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뭐 그렇게 대단한 일 했다고. (5)
"뭔 소리야? 좀 자세하게 이야기해 봐!"
청명이 다그치자 백상이 파르라니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귀, 귀신이 나왔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측간을 가던 이들이 희뿌연 귀, 귀신이 유영하는 걸 봤단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오늘만 두 명이!"
"……그래서?"
"그래서라니? 귀신이라니까!"
백상의 말을 들을수록 청명의 얼굴은 더욱 뚱해졌다.
"사숙."
"응?"
"사숙은 뭐 하는 사람인데?"
"나? 나야…… 도사지."
"에라이!"
청명이 백상을 뻥 걷어찼다.
"꺄울!"
백상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러 나가 떨어졌다.
"인간아! 도사라는 것들이, 뭐? 귀신? 귀신이 나오면 니들이 제령을 해야 할 판에,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어 대?"
도문이 어떤 곳인가?
개인으로는 도를 닦고, 더 나아가서는 백성을 구휼하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좇아 모든 사특한 것을 배제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당 놈들은 귀신 들린 놈들 찾아가서 도제(道祭) 지내 주고 돈 벌어 오는 판에! 뭔 도사라는 것들이 귀신 봤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어! 니들이 귀신을 무서워하면 귀신은 누가 잡냐, 누가!"
청명이 답답해 죽겠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었다.
"그리고 여기 도사만 있냐? 중놈은 또 어디 갔어?"
"혜, 혜연 스님?"
"그래!"
"그…… 귀신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시더니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독경을……."
"……진짜 염불하고 자빠졌네."
청명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도사가 이렇게 많은 데다 중까지 있는데, 그중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냐. 아이고, 내 팔자야."
차라리 고양이가 쥐를 무서워하는 게 낫지. 어쩌다가 도사 놈들이 귀신을 보고 도망 온다는 말인가?
"이것들이 양기가 허하나? 내가 제대로 좀 굴려 줘?"
"그럼 양기가 더 빠지지……."
"주둥아릴 확!"
"끙."
구세주라도 본 양 몰려왔던 제자들이 모두 청명의 서슬 퍼런 기세에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청명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세상에 귀신이 어딨……. 어……. 아니, 잠시만."
따지고 보면 나도 귀신 아닌가?
"어?"
예전에는 귀신이라는 말은 들으면 콧방귀를 뀌었던 청명이지만, 그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이게 꼭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귀신이라니."
백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대자, 윤종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면 이 장원을 처음 매입할 때 싸게 살 수 있었던 이유가 귀신이 나와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지."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닙니다. 이 목 좋은 곳의 장원이 그동안 폐가로 비워져 있었던 것도, 웬만해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두 명이나 귀신을 봤다지 않습니까?"
"……그럼 정말 귀신이 나온다는 건가?"
백천이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대명천지에 귀신이라니.
"사매, 사매는 어떻게 생각……."
뒤를 돌아본 백천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항상 두어 걸음 뒤쪽에 있던 유이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얘는 또 어딜 갔……."
그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화영문 입구에 바짝 붙어서 슬쩍 발을 빼고 있는 광경을 본 것이다.
"……뭐 하니?"
백천의 물음에 유이설이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귀신."
"……."
"칼 안 박힘. 못 이겨. 무서움."
"……."
백천이 서글픈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상인이 없어.'
방금 저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겉으로야 칼이 박히지 않는 귀신이 무섭다는 의미지만, 다른 뜻으로 보자면 칼이 박히는 놈이면 무서울 게 없다는 뜻이다.
어쩐지 평소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더라니.
"백상아."
"예, 사형."
"그 귀신을 목격했다는 이는 누구냐?"
"예. 하나는 화영문의 제자입니다. 지금 너무 놀라서 방에서 안정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데요?"
"……."
"……."
백천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진짜 정상인이 없다고.'
아니, 이 새끼는 옛날에는 좀 정상인 같더니. 어쩌다가 애가 이렇게까지 급격하게 망가졌나?
하기야.
