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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73화 (373/1,567)

373화. 그 말은 동감이야. (3)

적사대원 형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은 대체 뭐지?'

적사대는 전투로 뼈가 굵은 이들이다.

대부분의 사파인이 그렇듯, 그들은 어릴 적부터 수도 없는 실전을 겪었다.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때로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수도 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그 기나긴 싸움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여 만인방의 적사대에 든 것이다.

그런 그들에 비해 지금 눈앞에 있는 놈들은 제대로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분명 처음 도를 맞댈 때만 해도 이들은 애송이답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으하하핫! 어딜 도망가느냐!"

"그것도 도라고 휘두르는 거냐!"

형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실전을 별로 겪어 보지 않은 정파의 애송이 놈들 맞나?'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던 모습 같은 건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번들대는 눈으로 검을 휘둘러 대는 모습은 차라리 나찰(羅刹)에 가까워 보였다.

'이럴 수가 없는데.'

그들을 처음 상대하는 애송이들은 급소를 노려 오는 도격과 살을 저미는 살기 앞에 겁을 먹고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었다.

형표가 그렇게 죽인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이건 단순히 정파와 사파의 문제가 아니다. 강호 초출의 애송이들은 소속이 어디든 간에 결국은 비슷한 일을 겪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날뛰는 화산파 놈들은 여태껏 그가 만났던 애송이들과는 확실히 뭔가 달랐다.

카아아아앙!

검이 날아들었다.

도가 그 검을 힘겹게 막아 냈다.

"이 새끼가 막아?"

"어디 사파 새끼들이 곱게 안 뒈지고!"

"확 마!"

저 보라지…….

이쯤 되면 누가 사파이고, 누가 정파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화산은 도가 문파 아니었나?'

그럼 저 새끼들이 도사라고?

뭔가 착각한 것 아닌가? 아무리 봐도 그쪽보다는 이쪽(?)에 가까운 것 같은데?

하지만 형표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하아아압!"

채애앵!

쾌속하게 날아든 검이 그의 어깨를 노리며 찔러 들어왔다.

다급하게 도를 휘둘러 날아드는 검을 쳐냈지만, 검은 밀려나지 않고 마치 독이 오른 뱀처럼 영활하여 그의 옆구리를 다시 파고들었다.

"큭!"

형표는 거의 바닥을 구르고서야 그 검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면을 다 버리고 나려타곤을 펼쳤음에도, 옆구리에 길게 상처가 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주르륵.

옆구리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길게 갈라진 옆구리를 살피며 형표는 등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파아아아앙!

검이 날아드는 속도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 어린놈들이 이리 날카롭게 검을 휘둘러 대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애송이답지 않은 태도.

그리고 더욱 애송이답지 않은 검.

주변을 둘러보는 형표의 눈은 이제 형편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적사대.

만인방의 주력 중 하나인 적사대가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눈에 확연히 보일 만큼 밀리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이대제자 따위에게!"

형표는 악에 받쳐 눈에 핏발을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반면 백천은 짧게 심호흡을 하며 어깨의 힘을 풀었다.

'자꾸 힘이 들어가는군.'

아무래도 실전은 실전. 도기가 실린 날붙이가 눈앞을 종횡하는데 긴장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중요한 건 긴장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 긴장 속에서도 최대한의 실력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게 청명이 평소에 가장 강조하던 일 아닌가!

마음을 다시금 차게 가라앉힌 백천은 자신의 앞에서 도를 들고 있는 적사대원을 바라보았다.

비무대회가 끝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백천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화두가 하나 있었다.

'나는 얼마나 강한가?'

본인이 후기기지수들 중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진금룡을 꺾어 내며 자신을 얻었고, 청명을 지켜보며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다른 사형제들의 활약에서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기에 더욱 확실히 해야 하는 것.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

백천이 눈을 빛냈다.

화산의 백자 배는 이제부터 화산의 주력이 되어 천하를 종횡해야 한다. 그러니 후기지수 중에서 강하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너희 정도는 무리 없이 꺾어 내야 화산의 정예를 자부할 수 있겠지."

