈으로 부들부들 떨 뿐 감히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참 신기한 일이야. 너는 내게 돌아와 이 상황을 보고하는 것보다 거기서 죽는 게 더 무서웠다는 뜻이잖아?"
우드드득.
손목이 으스러진다.
"방승아."
손목을 밟은 채 그의 앞에 쪼그려 앉은 장일소가 빙글빙글 웃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만인방이 왜 만인방인 줄 아느냐?"
"바, 방주님. 저, 저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
장일소가 손을 뻗어 방승의 목을 살짝 꼬집듯 틀어쥔다.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사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그러니까 사파를 자처하는 놈들은 창피를 당해서는 안 되는 법이야. 창피를 당하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지. 응?"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대전을 물들였다.
방승의 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모두 숨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호흡을 참았다. 저 차가운 분노가 제게로 향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시선을 낮추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나는 모르겠구나. 너희가 저지른 것 이상으로 망신을 당할 길이 있는지. 그 꼴을 당할 바에야 내가 옷을 죄 벗어 던지고 저잣거리로 나가 춤을 추는 게 더 나을 것 같단 말이야. 그렇지 않니?"
"바, 방주……."
"그리 떨 것 없단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에 방승의 눈에 희망의 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빛은 피어난 것보다 더 빠르게 꺼져 버렸다.
"어차피 결과야 같지 않겠어?"
우두두둑.
그 순간 장일소가 방승의 목을 틀어잡고 그대로 비틀어 뜯어 버렸다.
촤아아아아악!
살점이 뜯겨 나간 그의 목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방승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장일소는 제 흰 옷에 피가 튀고 방승이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되레 환하게 웃었다.
"참 재미있네. 설마 내가 이런 망신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바, 방주! 사, 살려 주십……."
"끌고 가."
"복명!"
"사지를 찢어서 개 먹이로 줘라. 단!"
호위병들이 방승에게 뛰어오려 하자 장일소가 히죽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죽으면 안 돼. 살아서 제 몸뚱어리가 개에게 뜯어 먹히는 것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만약 이놈이 그 전에 죽는다면 너희가 살아서 몸이 뜯기는 걸 보게 될 거야."
"복명!"
호위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승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방주! 방주! 살려 주십시오! 방주우우우우우우!"
처절한 비명이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그 누구도 방승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섣불리 고개를 돌렸다간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쯧. 비싼 옷인데 말이야."
장일소가 자신의 옷에 튄 피를 보며 눈을 찌푸린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만인방의 군사(軍師) 독심나찰(毒心羅刹) 호가명(扈加名)이 슬쩍 입을 열었다.
"시비들을 부릅니까?"
"됐어."
장일소가 손을 내젓는다.
"더럽혀진 것은 빨아 봐야 처음처럼 될 수 없는 법이지."
장일소가 피가 묻은 백색 장포를 벗어 대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명성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곱게 쌓아 올려도 한번 무너지고 더럽혀지면 어지간해서 회복이 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지, 엽평?"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있던 엽평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단전을 잃고 사지의 근맥이 잘린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적사도일 수 없었다.
흐릿하게 풀린 그의 눈을 보며 장일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놈도……."
"바, 방주……."
가뭄의 논처럼 갈라진 엽평의 입이 열리자 장일소가 말을 멈추었다.
"화, 화산을 얕보지 마십……."
퍼억!
장일소에게 걷어차인 엽평이 바닥을 뒹굴었다.
"지고 돌아온 개는 함부로 짖는 거 아냐."
장일소는 턱짓으로 엽평을 가리키며 말했다.
"죽이지 마. 지금 저놈에게 죽음은 해방이니까. 어떻게든 살려서 받을 수 있는 굴욕은 다 받아 봐야지. 만인방의 노비로 써서 본보기 삼으렴."
"복명!"
"끌고 가."
"예!"
엽평마저 끌려 나가자 장일소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 평상에 걸터앉았다.
"머저리 같은 것들이."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아는 호가명은 조심스레 말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몰라서 물어?"
장일소가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금 전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이 자꾸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죽여야지."
"화산은 섬서에 있고, 섬서는 저희의 영역과는 거리가 멉니다. 게다가 화산은 하남과 멀지 않아 함부로 공격하기는 위험한 곳입니다."
"알아."
장일소가 손끝을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창 녹림 놈들이랑 대치하고 있는 중이지."
"바로 그러합니다."
"쯧쯧쯧. 저 정파 놈들은 이득이 있다면 원수라도 힘을 합치는데, 사파라는 것들은 동전 하나도 양보를 못 해서 이전투구를 벌인다니까?"
"솔직히 여력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그러니까 죽여야지."
"……."
장일소의 손가락에 껴진 반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쇳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득은 없고 손해만 있는 일입니다."
"가명아, 가명아. 왜 이리 어리석게 구니? 이득이란 것은 돈이 전부가 아니야."
장일소가 천천히 손을 올려 머리에 쓰고 있던 순금 관을 벗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돈을 벌 수 있게 되는 거지. 만인방이 구파일방도 아닌 화산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천하의 누가 만인방을 무서워하겠니? 그럼 우리 장사는 끝장나는 거야."
그그그극.
순금 관이 그의 손안에서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상황이니, 이득이니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우습게 보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는 만만해지거든. 명리(名利)란다, 명리. 이익만 좇으면 명성이 무너진다. 그런데 명성이 무너지면 이익도 무너지는 법.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장일소가 나른하게 손을 뻗어 허공에 휘적였다.
"남는 애들 모두 모아."
"서안으로 보냅니까?"
"거기는 왜? 이제 돈은 필요 없다니까. 중요한 건 거지발싸개가 되어 버린 만인방의 이름을 되찾는 거란다."
"하면……."
"그래."
장일소의 눈에 새파란 빛이 어렸다.
"섬서. 화산으로 보낸다. 오악 중 가장 가파르다는 그 산이 붉게 물들면 무척 아름답겠지."
단풍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피로 물들여야지.
"아, 화산파 놈들 머리 모조리 잘라 수레에 실어 오라고 해. 그리고 그 화정검인가 하는 놈이랑 화산신룡이라는 애기들은 살려 오라 그래. 어떤 비명을 지르는지 내 귀로 듣고 싶으니까."
"복명."
호가명이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장일소의 말대로 될 것이다. 이 만인방에서 그의 말은 곧 법이자 황명과도 다름없으니까.
명을 마친 장일소는 다시 평상 위에 느른하게 드러누웠다.
"화산……. 화산이라."
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백 년 사이에 두 번이나 불타는 것도 꽤 귀한 경험 아니겠어? 하하하핫."
높은 웃음소리가 대전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