지금 화산에 망가지지 않은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백천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네가 본 걸 정확하게 말해 보거라."
"예, 사형! 측간에 가려던 와중에 살짝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희뿌연 뭔가가 확 지나가지 않습니까! 보자마자 직감했습죠! 이건 귀신이다. 동시에 전신에 소름이 쫘아아악 돋는데!"
"그리고?"
"이게 단데요?"
"……."
"……."
허탈한 눈으로 백상을 바라보던 백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진정하십쇼, 사형."
"나도 그러고 싶다."
나도 그러고 싶다고, 이 새끼야!
심호흡으로 애써 마음을 안정시킨 백천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명이 한차례 윽박질러 놓아 조금 진정이 되기는 했지만, 제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귀신이 아닐 확률은 없느냐? 눈으로 쫓기 힘든 경공을 펼치는 고수라든가."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게…… 단순히 빠른 게 아니라, 그 희뿌연 것이……. 게다가 반쯤 투명한 것 같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정말로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음."
백천이 미묘하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이야 재경각 소속이 되었다지만, 백상은 한때 백자 배에서 실력깨나 자랑했던 이다. 심지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겁에 질려서 헛것을 보았을 리는 없었다.
'진짜 귀신이 나온다고?'
백천은 전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화영문의 전각이 괜히 음산해 보였다.
그들의 손으로 올린 새 전각이 그새 낡았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어떻게 하냐, 청명아?"
"뭘?"
"귀신이 나온다잖아."
"그게 왜?"
"……아니, 귀신인데."
백천의 말에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귀신이 뭐가 문젠데? 칼이 박히면 박히니까 무서울 게 없고, 칼이 안 박히면 걔도 나를 못 때릴 테니 무서울 게 없는 거 아냐?"
"……."
거 논리 정연하네.
청명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 쓸데없는 데 신경 쓸 겨를이 있으면 칼이나 한 번 더 휘둘러. 귀신은 얼어 죽을."
퉁명스러운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휘적휘적 걸어 안으로 들어가자 남은 제자들은 모두 불안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과 전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합니까, 사숙?"
"응?"
조걸이 살짝 희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청명이 놈이야 걱정이 없겠지요. 귀신도 저 새끼는 안 잡아갈 테니까."
세상을 부유하는 귀신과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를 비교하면 아무래도 귀신이 한 수 처지는 법 아니겠는가?
제 주제를 알고, 제 살 길을 찾는(?) 귀신이라면 청명은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아니죠. 귀신을 마주치면 어떻게 합니까?"
"……혹시 여기서 제령술을 할 줄 아는 놈이 있느냐?"
"화산에 그런 게 있습니까?"
"……."
어, 뭐…… 옛날에는 있었을 수도 있지.
"도사라도 불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도산데 누굴 불러, 미친놈아!"
"아니……. 우리 같은 칼만 쓸 줄 아는 도사 말고, 제대로 된 도사들 있잖습니까."
"……조걸아."
"예, 사숙!"
"정신 차려라. 처맞기 싫으면."
"넵."
백천은 탄식했다.
청명에게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제 사람을 상대로는 겁대가리를 거의 상실해 버린 화산의 제자들이지만, 귀신을 상대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백천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했다.
"여하튼, 세상에 귀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
말만 들으면 퍽 담담했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통탄했다.
'그렇게 희게 질린 얼굴로 말해 봐야 설득력이 없잖습니까…….'
하지만 백천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는 이동할 때 홀로 다니지 말고 최소 둘씩은 짝을 지어 다니도록 해라. 며칠 잠잠하면 다시 상황을 보겠다."
"예, 사형."
"알겠습니다, 사숙."
말을 마친 백천은 다시 전각에 시선을 던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그런 그의 얼굴에 미묘한 수심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이 소동은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늦은 밤.
뜬금없이 울려 퍼진 비명에 전각의 문들이 동시에 벌컥벌컥 열렸다.
"뭐, 뭐야!"
"침입자냐?"
모두 신발을 챙겨 신을 겨를도 없이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하여 비명이 울려 퍼진 곳으로 달려갔다.
