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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77화 (377/1,567)

377화. 뭐 그렇게 대단한 일 했다고. (2)

돌아오는 청명을 바라보며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니까.'

청명은 화산에서 가장 경박한 인간이다. 화산에 적을 둔 이라면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때때로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 준다.

하기야 그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마는.

화산 제자들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청명이 순식간에 표정을 풀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엣헴! 뒤처리는 이렇게 하는 거다, 이거야!"

"……."

거 입 좀 다물고 있지.

그랬으면 보는 눈이 조금쯤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백천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손속이 너무 잔인한 것 아니냐?"

"응?"

청명이 슬쩍 볼을 긁었다. 그리고 엽평의 상세를 살피는 적사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숙, 사숙."

"응?"

"제일 덜 잔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글쎄?"

"쟤들 다 죽이는 거야."

"……."

백천이 입을 닫았다.

장난스러운 말투지만, 이건 절대 농담이 아니다. 저놈은 이런 걸로 농담을 하지 않는다.

"그게 어떻게 덜 잔인한 게 되는 거냐?"

"한 사람이 죽는 게 더 잔인해? 아니면 두 사람이 죽는 게 더 잔인해?"

"그야…… 당연히 두 사람이겠지."

"그럼, 쟤들이 앞으로 살면서 한 사람당 몇이나 더 죽일 것 같아?"

"……."

백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흠."

뭔가 더 설명하려던 청명이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어차피 이건 말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백천 역시 저놈들이 더 살아 있어 봐야 양민들에게 피해를 끼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청명이 쉽게 사람을 해하고 죽인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청명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뭐 독심을 품으라거나,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말라거나 그런 말은 안 할 거지만……."

그리고 한결 진지해진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온정은 마음에만 품으면 돼. 검에는 온정이 없어."

"……."

그런 청명을 현영이 거들고 나섰다.

"내 생각 역시 같다. 도인의 마음에 온정이 없다면 그를 어찌 도사라 부를 수 있겠냐마는, 화산의 선인들은 악을 참하는 데 어떠한 인정도 베풀지 않으셨다."

"아……."

"그 매화검존만 하시더라도 하룻밤에 수많은 흑도 무리들을 베어 사해에 그 명성을 떨치셨다지 않느냐? 그분께서 온정이 없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하여 그런 일을 벌이시지는 않았을 게다. 다 깊은 도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매화검존이라는 말이 나오니 백천의 눈이 삽시간에 반짝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청명의 속은 검게 타들어 갔다.

'같은 말인데 왜 반응이 다르냐고!'

이래서 사람은 어떻게라도 감투를 써야 하는 법이지!

'그런데…….'

내가 하룻밤에 흑도 무리를 수도 없이 베었다고?

'그게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지.'

언제를 말하는 거지? 청명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그때 마침 백천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낙양에서 악명을 떨쳤던 흑월문을 징벌하셨던 그 일을 말씀하심이군요."

"바로 그렇다. 매화검존께서는 결코 살인을 쉽게 생각하는 분이 아니셨음에도, 양민들을 괴롭히는 이들만큼은 결코 용서하지 않으셨지! 그날도 양민들을 수탈하는 흑도의 무리들을 보고 분연한 기색으로 주저 없이 일어나셨다 하지 않느냐?"

화산에 전해지는, 몇 안 되는 매화검존 일화였다.

이 일은 낙양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일이라 화산의 제자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아, 그거.'

청명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 이 새끼들이 사람 술 처먹는데!

어…….

양민?

어…….

청명은 머릿속에 떠오른 과거의 진실을 살짝 지워 냈다.

'그렇지. 결과적으로는 그런 거지.'

잊자.

잊어.

"그리고……."

현영이 눈을 찌푸리며 본론으로 돌아갔다.

"너희가 괜히 손속에 사정을 두다가 다치거나 죽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화산이 무도(無道)한 곳이 되는 게 낫다."

