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뭐 그렇게 대단한 일 했다고. (3)
"아 밀지 마시오!"
"줄을 서면 되잖소! 줄을!"
"거 화산 분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소! 줄을 서라고!"
다음 날 아침.
문을 연 화영문의 앞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딱히 제자를 다시 받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건만, 입문을 희망하는 이들이 해가 뜨기 무섭게 화영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 새치기하는 사람은 안 받아 줄 겁니다!"
"자자! 화영문이 수용할 수 있는 제자들 수가 적지 않으니 너무 급하실 것 없습니다!"
"아! 새치기하지 마시라고요, 좀!"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은 몰려든 중인들을 통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낄낄낄낄."
청명은 세상 해맑게 웃어 젖히며 술병을 입으로 꽂아 넣었다.
꼴꼴꼴꼴.
"낄낄낄낄."
안주도 필요 없다.
술 한 모금 마시고 몰려든 사람들을 보면 청아한 계곡물을 마신 것보다 더 속이 상쾌해진다.
"저게 다 돈이지, 저게."
그 말을 들은 현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돈이라니, 이 녀석아."
"아닌가요?"
"떼돈이지."
"……."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하게 들어오는 돈!"
"……진정하세요, 장로님."
한 번씩 보면 이 양반이 나보다 더해.
……가슴에 맺힌 한은 이해한다만.
종남의 속가가 모조리 달아나 버린 이상, 이제 서안에서 무학을 배울 곳이라고는 화영문밖에 없다.
아직 미련이 남은 남자명이 뭔가를 해 보려 하는 모양이었지만, 민심이란 한번 떠나 버리면 웬만해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이게 독점이지!"
"남은 건 갈퀴로 돈을 쓸어 담는 것뿐이구나!"
청명과 현영이 서로 마주 보며 낄낄 웃어 댔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백천과 그 무리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사숙."
"응?"
"보통은 협명(俠名)을 날렸다는 걸 더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걸아."
"예, 사숙."
"저 두 사람……. 아니, 한 분과 한 놈은 평범한 시선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두 사람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특히나 조걸은 해가 뜬 지금까지도 흥분이 채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강호인들이 이래서 협행을 하는 거구나.'
누군가를 돕고 그들의 감사 가득한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울림을 가져다주는 경험이었다.
도관에 적을 두었음에도 협의니 도니 하는 말을 가슴 깊게 이해할 수 없었던 조걸에게, 지난밤의 일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제야 윤종이 왜 그리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면서까지 양민들을 구휼하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 조걸이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얼굴에서도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드러났다.
물론…….
"낄낄낄낄."
"켈켈켈켈."
……저 두 사람은 빼고.
여하튼!
"나의 길이라……."
"응?"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걸이 슬쩍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이르다. 아직은.
하지만 청명이 말한 것처럼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그도 그만의 길을 걸을 날이 올 테니까.
그게 도(道) 아니겠는가.
제자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청명과 현영은 몰려드는 이들을 보며 수입을 계산하기에 바빴다.
"그건 그렇고,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구나."
"그러게요. 이 정도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두 사람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데, 돌연 등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화정검 백천 도장 때문입니다."
"……엥?"
청명이 돌아보니 홍대광이 근엄한 얼굴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화산의 후기지수가 천하제일이란 소문이야 서안에도 자자하게 퍼져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제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완전히 믿지 못하죠. 게다가 한 번은 요행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요행이 아니란 걸 증명했지 않습니까."
홍대광은 제가 더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쫙 폈다.
청명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싸움 났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다 끝난 다음에 같이 싸운 것처럼 어깨에 힘주고 있어. 확 어깨를 접어 버릴라!"
"……나, 나는 전투원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혹시나 너희들이 지면 지원군을 불러와야……."
"져?"
청명이 눈을 희번덕댔다.
"그 눈은 옹이구멍이야? 누가 진다고?"
"크, 크흐흠."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홍대광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얼른 시선을 피했다.
'네놈도 아니고, 백천 도장이 엽평을 깨 버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그건 그가 아니라 개방의 방주가 와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내가 너희들이 질 거라고 생각했으면 어제 벌써 도망갔겠지."
