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그 말은 동감이야. (4)
"걸아."
"예, 사형."
"……쟤……."
윤종이 슬쩍 눈짓으로 청명을 가리켰다.
"열받은 것 같지 않냐?"
"예?"
그 말에 조걸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쪽을 살폈다.
"……그냥 평소의 청명이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뭔가 좀."
윤종이 미간을 좁힌다.
평소의 청명이라…….
확실히 어투나 건들거리는 자세 같은 건 딱히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윤종은 청명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미묘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청명의 앞에 있는 적사도 엽평에게로 향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엽평과 그 발치에 죽어 있는 적사대원에게로 가 닿았다.
'이게 사파인가?'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제 손으로 제 수하를 죽이는 놈이 있을 거라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저 개 같은 놈이."
"저게 인두겁을 쓰고 할 짓인가?"
나머지 화산의 제자들에게서도 진득한 분노가 새어 나왔다.
사파.
직접 겪어 보지 못하고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던 사파는 비인외도(非人外道)를 걷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 모호했던 설명이 적사도 엽평을 보는 순간 확연히 와닿았다.
저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저들이 왜 배척을 받는지도.
강함과 약함을 떠나 사람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섬뜩함이 있었다. 그 서늘함이 모두의 몸에 소름이 돋게끔 했다.
"이 새끼가……."
적사도 엽평의 두 눈에 새파란 귀기(鬼氣)가 어렸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느물거리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손에 도를 든 채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는 이 모습이 아마도 세상이 이야기하는 적사도 엽평의 본모습일 것이다.
"목을 잘라?"
엽평은 청명의 말을 곱씹으며 웃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작은 동물을 위협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정작 청명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예쁘게 잘라 준다니까."
"하……."
엽평이 막 벼린 칼날 같은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다가 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너를 죽이진 않겠다."
"응?"
"네 사형제들이 모조리 내 칼에 목이 잘리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죽을 수 있게 해 주지."
"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사파 새끼들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야, 덤벼. 조동아리로만 나대지 말고."
"이 새……."
"아니, 됐다. 내가 갈게. 거 새끼 말 많네!"
청명이 검을 뽑아 들고 막 달려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턱.
누군가 등 뒤에서 그의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응?"
청명은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막은 이를 바라보았다.
"왜? 사숙."
백천은 굳은 얼굴로 청명을 잡아끌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간다."
"……어?"
백천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저 새끼, 내가 잡는다고."
"……."
청명이 묘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내가 하게 해 다오."
"왜 그렇게 열받았어?"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백천의 얼굴에는 큰 노기가 어려 있었다. 지금까지 백천이 화를 내는 모습이야 여러 번 보았지만, 지금처럼 확연한 분노를 표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청명이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사람은 백천이다.
과거 운검이 했던 역할은 이제 백천에게로 거의 넘어왔다.
그렇기에 백천은 더더욱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엽평이 자신의 수하를 죽이는 광경에서 백천이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생각하면 이 분노는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
"위험한데?"
"검을 잡은 이상 위험한 건 당연한 거지."
"……좀 세기도 세고."
"알아."
백천이 단호한 눈으로 청명을 올곧게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저놈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거냐?"
"에……."
조금 미묘하긴 한데, 그게…….
"그럼 됐다."
"응?"
"네가 고민할 정도면 가능성은 있다는 거겠지. 언제나 이기는 게 당연한 상대하고만 싸울 생각은 없다. 내가 한다."
"……."
아니, 얘가 왜 이렇게 과격해졌지?
사춘기인가?
청명이 잠깐 망설이는 사이 백천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청명은 얼른 슬쩍 발을 뻗어 그의 발을 걸었다.
"어엇!"
바닥에 처박힐 뻔한 백천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고 항의하는 듯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힘 빼."
"……."
"그렇게 열받은 걸 있는 대로 드러내면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면 이길 놈도 못 이겨. 아까 애들한테 뭐라고 했지?"
"……자세를 낮추고."
"그래."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어 번 심호흡했다.
곧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청명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
"그래서?"
"웬만하면 안 하는 게……."
"'웬만하면'이라고 말한단 건, 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끄으으응."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차라리 떼를 쓰면 패기라도 할 텐데. 대가리가 굵어지니 논리를 가지고 와서 조목조목 대든다. 사파 놈들 앞에서 후려 까 버릴 수도 없고!
결국 청명이 두 손을 들었다.
"……다치면 죽인다."
"오냐."