그 말에 화산의 제자들은 현영을 새삼 다시 보았다.

물론 현영이 장로들 중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훗날 같은 일이 있더라도 너희는 절대 손속에 사정을 두려 하지 말거라."

"예, 장로님!"

대답은 우렁찼지만, 모두가 생각을 정리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청명이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호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검을 손에 쥔 이가 평생 살인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청명은 이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그 결론이 틀렸다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의 가치관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고, 청명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은 건 아니니까.

그저…….

"더 많이 고민해 봐."

"……."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청명의 말에 모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화산의 난입부터 적사대의 패퇴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본 남자명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다.

'저 적사도 엽평을 쓰러뜨렸다고?'

십여 개나 되는 종남의 속가들이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터전을 버렸다. 그 이유 중 팔 할은 저 적사도 엽평에게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적사도 엽평을 화산신룡이나 소림의 혜연도 아닌, 저 화정검 백천이 쓰러뜨리다니.

'대체 화산이 언제 이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기껏해야 후기지수라더니.

엽평을 쓰러뜨렸는데 그를 어찌 단순한 후기지수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남자명은 관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쓰러진 엽평과 동료들을 수습하는 적사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

흉흉한 상황을 감지하고 문을 걸어 잠갔던 이들도 하나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남자명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적사대를 몰아내는 데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는데, 막상 그 일이 해결되고 나자 이제 뒷일이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끄, 끝난 건가?"

"……아, 아직 저기 있는데?"

"봐 보게. 저기 저 쓰러진 놈이 두목인 것 같은데?"

"그, 그럼 화산의 제자들이 만인방 놈들을 물리친 건가?"

주변을 둘러보는 남자명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은 많은 이들이 그저 고개만 삐쭉 내밀고 있을 뿐이지만, 몇몇 용기 있는 이들은 슬금슬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저……. 도, 도장님들. 저희가 나가도 되는지요?"

누군가가 조심스레 다가와 묻자, 화산의 제자들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다만 저놈들에게는 접근하지 말아 주세요. 아직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저놈들이 모두 서안에서 나가기 전에는 조심해 주시고요."

"가,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확신할 수 있었다.

화산이 저 적사대를 물리쳤다는 것을 말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적사대원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들쳐 업고 힘없이 관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느긋하게 걷고 있어, 이 새끼들이. 다 후려 까서 기어 나가게 만들어 버릴라! 당장 안 꺼져?"

청명이 벌컥 소리를 지르자 적사대원들이 기겁을 하여 경공을 펼쳤다. 말 그대로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물리쳤다!"

"사, 살았다! 우린 살았어!"

"꼴좋다, 저 사파 놈들!"

그 상황이 신호라도 된 양 문들이 일제히 열리며 서안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달아나는 적사대의 등 뒤에 삿대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해 댔다.

"저, 저! 종남이 봉문만 안 했으면 발도 못 들였을 놈들이!"

"그러게 말일세!"

"빌어먹을! 지금 종남 소리가 왜 나오는가?"

"으응?"

그리고 그중 몇몇이 울컥하여 소리를 질렀다.

"종남이 봉문을 했지, 속가가 봉문을 했는가? 이럴 때 우리를 지켜 줄 거라 생각했던 종남의 속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같이 다 꽁무니를 빼지 않았냐 이 말이야!"

"그렇지!"

"빌어먹을, 내가 그동안 가져다 바친 관비가 얼만데!"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속가 중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도망을 가 버리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러고도 그놈들이 정파라고 할 수 있냐고!"

여기저기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이 무학을 익히려 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무관을 떠받드는 이유는 만일의 순간이 왔을 때, 그들이 지켜 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남의 속가들은 위험이 찾아오자마자 나 몰라라 하고 달아나 버렸다.

사파와 맞서 스스로를 지키지도 못하고, 자신들이 지켜야 할 이들을 버리고 떠난 문파를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성난 민심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본산만 봉문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헛소리하지 말게! 어디 종남의 속가는 종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배웠다던가? 본산이 그리 가르쳤으니 속가가 그리 굴겠지!"