백천이 차게 읊조리며 진각을 밟았다.

무게가 잔뜩 실린 검이 날아드는 도를 더 강한 힘을 찍어 눌렀다.

쿠웅!

도와 검이 맞닿는 순간 상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백천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어렵지 않다.'

다리에 한층 강한 힘이 실렸다.

상대가 약해서?

천만에.

상대는 분명 강하다.

그저 백천이 더 강할 뿐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다른 문파였으면 문제가 터져도 몇십 번은 터졌을 끔찍한 수련을 묵묵히 버텨 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단단한 토대 위에 '자신감'이라는 전각이 서기 시작했다.

자신감이란 결국 실적에서 나오는 것.

스스로에 대한 단단한 믿음에, 실적이 더해진 이상 백천이 약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쿵!

백천이 다시 진각을 내밟으며 상대를 밀어 낸다.

화산 특유의 화려한 검술이 아닌 기본 검술.

마음이 들뜨고 긴장될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청명의 말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들뜨지 마라!"

백천이 묵직하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기본을 지켜! 자세를 낮추고 무게중심을 내려라! 검은 하체부터 시작한다!"

끝도 없이 듣고 또 들어 왔던 것.

그것만 온전히 지켜 낼 수 있다면, 첫 실전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결국 검이란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니까.

"예, 사형!"

"예!"

격전 와중에도 커다란 대답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적사대원들을 몰아붙이던 화산 제자들의 자세가 일제히 조금 낮아졌다.

백천은 그 광경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 이 애송이 놈이!"

"아까부터 자꾸 애송이가 어쩌고 하는 말이 들리는데."

그의 미끈한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애송이는 우리가 아니라 그쪽 같은데?"

"뭐라?"

"그리고……."

백천은 고개를 한차례 까딱거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놈 말이 듣기에는 짜증 나지만, 그리 틀리진 않거든. 오늘따라 하나는 더더욱 공감이 가는군. 어디 사파 놈이 감히 화산 제자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어. 목을 잘라 버릴까."

"……."

"와 봐. 화산이 어떤 곳인지 똑똑히 알려 주지."

"이익!"

적사대원이 핏발이 선 눈을 홉뜨며 백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천은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검을 겨눴다.

"……허어."

현영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화산의 제자들이 적사대원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광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들이 언제…….'

물론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천하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후기지수.

저 만인방의 적사대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청명이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이유는 그 손색을 청명이 메울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건만.

'설마 아이들만으로 저 적사대를 몰아붙일 줄이야.'

제 자식을 가장 저평가 하는 건 부모고, 제 제자를 가장 못 믿는 건 스승이라더니.

"나도 결국 걱정 많은 늙은이에 불과했구나."

"에이. 뭔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장로님이 믿어 주셨으니 칼이라도 휘두르게 된 거지."

"……만인방의 적사대라고 하면 그래도 천하에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이거늘……."

"그래 봐야 사파죠."

청명은 적사대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실전 검술?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물론 청명은 실전 검술을 무시하지 않는다. 전장에서 닳고 닳은 이들은 평생 동안 산속에서 검을 익혀 온 이들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전투를 치른 놈들 이야기고.'

이 평화로운 시기에 저 사파 놈들이 실전을 겪어 봐야 얼마나 겪었겠는가?

과거 마교와의 전쟁 같은 때라면 가능했겠지. 그때는 하루에도 전투가 수십 번씩 벌어졌으니까.

동이 트기 전부터 싸우기 시작해서, 해가 지고도 서로의 몸에 칼을 박아 넣던 시절이었다. 그런 전장에서 하루를 버텨 낸다는 건 열흘 동안 쉬지 않고 수련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저 적사대라는 놈들이 그만한 실전을 겪었을 리가 없다.

'기껏해야 열흘에 한 번. 적으면 한 달에 한 번.'

그따위로 수련을 한 놈들이 하루하루 자신을 깎아 낸 이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으응?"

"저놈들은 생각보다 약하고, 우리 사형들은 생각보다 강하거든요."

현영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청명과 화산의 제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때는…….'