"사형!"
"헐?"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청봉이었다.
"봉아! 정신 차려라!"
"끄으……. 끅! 귀, 귀신……."
그는 반쯤 눈을 까뒤집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귀. 귀신! 귀……."
"정신을 차려 보래도!"
"……끄르르르."
따아아악!
그러나 그가 막 의식의 끈을 놓으려는 찰나에 이마에 호된 딱밤이 떨어졌다. 호두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악!"
"뭔 도사 놈이 귀신 봤다고 기절을 해? 미쳤어?"
정신을 반쯤 잃었던 청봉이 이마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청명이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여튼 다들 빠져 가지고."
"처, 청명아."
"빨딱 안 일어나?"
청명이 버럭 소리치자 청봉이 언제 뒤로 넘어갔었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세상에. 기절하는 사람을 때려서 깨우네.'
'창조적이야. 확실히 창조적이야.'
모두가 감탄하는 와중에 청명이 청봉을 향해 물었다.
"뭘 봤는데."
"귀, 귀신이었다니까!"
"그러니까 그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데?"
"아, 아니 그게 뭔가 희뿌연 것이……. 아니, 불그스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 투명했나?"
"……그 눈깔은 대체 왜 달고 다니냐? 옹이구멍이여?"
"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자라. 처자라고."
청명이 청봉의 엉덩이를 뻥 걷어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것들을 믿고."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마음에 의혹이 생겼다. 잠깐 미간을 좁힌 채 고민에 빠졌다.
'한두 사람이 본 게 아니란 말이지?'
게다가 목격한 이들의 증언이 대동소이하다.
세세한 부분은 다 다르지만, 결론적으로는 뭔가 뿌연 것이 눈앞에서 훅 지나갔다는 것 아닌가?
그때 윤종이 옆에서 슬쩍 물었다.
"혹시 그…… 종남의 속가에서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아니야."
하지만 청명은 딱 잘라 부인했다.
"걔들은 그럴 능력이 없어. 장난도 능력이 돼야 치는 거지."
"으음."
혹시 모른다 싶어서 기감을 사방으로 펼쳐 뒀건만 걸리는 게 조금도 없었다. 진짜 종남의 속가들이 일을 벌였다면 대문을 넘기도 전에 청명에게 걸렸을 것이다.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천하의 청명조차도 결론을 쉬이 내지 못했다.
"저, 정말 귀신 아닐까?"
"아니, 사람이 이 정도로 많이 목격했으면 진짜 귀신이지!"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느 놈이 불호 외냐! 우리가 명색이 도산데!"
"도호를 외라고, 도호를!"
불안을 숨기지 못한 제자들이 각자 제 할 말을 해 대기 시작했다.
"그래! 불호는 중이 외어야지. 그래서 말인데, 혜인 스님은?"
"……문 걸어 잠그고 안 나오신다."
"거…… 그 양반 진짜 소심하네."
"무상대능력으로 후려 까면 귀신도 도망갈 텐데 말이야."
주변이 왁자지껄 소란해지자 청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다들 조용히 좀 해 봐!"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귀신은 무슨 놈의 귀신.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귀신이라면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갑자기 이렇게 확 나타날 수는 없지. 이건 분명 누군가의 수작질이다."
"종남도 아니라며? 그런데 누가 수작을 부린다고."
"그걸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지."
청명이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어떤 놈이 이런 얄팍한 수작질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걸 알게 해 주지!"
"그러다 정말 귀신이면?"
"매에는 장사가 없어. 귀신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잡아 버리면 그만이야."
청명이 단호한 목소리에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새삼 감탄했다.
과연 청명이다.
귀신이고 뭐고 저놈 앞에서는 의미가 없구나!
그럼 저놈만 믿고…….
"그런데."
"응?"
"……여기 혹시 부적 쓸 줄 아는 사람 있어?"
"……."
"아니, 혹시 모르니까."
백천과 나머지 제자들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야.
너도 솔직히 무섭긴 무섭구나?
이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