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뭐 그렇게 대단한 일 했다고. (1)
"……이겼다?"
윤종을 비롯한 화산 제자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간혹 백천이 끝도 없이 밀릴 때는 차마 눈을 뜨고 보지도 못할 만큼 심장이 오그라들었건만.
"세상에……. 적사도 엽평을."
"하……. 하하. 진짜 어이가 없네."
모두 떨리는 심장을 어쩌지 못했다.
적사도 엽평.
만인방 적사대의 대주이자, 강호에도 그 명성이 자자한 도객.
그런 이를 다름 아닌 백천이 꺾어 낸 것이다.
진금룡 같은 후기지수를 이긴 것과는 그 결이 다른 일이다.
물론 청명이나 혜연 같은 괴물은 논외로 쳐야겠지만, 보통 후기지수 중 끗발을 날리는 이들이라고 해도 무림에서 당당한 고수로 인정을 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순간 백천은 적사도 엽평을 꺾어 내면서 본인이 후기지수를 넘어 당당한 한 사람의 강호인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냐면, 백천이 비무대회에서 승리할 때마다 좋아 날뛰며 그에게 달려들었던 화산의 제자들이 지금은 쉬이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허어……."
그리고 그런 심정인 건 현영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허허허허. 백천이가…… 백천이가 저 적사도 엽평을……."
이렇게 모두가 감동에 젖어 있는 와중, 단 한 사람만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뭐 그리 대단한 거 했다고."
"어찌 대단하지 않으냐. 저 적사도 엽평을 이겼는데."
"원래 다 그런 거예요."
"으응?"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후기지수라고 언제까지 후기지수인 건 아니죠. 이름을 날리는 이들은 보통 강호에 유명한 고수 하나를 꺾어 내며 그 시작을 알리잖아요?"
"으음. 그 말은 이제 백천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시킨다는 뜻 아니냐?"
응?
그게 그렇게 되나?
청명이 살짝 떨떠름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백천이 그들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왔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을 보니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
"이겼다."
"……."
청명의 뺨에 심통이 배어났다.
"거 까딱했으면 뒈졌겠어?"
"하지만 안 죽었지."
"검은 다 부러뜨려 먹고?"
"검은 검일 뿐이지. 새 검을 쓰면 된다."
"……저 새끼가 방심만 안 했으면 못 이겼을 텐데?"
"그것도 다 실력 아니겠느냐?"
청명의 볼이 파들파들 떨렸다.
더는 구박거리가 없었다.
막말로 적사도 엽평은 최소한 백천보다 한 수 위의 고수다. 그런 고수를 백천이 잡았는데 무슨 구박을 하겠는가?
방심?
웃기는 소리.
상대의 방심을 이용하는 것도 실력이고, 방심하는 것도 실력이다. 어찌 되었건 둘이 붙어서 생사결을 치렀다면 진 쪽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끄으으응."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자 현영이 흐뭇하게 웃으며 백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구나."
"아닙니다, 장로님. 제가 제 흥분을 이기지 못하여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현영은 어여쁘기 짝이 없다는 듯 연신 백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그 순간.
쇄애애애애액!
"엇!"
백천의 등 뒤로 도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들었다.
등 뒤에서 강렬한 기운을 느낀 백천이 기겁을 하며 돌아보았다.
"여하튼."
카앙!
시뻘건 도기를 품고 날아들던 대도가 청명이 검집째 휘두른 검에 튕겨 힘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백천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가셨다.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여겼던 엽평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그의 등을 향해 도를 던진 것이다.
'이거…….'
만일 백천이 혼자였다면 지금쯤 등에 저 대도가 박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이, 네이. 참 깔끔하게 마무리하셨네요."
"……."
"쯧."
청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리고 검을 쥔 채로 엽평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사파가 왜 사파인지 알아?"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사파야."
청명은 뒤로 돌아보지 않았지만, 백천은 마치 그가 보고 있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협의를 논하며 사파를 건드렸다가 죽는 이들이 한둘이 아냐. 그러니까 사파와는 아예 얽히지를 않든가, 아니면……."
스르르릉.
청명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다시는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완전히 처리해 버리는 게 기본이지."
섬뜩하다.
장난기 어린 말투가 아니었다.
청명은 때때로 이런 이해 못 할 진지함과 서늘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럴 때마다 백천은 손끝이 시려 오는 느낌이었다.
"마, 막아라!"
"대주님을 지켜라!"
청명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내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적사대원들이 필사적으로 청명과 엽평의 사이를 막아섰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적사대원들을 한기가 도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 이놈!"
"물러서라!"
적사대원들이 독이 오른 얼굴로 청명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은 감정은 적대감이라기보다 공포에 가까웠다. 이대로 대주를 잃고 돌아간다면 만인방에서 어떤 처벌을 받을지가 너무도 뻔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를 뽑아 들고 위협을 해 대도 청명의 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마치 산보라도 하는 듯 태연하게 걸어오는 그의 자세에 적사대원들이 움찔움찔 물러났다.
"이익!"
하지만 그중 독기 오른 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박차고 나왔다.
"더 이상 다가오면 목을 베……."
서걱.
"……."
이내 그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반쯤 베인 자신의 목에서 뿜어진 피를 멍하게 바라보던 그는 기겁하며 더듬더듬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털썩.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며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손을 떼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후욱! 후욱!"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을 느낄 새가 없다. 지금 그는 삶과 죽음 그 한중간에 떨어져 있으니까.
저벅. 저벅.
청명은 표정에 미동조차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예전이었으면……."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는 입을 떼기도 전에 다 죽었어."
"……."
"그런데 뭐, 나도 예전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기회를 주지. 막는 놈은 죽는다. 물러나는 놈은 산다."