"발은 빠르니까. 뒤늦게라도 도망갈 자신이 있었겠지."
"……여튼!"
홍대광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 때나 여튼이여."
"여, 여튼 화정검이 저 적사도 엽평을 잡은 이상 화산 후기지수의 실력은 완벽하게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비난 어린 청명의 시선을 외면하며 현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실 이게 화산 분들은 실감이 잘 안 갈 수도 있는데, 다른 문파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겁니다. 이제 겨우 이대제자에 불과한 이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적사도를 잡아 내다니요."
심드렁한 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홍대광이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했다.
"이만한 업적이면 후대의 천하제일인의 후보에 바로 이름을 올려도 손색 없을 만큼 대사건입니다. 그러니 화산의 실력은 이제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쉿!"
"으응?"
그런데 대뜸 청명이 조용하라는 듯 손짓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동룡이 허파에 바람 들어가면 아무도 책임 못 지니까. 지금도 재수 없는데 무슨 꼴까지 보라고."
"……."
이 새끼는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
어제 적사대를 상대하는 청명의 모습에 크게 감탄했던 홍대광이지만, 그 높아진 평가가 지금 다시 수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청명은 청명이다.
"다만."
작게 헛기침을 한 홍대광이 목소리를 바꾸었다.
"반면 위험도 적지 않을 겁니다."
"위험이라 하셨는가?"
"예, 장로님. 지금까지 화산은 딱히 크게 적을 만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종남 애들이 들으면 봉문 한 문 뜯어내고 게거품 물겠는데?"
하지만 홍대광은 조금 애매하게 웃었다.
"종남은 정파니까, 관계가 벌어진다 해도 서로가 서로를 멸문시키겠다고 달려들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인방은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정도라는 게 없습니다."
홍대광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만인방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천하를 오시하는 신주오패 중 하나. 사실…… 아직 화산이 상대하기는 어려운 존재입니다."
"으음. 그렇지."
도저히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들이받아 버리기는 했지만, 만인방은 분명 두려운 상대다.
적사대를 깔끔하게 물리쳤다 한들, 만인방에는 적사대만 한 무력대가 다섯은 넘고, 굳이 대를 이끌지 않는 고수들도 발에 채일 만큼 널려 있다.
거기에 여러 특수 임무를 맡는 이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종남을 가뿐하게 뛰어넘고, 가진 힘도 구파에 속한 문파와 비견될 정도다.
아직은 이대제자와 삼대제자가 더 성장해야 하는 화산으로서는 지금 당장 싸우기에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 봐야 사파 새끼들이지."
"……."
"왜요?"
"아, 아니다."
홍대광은 입을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그리고 사파 새끼들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요."
"어째서냐?"
"걔들은 이득이 없는 일은 안 하거든요."
"……."
"뭐 지들 나름으로는 의리니 체면이니 지껄여 대지만, 돈 안 되고 이득 없는 일에는 땀 한 방울 안 흘리려 들어요. 그 새끼들이 근성이 있었으면 사파가 됐겠어요?"
"……."
아니. 뭐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새끼들이 섬서에 와서 화산이랑 붙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어요? 화산이 어떤 곳인데. 가지고 있는 영역이라고는 쥐꼬리만 한 화음현밖에 없고, 건물도 중원에서 제일 척박한 화산 꼭대기에 있어서 사람도 잘 못 들르는 곳 아니에요?"
"그, 그렇지."
"거길 먹겠다고 본단을 이끌고 온다고요? 걔들이? 에헤이."
청명이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새끼들이 꿈틀이라도 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끄응. 네 말도 일리가 있다만 화산이 섬서의 화음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문제가 될 거다."
"그게 왜 우리한테 문제가 돼요?"
"응?"
"우리가 화음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으면 그 새끼들이 긴장해야지. 걸리는 족족 회를 쳐 버릴 건데."
"……."
청명은 살짝 짜증이 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생각하니 또 열받네. 애들 보고 있어서 너무 참았나. 성질 같아서는 싸그리 갈아서 거름으로 줘 버리는 건데."