"……."

"물론 이번 일이야 종남이 봉문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겠지. 하지만 다음에 더 큰 적이 온다면 저 종남이 서안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건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고 했네! 속가를 보면 종남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지. 여하튼 나는 이번 일로 종남에 크게 실망했네! 내 다시는 종남 속가니 어쩌니 하는 것들에게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게야!"

많은 이들이 그 말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아직 종남의 영향력을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했기에 불만을 노골적으로 말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표정과 눈빛만 봐도 이미 크나큰 불신이 자리 잡았음은 자명했다.

"반면에 화산은 어떤가? 저분들은 이제 막 서안에 들어왔음에도 우릴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지 않았는가?"

"……그야 봉문 하지 않았으니까?"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말게! 봉문하지 않았다 한들, 종남이라면 저렇게 어린 이대, 삼대제자들만 있는 상황에서 저들과 싸우려 했겠는가? 내 종남이 슬슬 화산에 밀린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 않았건만, 이제는 그런 말이 왜 도는 줄 알겠구먼!"

그에 반해 화산에 쏟아지는 눈빛에는 호의가 넘쳐났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들의 눈에 보이는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젊고 어리다. 자신보다 어린 이들이 저 무서운 사파의 악적들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워 마침내 서안을 지켜 냈다.

만일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이 화영문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고마움이 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나온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종남 속가의 압박에 이기지 못하여 화영문을 배척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걸어 준 것이다.

"화산과 연관되지 말고 자신들을 따르라고 온갖 패악질을 다 처부리더니! 막상 조금 위험해지니까 꽁지를 빼고 달아나?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이 말일세!"

화산에 대한 호의와 종남에 대한 적의가 뒤섞여 들끓었다.

그 광경을 보던 남자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끝났다.'

힘은 전부가 될 수 없다.

그 힘이 올바른 방향으로 쓰여질 거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야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앞으로 종남의 속가는 다시는 서안에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는 신뢰가 없는 무관은 도적 집단과 다를 것이 없으니까.

'이 병신 같은 것들. 내가 그래서 그토록 말렸건만. 내 장문인의 얼굴을 어찌 다시 뵌다는 말인가?'

이제 제게는 이 흐름을 어찌할 힘이 없다는 걸 알아 버린 그는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대부분은 종남에 대한 분노를 표하기 바빴지만, 그중 일부는 슬그머니 화산파에 접근하여 직접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청명이 배를 쭉 내밀며 단호하게 답했다.

"감사는 감사할 일에 받는 겁니다. 이게 뭐라고 감사를 받습니까? 서안에 문파를 열었으면 죽어도 서안 사람들과 같이 죽어야 하는 법이고! 살아도 서안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법이죠! 당연한 일에 감사를 받는 건 되레 부끄러운 일입니다!"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그의 말을 들으며 화산의 제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입에 기름칠을 했나.'

'와, 종남 속가를 저렇게 완전히 죽여 버리네.'

'내가 칭찬받는 것보다 남을 밟는 게 더 좋다 이거지. 역시 청명이야. 존경한다.'

"화산! 과연 화산입니다! 화산의 위명이 천하를 울린다고 하더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화산 덕분에 살았습니다. 화산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지!"

"이 감사를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명이 움찔거리며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헤헤. 뭐 그렇게 대단한 일 했다고."

"아닙니다! 대단하지요!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만세! 화산파 만세!"

쏟아지는 환호성과 박수, 그리고 무수한 악수 요청에 청명의 입이 슬금슬금 벌어졌다.

"헤헤헤."

"도장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만세! 화산파 만세!"

환호성과 웃음소리, 그리고 새로운 신뢰가 쌓여 가는 소리가 서안을 가득 울렸다.

그 커다란 함성이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종남까지 들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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