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그 말은 동감이야. (2)
"……지금 뭐라고 했느냐?"
"거, 나이도 아직 많지 않아 보이는데 벌써 귀가 나쁘신가."
청명은 제 귀를 휘적휘적 후비며 어깨를 으쓱했다.
"허허허."
적사도 엽평이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낮은 웃음을 흘렸다.
"어린놈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하하. 그 정도야 알지. 그러니까 분명……."
청명이 손가락을 펼친 채 뭔가 말을 하려다가 움찔했다.
"어……."
그러더니 고개를 획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라고 했었지?"
"……."
"……."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청명아.'
'내가 살다가 사파 앞에서 민망해 고개를 못 드는 날이 올 줄이야.'
"……적사도 엽평."
"아! 맞다!"
청명이 다시 고개를 획 돌렸다.
"적파도 엽평!"
"적사도다! 적사도! 이 새끼야!"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엽평이 눈을 까뒤집으려 하자 방승이 그를 꽉 움켜잡았다.
"대, 대주. 진정하십시오! 저런 어린놈에게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후욱! 후욱! 후욱!"
화가 치민 와중에도 그 말이 옳다 여긴 엽평은 거칠게 숨을 토하며 들끓는 머리를 가라앉혔다.
'이 새끼는 뭐지?'
도 한 자루를 걸치고 천하를 누벼 온 그다. 나름 걸물이라는 것들을 꽤 만나 보았고, 괴짜들도 여럿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리 말 몇 마디만으로 엽평을 흥분시키지는 못했다.
격장지계를 쓴 것이라면 대단하고, 그게 아니라면…… 음, 그건 더 대단하다.
"……어린놈치고는 그 기세가 만만찮다고 느꼈거늘, 천지 분간을 못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구나."
하지만 엽평이 뭔가 말을 이어 가기도 전에 청명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 내가 화산파라는 걸 알면서도 사파 놈이 내 앞에서 주둥아리를 놀리는 날이 오다니."
"……주, 주둥아리?"
엽평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감히 그의 앞에서 주둥아리라는 말을 꺼낸 건가? 저 화산의 어린놈이?
"이……. 이!"
"내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지금 세상이 잘못된 거지. 뭐, 됐어. 그건 차차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고. 일단 그래서, 어떻게 할래? 여기서 처맞을래? 아니면 성 밖으로 나갈래?"
"이 미친놈이!"
엽평이 도를 움켜잡고 앞으로 달려들려 했다.
"대, 대주!"
하지만 방승이 재빨리 그런 그를 황급히 움켜잡았다.
"놔라!"
"지, 진정하십시오! 만만히 보면 큰 코 다치십니다. 저놈이 요즘 사해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화산신룡입니다."
"……화산신룡?"
"예."
방승의 말을 들은 엽평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어린놈이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네놈이 그 화산신룡이로구나."
짐승의 목울음 같은 것이 섞인 그의 목소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후기지수. 종남도 아닌 감히 화산 따위가 우리 앞을 막아서다니! 목이 잘려 봐야 주제를 알 놈들이구나!"
쿠웅!
방승을 뿌리친 엽평이 그 자리에서 진각을 밟았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청명의 뒤쪽에 서 있던 조걸은 그 살기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골이 절로 송연해지고, 전신의 피부를 바늘로 찔러 대는 것만 같았다.
'이 정도일 줄은…….'
입심이야 대단할 것이 없었지만, 그 무력만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단 일 수로 화산의 제자들을 모조리 위협하는 데 성공한 엽평은 이를 갈아붙이며 말했다.
"이래도 우리를 방해하겠다면 모조리 도륙을……."
"거, 진짜 말 너무 많네."
"……."
화산의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명의 뒤통수에 꽂혔다.
"요즘 사파 새끼들은 주둥아리로 싸우나. 뭐 이렇게 말이 많아? 야. 덤비려면 빨리 덤벼. 겁먹었냐?"
"……."
조걸이 고개를 돌렸다.