"……."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청명이 놈과는 원수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홍대광이었다.
"여하튼."
대충 대화를 정리하며, 홍대광은 새삼 감회가 새롭다는 듯 몰려드는 이들을 보았다.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쨌든 서안은 손에 넣었구나, 화산신룡."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그리 긴 시간에 걸쳐 벌어진 게 아니다. 화영문이 생긴 지가 이제 겨우 보름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청명은 불과 들어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서안을 싹 평정해 버린 셈이다.
"종남이 봉문을 풀고 나오기 전에는 거칠 게 없겠구나."
"봉문 풀어도 똑같아요."
"응?"
청명이 술병을 흔들며 이죽거렸다.
"사람이 이리 몰리는데 여기 한 곳만으로 운영할 수는 없죠. 옆에 있는 전각들 사서 밀어 버리고 확장할 거예요."
"……여기서 더?"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
"이러다가 화영문이 종남보다 더 커지겠다."
"그러라지 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여하튼 저 새끼들이 봉문 풀 때쯤에는 서안에 바늘 하나 안 들어가게 만들어 둘 거예요. 봉문 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해 줘야지!"
"……종남이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냐?"
"말하자면 하루로도 부족하지."
정말 하루로도 부족하다.
생각하니 또 열받네. 이 새끼들!
"그리고?"
"뭘 그리고예요? 돌아가야죠."
"모두 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영문도들 실력이 좀 올라오면 미련 없이 빠질 거예요. 애초에 속가를 만든 이유가 본산이 없어도 영향력이 커지는 걸 원해서인데, 우리가 여기에 붙어 있으면 주객전도죠."
"……화영문만으로는 무리일 것 같은데?"
걱정 어린 중얼거림에 청명이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무시하지 마세요."
"응?"
"속가의 힘은 가진 무력이 아니라 본산에 대한 자긍심에서 나오는 법이에요. 종남의 속가가 그렇게 무력해진 이유도 가진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죠. 종남에 대한 미묘한 불신이 상황을 거기까지 만든 거예요."
"아……."
홍대광은 새삼 다시 한번 감탄하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평소에는 정신이 나간 놈 같은데 이렇게 핵심을 짚을 때가 있다.
"화산의 힘을 눈으로 보고, 적사대를 물리치는 걸 바로 옆에서 함께한 화영문은 이제 더는 약하지 않아요. 지금은 가진 바 무력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건 곧 해결이 될 거예요. 진짜 화영문을 돕고 싶다면 옆에 붙어서 함께할 게 아니라 본산으로 돌아가 화산의 명성을 더욱 떨쳐야죠."
"정론이다!"
홍대광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서 가장 큰 세력인 개방 소속의 홍대광은 지금 청명의 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개방의 세가 커지는 건 지부 관리가 뛰어날 때가 아니라 천하에 협명을 날릴 때였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이 모이게 만드는 것. 속가는 본산의 명성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아."
"응?"
"내가 도와주지."
"……뭘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보름 내에 화정검이 적사도를 쓰러뜨렸다는 걸 천하에 쫙 퍼뜨려 줄 테니까! 산골짝에 박혀 사는 이들조차 화정검의 이름은 알게 해 주겠다!"
"……어, 잠시만. 그……."
"그게 화산에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해야지!"
"끄응. 그게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쯧쯧쯧. 애처럼 왜 그러냐?"
"……좋아요."
청명이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눈을 단호하게 떴다.
"대신!"
"응?"
"그 화정검인가 뭔가 하는 별호 말이죠."
"엥?"
"그거 말고, 어차피 동룡이도 오룡인가 뭔가로 불린다면서요."
"그건 이제 잘 안 쓰는 칭호기는 한데. 근데 왜?"
"그거 동룡(銅龍)으로 바꾸죠."
"……."
"그럼 별호를 들을 때마다, 이름이 울려 퍼질 때마다 사람이 좀 겸손해지겠죠."
"……."
"서로 좋은 거죠. 낄낄낄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새끼는 악마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