더없이 딱딱하고 온기 없는 목소리였다.
"간단하지?"
"……."
"그러니까 결정해. 죽을 건지, 살 건지."
적사대원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저게 허세가 아니라는 건 이미 증명했다.
'보이지도 않았어.'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청명이 첫 적사대원의 목을 어떻게 베었는지 눈으로 보지 못했다. 뭔가 희끗한다 싶더니 이미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말인즉, 이곳의 누구도 청명의 일 검을 제대로 받아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나름 사선에서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기에 알 수 있다. 지금 청명이 보여 준 일 검이 얼마나 독악한 수인지.
꿀꺽.
여기저기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웬만한 사람은 사람의 목을 향해 진검을 휘두를 수 없다.
목은 까딱하면 사람이 죽는 부위다. 그런데 그 부위에 진심으로 검을 휘두른다는 건, 여차하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독심(毒心)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대부분은 아무리 자신의 검에 완벽하게 자신 있다고 해도, 큰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는 수많은 부위를 놔두고 굳이 목을 노리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저 어린놈은 사람의 목을 향해 아무런 주저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 말은…….
'살인에 익숙하다.'
저런 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상대를 모조리 죽이고도 남는 놈이다.
대체 어떻게 화산파의 어린놈이 그런 성향을 지닐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논리를 따질 때가 아니잖은가?
"그……."
혼란에 혼란이 가중되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적사대원들을, 청명이 친히 재촉했다.
물론 말이 아니라 검으로.
서걱. 서걱.
"끄륵!"
"끅!"
어정쩡한 자세로 청명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던 선두의 적사대원 들이 목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결국 남은 적사대원들은 항거할 의지와 힘을 잃었다.
"히익!"
"아, 안 돼."
길을 막고 있던 이들이 대부분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끝내 길을 트고 말았다.
물론 개중에는 아직 자존심이 남아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감히 청명의 앞을 제대로 막아설 엄두는 내지 못했다.
저벅. 저벅.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위협적으로 도를 들고 있는 만인방의 적사대. 그들이 열어 준 길 사이로 화산의 무복을 입은 젊은 검수가 태연하게 걸어 들어간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겠는가?
정작 청명은 태연하건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화산의 제자들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태연하게 걸어가는 청명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적사대원 중 하나가 조용히 빠르게 기습해 들어갔다.
커다란 도가 금방이라도 청명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릴 듯했다.
하나.
캉!
그가 휘두른 도는 청명의 검에 부딪혀 깔끔하게 날아갔다.
그리고.
서걱.
깔끔하게 목을 베인 이가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
적사대원들의 눈은 이제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한 번도 아니라 네 번이다.
네 번씩이나 단 일 검에 똑같은 부위를 베어 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 설사 적사도 엽평이라고 해도 흉내 내기 힘들 것이었다.
"더 없어?"
"……."
"있으면 덤벼. 지금이면 아직 살 수 있으니까. 나는 등을 노리는 놈은 살려 두지 않거든. 조금 전처럼."
"……."
그 말이 적사대원들의 의지를 모두 꺾어 버렸다.
반쯤 죽은 눈이 되어 버린 그들은 모두 청명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청명은 그 모습을 슬쩍 훑어보고는 쓰러져 있는 엽평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후욱……. 후욱!"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엽평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청명을 보며 몸을 떨었다.
딱 봐도 알 수 있다.
백천이라는 놈은 결국은 정파 놈이다. 손쉽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아까 그가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엽평의 허리는 완전히 으스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만 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놈은 다르다.
'어떻게 정파 놈이…….'
화산이 살수를 키워 내는 곳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 어린놈이 이런 느낌을 준단 말인가?
이건 수도 없이 피를 본 살귀들이나…….
저벅.
마침내 청명의 발이 엽평의 얼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너…… 너 나를 어떻게, 할……."
"고민 중이야."
청명이 흐음 하며 턱을 쓸었다.
"예전이면 고민할 것도 없었겠지만, 나도 이제는 나름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진 사람이거든. 예전에는 내가 마음대로 굴면 수습해 줄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수습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거지."
엽평은 청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가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사, 살려 다오!"
"고민 중이라니까."
"나, 나를 살려 주면 내……."
퍼억!
어떻게든 주절거리려는 엽평의 입에 청명의 발이 틀어박혔다.
"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엽평의 입에서 부러진 이가 우수수 쏟아졌다.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닥치고 있어 봐. 고민 중이라니까."
"……끄으……."
"사실 그리 고민이 필요 없긴 하지. 애초에 너희는 여기서 사람을 죽이려던 놈들이고, 우리가 졌다면 지금쯤 네놈들이 우리 모가지를 잘라다가 대문 앞에 걸어 놓았을 테니까."
"……."
"그 상황에서 우리가 살려 달라고 했으면 너는 어떻게 했을까?"
"끄, 끄륵……."
엽평이 필사적인 눈으로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본 청명은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지."
턱!
청명이 엽평을 걷어차 뒤집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청명의 검이 엽평의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푸욱!
마지막으로 엽평의 단전을 파고들었다.
"사람은 뿌린 만큼 거두는 법이지. 네가 그동안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면, 팔다리를 못 쓰게 되고 무공을 잃었어도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촤아아악.
청명이 회수한 검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바닥에 뿌린 뒤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돌아가 너희 윗대가리들에게 전해."
"……."
적사대의 누구도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시 한번 섬서에 발을 들이면, 이제는 나와 화산을 상대해야 할 거라고."
그렇게 유유히 적사대원들 사이를 걸어 나온 청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꺼져. 다 죽여 버리기 전에."
그 차가운 목소리에 만인방의 적사대들이 일제히 눈을 질끈 감았다.
짧은 밤사이에 벌어진 긴 사건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