그 곁에 서 있던 윤종도 당연하다는 듯이 조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형.'
'그래. 네 맘 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더욱 확실해졌다. 저놈은 분명 겁대가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놈인 게 틀림없다.
"이……."
그때, 방승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대주. 제가 잠시……."
"비켜라!"
"헤헤. 그렇게 흥분하지 마십시오. 뭔 애새끼 하나에 그리 열을 올리십니까. 천둥벌거숭이랑 드잡이하시면 대주의 평판만 떨어집니다."
"끄으응."
엽평은 구겨진 인상을 풀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다는 듯 이를 악물고 옆으로 물러났다.
"흐으음."
방승은 재미있다는 듯 청명을 일별하고는 슬쩍 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입만 산 꼬맹이보다 장로로 보이는 이를 상대하는 게 낫다 여긴 것이다.
"보아하니 그쪽이 화산의 장로인 것 같은데, 지금 그대들이 얼마나 무모한……."
빠아아아아아악!
"……."
갑자기 터져 나온 소음에 모두가 황망한 눈으로 방승을 바라보았다.
말을 하던 그의 입에, 어디선가 날아온 신발이 틀어박혀 있었다.
"……."
"……."
그 누구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사이, 방승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이리 애처로울 수 없었다.
"거 진짜."
청명이 맨발이 된 발을 내려놓으며 짜증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 많다고 하는데 이 새끼들이!"
"……."
"……."
백천이 흐뭇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아무리 그래도 말을 하고 있는 사람 입에 신발을 던지면 안 되지. 그건 좀 너무 나갔지.
"아니!"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 새끼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언제부터 사파 새끼들이 화산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주둥아리를 털었다고! 옛날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쳤을 것들이!"
"……청명아, 진정해라."
"그래도 사람인데 말은 하게 해 줘야지."
"기절한 것 같은데?"
딱 봐도 그리 강하지 않은 이였으니, 결국엔 맞아서 쓰러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발에 처맞아 기절한 몰골은 너무도 서글펐다.
저 사람이 깨어나면 얼마나 심한 자괴감에 시달릴 것인가?
백천은 청명을 보며 한 가지를 새삼 더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이놈만큼 공평한 놈이 없어.'
정파고 사파고 관계없이 상대하는 모든 이들을 다르지 않게 대하니, 이야말로 훌륭한 군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리 생각하지 않는 이도 있는 모양이었다.
"……."
엽평은 쓰러져 경련하는 방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참, 꼴이 우습게 됐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눈에서는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어린놈아."
"왜 늙은 놈아."
"……이 모든 것은 너희가 시작했다. 우리를 원망하지 말거라."
"응, 그래. 그쪽도 원망하지 말고."
"……."
엽평은 더 이상 흥분하지 않았다. 싸늘하게 날선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낼 뿐이었다.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 여기서 화산의 끝을 본다! 모두……."
엽평이 막 공격 명령을 내리려 입을 뗀 순간.
"야! 쳐! 가죽을 벗겨 버려!"
"……야!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더 사파 같잖아!"
"간다!"
청명이 엽평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선수를 쳐 버렸다. 이윽고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어엇."
선수를 빼앗긴 엽평은 달려드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움찔했다.
'아니…… 이것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적사대를 이끌며 정파 놈들과 충돌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런 놈들은 정말 난생처음 봤다.
"죽여라! 모두 죽여 버려!"
엽평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적사대가 뒤늦게 화산파를 향해 뛰어 나갔다.
서안의 관도 한가운데, 만인방의 적사대와 화산파의 제자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후욱!'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얼굴로 피가 몰렸다. 검을 잡은 손이 평소와 달리 벌벌 떨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진정하라고!'
강자를 상대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 저 청명이 놈 때문이지만, 조걸은 평범한 문파의 삼대제자가 겪을 수 없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분명 다른 문제다. 우선 저들이 뽑아 든 도는 절대 조걸을 제압하거나 단순히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목을 치고 목숨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물론 과거 혼원단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때는 그저 청명이 싸우는 걸 구경하는 것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살의를 품은 이와 직접 검을 맞대는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빌어먹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침착함을 유지하려 해도 달아오르는 열기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쇄애애애액!