이 광경을 보는 것이 그의 꿈이던 시절이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매화가 새겨진 무복을 입고 악적들을 물리치며 천하를 종횡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 현영이 바라고 또 바랐던 일 아닌가?

그 꿈만 같았던 일이 지금 현영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장문인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더없이 기뻐하셨을 것을.'

그는 시큰해진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

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제자들의 코앞으로 시퍼런 박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헉!"

그때 현영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악적이 휘두른 도에 윤종의 어깨가 살짝 베인 것이다.

현영이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칼을 맞아?"

"……."

옆에서 심술과 악의가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가 포탄처럼 터져 나왔다.

"아니, 이젠 하다하다 사파 놈들한테 칼까지 맞아? 평소에 수련을 얼마나 안 했으면 저런 허접쓰레기 같은 것들한테 칼을 맞아? 오호라? 평소에 덜 처맞아서 칼이라도 맞고 싶은 모양이지?"

야…….

긴장 풀어야 된다며.

네 목소리 들으면 멀쩡한 사람도 심장마비 오겠다, 이놈아.

하지만 그런 현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명은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한번 다쳐 봐! 내가 거기다 소금 뿌려 버릴 테니까!"

청명의 악다구니에, 화산의 제자들이 사기 백배(?)하여 적사대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앞보다 뒤가 더 문제야! 빌어먹을!"

"귀신은 뭐 하나! 저 새끼 안 잡아가고!"

"야, 쟤가 도산데 귀신이 어떻게 쟤를 잡아가?"

"저게 무슨 도사야?!"

화산의 제자들이 이를 악물고 적사대를 찔러 들어갔다.

사실 입으로야 불평을 쏟아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구박이 들려오니 마음이 여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차분해졌다.

덕분에 점점 더 화려한 초식이 펼쳐졌고, 상대는 이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그 광폭한 기세에 밀린 적사대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뒤로 또 뒤로 밀려났다.

"뭔 놈의 검이……."

"어, 어떻게 검으로 저런 형상을……."

그때, 가장 뒤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등에 뭔가가 닿은 것이다.

"아……."

그의 등에 닿은 것은 엽평의 가슴팍이었다.

순간 자신의 실책을 알아챈 적사대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대, 대주님! 저는……!"

"쯧."

엽평이 손을 뻗어 적사대원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제발 사, 살려……."

촤아아아악!

애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살처럼 그어진 도가 적사대원의 목을 깔끔하게 갈라 버렸다.

털썩.

머리를 잃은 육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잘린 목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울컥울컥 바닥을 붉게 적셨다.

전투가 일시에 멈췄다.

모두가 얼이 빠진 얼굴로 엽평과 그의 손에 들린 머리를 바라보았다.

'자기 부하를?'

'……진짜 미친놈인가?'

특히나 화산의 제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끌던 수하를 제 손으로 죽인다는 것은 화산 제자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엽평은 손에 쥔 머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형형한 눈으로 적사대를 노려보았다.

"저깟 어린놈들 하나 제대로 처리를 못 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뒤로 물러나?"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엽평이 이를 드러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대, 대주님……."

"하지만 그 전에."

그의 몸에선 광폭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적사대가 왜 적사대인지 알게 해 주지. 비켜라. 내가 직접 저 애송이들의 목을 따 버리겠다."

엽평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윤종의 몸이 움찔 떨렸다.

뿜어지는 살기를 느끼는 순간 근육이 절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고수.'

적사대는 오로지 적사도 엽평의 하나의 힘만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하더니…….

'대원들과는 그 격이 달라.'

진짜 제대로 된 고수가 마음먹고 살의를 드러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저 새끼는 대가리가 나쁜가?"

그의 등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는 그 짜증에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몸이 느슨하게 탁 풀렸다.

"나대지 말라고 했는데, 통 말귀를 못 알아 처먹네."

청명은 어느새 한 손에 검을 대충 틀어쥐고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뭐, 아무래도 좋지."

윤종을 지나쳐 선두에 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것들에게는 매가 답인 법이지. 이리 와 봐. 그 모가지 예쁘게 잘라 줄 테니까."

적사도 엽평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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