백천은 그런 그를 슬쩍 일별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검을 쥔 채 엽평과 마주 섰다.
한편 화산의 제자들은 기겁을 하며 그 광경을 보았다.
"뭐, 뭐야! 사숙이 싸우시는 거야?"
"지켜봐. 사형이 이길 거니까."
유이설이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시선은 검을 뽑아 드는 백천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반면 백천은 등 뒤의 소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적사도 엽평에게로 향해 있었으니까.
'……강하군.'
솔직히 무시무시할 정도다.
진금룡을 상대할 때는 그와의 관계 때문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상대의 무위 하나만으로 심장이 조여 왔다.
그럼에도 끝내 검을 쥐고 물러서지 않는 백천을 보며 엽평은 중얼거렸다.
"애송이들이 세상을 너무 모르는군."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음?"
백천이 검을 들어 엽평을 겨눴다.
"여기서 너 따위에게 쫄아서야 평생 누군가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게 될 거야. 나는 그럴 생각이 없거든."
그는 자세를 고정한 채 슬쩍 시선만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심드렁한 그의 얼굴을 보니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
'따라가는 게 아니야.'
따라잡는 것이다.
설사 허황된 꿈에 가까울 만큼 멀고 먼 일이라도, 포기해 버리면 그 가능성조차 사라진다.
백천은 청명이 다지고 닦은 평탄한 길을 그저 따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길을 열어야 한다면 같이 여는 거지. 비를 맞아야 한다면 같이 맞아야 하는 거고. 그게 사형제다."
"……뭐라는 거냐, 애송이 놈이."
"그러니까."
백천이 이를 드러냈다.
"덤벼. 너 같은 건 간단하게 뛰어넘고 거리를 좁혀야 하니까."
엽평은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걸 느꼈다.
"이 자라 새끼들이……."
지금껏 수많은 이들을 상대해 왔지만, 단 한 번도 그를 이만큼 무시한 놈들은 없었다.
심지어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고수들도 아니고, 기껏해야 이제 명성을 좀 얻기 시작한 후기지수 놈들이 감히 그를 만만히 보다니.
"오냐! 사지가 찢기고도 그리 지껄일 수 있는지 보겠다!"
엽평이 기합을 터뜨리며 백천에게 달려들었다.
쿠우우웅!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거미줄처럼 쩌적쩌적 갈라졌다. 그 반동을 전신에 실은 엽평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돌진했다.
그리고 참격!
쾌속무비(快速無比)하기 짝이 없는 도가 어마어마한 힘을 싣고 백천을 향해 내리쳐졌다.
얇디얇은 검으로 저 육중한 도격을 막아 낸다는 건 절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하나.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를 바라보면서도 백천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 발을 앞으로 뻗으며 검을 앞으로 찔렀다.
완벽한 자세.
흔들리지 않는 검 끝.
떨어지는 도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날아드는 엽평의 목을 향해 검을 찌른 것이다.
"엇!"
순간 당황한 엽평이 기성을 내질렀다.
이대로 도를 내리친다면 저 허여멀건 놈을 두 동강 낼 수 있겠지만, 그의 목 역시 검에 꿰뚫리고 말 것이다.
'이 미친놈!'
그는 결국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다.
내리치던 도가 허공을 갈랐지만, 덕분에 그의 목을 찔러 오던 검 역시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결과 자체는 동수.
하지만 한 사람의 자세는 흐트러졌고, 다른 한 사람의 자세는 온전하다.
그 차이가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쇄애애액!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검을 회수한 백천은 몸을 뒤튼 엽평을 연이어 찔러 들어갔다. 순식간에 십여 개로 불어난 검영이 엽평의 전신을 공격했다.
"쳇!"
엽평은 도를 크게 휘둘러 날아드는 검영을 쳐 냈다.
하지만 완전하지 못한 자세에서 날린 도격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법.
대부분의 검영을 쳐 냈지만,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 하나는 끝내 막아 낼 수 없었다.
서걱.
섬뜩한 소음과 함께 엽평의 바깥 허벅지가 길게 갈라졌다.
방울방울 날린 피가 먹물처럼 바닥에 흩뿌려졌다.
콰득!
몸을 뒤로 날리듯 빼낸 엽평은 바닥에 도를 내리꽂으며 자세를 다잡았다.
"……."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눈은 흉신악살처럼 핏발이 선 채 일그러져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서안 전체가 뒤흔들릴 만한 노호성이었다.
이윽고 엽평은 이제껏 백천이 겪어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비호처럼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