그 순간 그에게 달려든 적사대원이 커다란 박도를 휘둘러 조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어엇.'
조걸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기겁을 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괜찮겠느냐?"
"네?"
현영이 걱정 어린 얼굴로 청명을 보며 물었다.
"아이들이 실전을 경험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지 않느냐. 물론 나는 저 아이들을 믿고 있지만, 혹여나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다치는 이가 나올까 봐……."
"아, 그거요?"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별거 아니에요."
"응?"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세요. 대처할 수 있게 해 뒀으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런 수련을 한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내가 모르는 것이 있더냐?"
"아뇨. 그냥 그게 전부예요."
"……그런데?"
현영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에 보셨던 그 수련이면 돼요."
"……으응?"
"뭐…… 긴장해서 제 실력을 발휘 못 했다거나, 강호 초출이 실수를 저질러 안타깝게 죽는다거나. 뭐 그런 걸 걱정하시는 거죠?"
"그렇지."
"호랑이가 긴장해서 토끼한테 맞아 죽는 것 보셨어요?"
"……못 봤지."
아니, 그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지.
청명이 거 보라는 듯 턱짓했다.
"실력 발휘를 못 했다느니, 긴장했다느니 하는 그런 변명은 평소에 제대로 수련하지 않은 놈들이나 늘어놓는 거죠. 애초에 수련이라는 건 긴장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걸 전제로 해야 하는 건데."
"……."
"긴장이고 나발이고 일단 더 세면 이기는 거예요. 실력을 반만 발휘해도 이길 수 있으면 돼요."
"그럼 우리 애들이……."
"네, 뭐……."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설마 사파 새끼들한테 지겠어요? 뒈지려고."
"……."
현영은 앞쪽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부디 다치지 말거라, 얘들아.'
니들 다치면 좋은 꼴 못 볼 것 같다.
카아아앙!
검에 막힌 도가 뒤로 튕겨 나갔다.
'엇?'
공격한 이와 막아 낸 이 중 더 당황한 건 오히려 막아 낸 쪽이었다.
조걸은 살짝 멍한 얼굴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적사대원을 바라본다.
'뭐…….'
왜 튕겨 나가지?
아니, 딱히 밀친 것도 아닌데?
"이, 이놈이!"
하지만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도를 회수한 적사대원이 악에 받친 얼굴로 다시 달려든 것이다.
하나.
'느려?'
강맹한 기세는 분명 훌륭하다. 하지만 날아드는 도의 속도는 조걸이 생각한 것과 다소 달랐다.
차라리 팽가의 도가 훨씬 더 빠르고 강맹했다.
카아앙!
그의 검과 도가 다시 충돌했다. 새파란 검기가 실린 그의 검이 붉은 도기를 품은 적사대원의 박도를 한 치쯤 파고들었다.
"이, 이 애송이 놈이!"
적사대원은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도를 밀치더니 어깨를 들이밀어 왔다.
하나.
'뭐 하는 거지?'
조걸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적사대원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슬쩍 뒤로 뺐다. 그러자 되레 적사대원의 자세가 형편없이 무너졌다.
"하앗!"
그리고 조걸은 그 자세가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검이 먼저 움직여 텅 비어 버린 어깨를 베었다.
"크윽!"
적사대원이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흩뿌려지며 바닥을 붉게 적셨다.
"호오……."
조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처음보다 한층 여유로워진 얼굴로 검을 슬쩍 겨누며 너스레를 떨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 내가 너무 쫄았네."
"이, 이 말코 놈이!"
조걸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해?"
조걸의 귓가에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져 버려!"
오냐!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한 조걸은 청명을 닮은 사악한 미소를 내건 채 적사대원에게 달려들었다.
"대가리를 깨 주마!"
사기 백배한 조걸의 검이 적사대를 거침없이 휩쓸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