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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68화 (368/1,567)

368화.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3)

"하하하하. 그 표정들 보셨습니까?"

"봤지요. 보다마다요. 눈이 있는데 어떻게 그걸 못 볼 수가 있겠습니까? 아주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더군요."

"하하하하하핫! 그렇지요. 그래!"

서안 북쪽에 위치한 종남 속가 화적문(和迪門)에선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화산 놈들이 입도 떼지 못하는 꼴이라니!"

화영문에 몰려가 화산의 제자들을 압박하고 돌아온 종남 속가의 문주들 몇이 화적문에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화적문의 문주 조호방(曺湖方)이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이 서안이 어떤 땅입니까? 감히 화산의 잡배들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이를 말입니까!"

다른 종남 속가의 문주들도 연신 박수를 치며 그 말에 동의했다.

"종남이 봉문 하지 않았다면 감히 화산 따위가 서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저 승냥이 떼 같은 것들이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서안으로 발을 뻗었나 본데, 우리가 있는 이상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저들도 이 서안이 녹록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없이 유쾌했다.

서로가 서로를 문주라 칭하며 존대하고는 있지만, 이들도 속가 나름의 배분으로 얽힌 관계였다. 그 끈끈함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모두가 힘을 합쳐 외적(?)을 몰아낸 상황이니 더욱 서로가 돈독하게 느껴지고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한데 남 문주께서는 왜 그리 일찍 가셨습니까?"

"아무래도 봉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으음."

조호방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의 봉문은 그들과도 상의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종남 같은 거대 문파가 봉문을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대 문파들이 속세와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자신들의 무학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딸린 입들이 있는 이상 세상과 왕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 년씩이나 봉문을 한다면 피해가 만만치 않을 텐데, 장문인께서는 왜 그리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단 말씀입니까?"

"글쎄요. 그분의 깊은 뜻을 우리 같은 이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믿고 따를 뿐이지요."

"으으음."

조호방이 침음성을 흘리자, 복연문의 문주인 유해상이 미소 지으며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더 힘을 내야지요. 장문인께서 봉문을 푸셨을 때, 우리가 서안을 단단히 지킨 것을 보시면 얼마나 기꺼워하시겠습니까?"

"그렇지요. 그 말이 맞습니다."

살짝 표정이 풀어진 조호방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잔에 따라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탁!

잔을 내려놓은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려면 저 화영문인지 나발인지 하는 것들을 이 서안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게 쉽겠습니까? 화산이 지원을 할 텐데. 제자가 하나도 들지 않는다 해도 화영문을 일 년 정도 운영하는 것은 화산의 입장에선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허허.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예?"

"화산도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화산이 서안에 속가를 열었는데 제자가 하나도 들지 않았다는 소문이 천하에 퍼질 텐데, 그걸 어찌 버티겠습니까?"

"아아. 과연 그렇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길어야 한 달입니다. 딱 한 달만 몰아붙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서안에서 도망가야 할 겁니다. 하하하하하핫!"

조호방의 웃음소리가 더없이 통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앞에 마주 앉은 종남 속가의 문주들도 덩달아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콰아앙!

"뭐!"

"웬 놈이냐!"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앉아 있던 모두가 기겁을 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문주들이라 상황 파악은 빨랐고,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할 새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 이게?"

그리고 모두 눈을 부릅뜨며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멀쩡하던 정문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 연무장에 널브러져 있었다.

"화영문?"

누군가의 입에서 화영문의 이름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이 서안에서 그들과 적대하는 이들은 화영문과 화산밖에는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저기!"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본 속가문의 문주들은 이내 그 예상이 틀렸다는 걸 알아챘다.

물론 화산이 정파답지 않게 우락부락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들어서고 있는 이들은 그 '기질'이 확연히 달랐다.

진득하고 날카로운.

정파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파였다.

"웬 놈들이냐?"

조호방이 내력을 담아 위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사자후를 듣고도 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쿠웅!

반으로 갈라진 현판이 연무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

조호방이 눈을 부릅떴다.

현판이란 한 문파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것을 잘라 던지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극명하지 않은가.

"이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조호방이 내력을 잔뜩 담아 다시 외쳤다.

상대를 위협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아직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의 의도가 먹혔는지, 이내 안쪽에서 검을 챙겨 든 화적문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문주님!"

"웬 놈들이냐!"

그리고 일제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까지 고요하기만 했던 화적문이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때.

"쯧쯧쯧."

그 팽팽한 공기를 깨며 한 사람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거참, 정파 놈들은 왜 이렇게 말투가 다 똑같은지 모르겠네."

그러자 주변에서 낄낄거리는 웃음과 동조하는 말이 새어 나왔다.

"저 웬 놈들이냐는 말만 살면서 백 번은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어차피 문 부수고 들어온 사람이면 목적 빤한 것을. 그냥 칼이나 뽑아 싸우면 되지, 누군지 알아서 뭐 하려고."

앞으로 나선 이, 엽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박살 날 놈들이 말이야."

"넌……?"

"……문주님……."

그때 돌연 조호방의 옆에 선 유해상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여, 엽평입니다."

"……지금 뭐라 하셨소?"

"저, 적사도 엽평입니다!"

뒤늦게 상대를 알아본 조호방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마, 만인방(萬人房)의 적사대(赤蛇臺)?"

"그,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아연한 눈으로 엽평을 바라보았다.

만인방의 적사대가 왜 갑자기 서안 땅에 나타나 화적문에 쳐들어온단 말인가?

'상황이 좋지 않다.'

만인방은 단독으로 종남과 승부를 겨룰 수 있는 거대 문파다. 정파와 대립하는 사파 최고의 세력인 신주오패 중 하나가 만인방 아니던가?

그 만인방에서도 주력이라 불리는 적사대라면 감히 화적문 따위가 대적할 수 있을 상대가 아니다.

조호방의 등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마, 만인방이 여기에 무슨 일이시오?"

그 말을 들은 엽평이 껄껄 웃었다.

"뭐 인사라도 하러 들렀으려고? 쥐새끼 같은 놈이 머리를 굴리는 구나."

명백한 비웃음에 조호방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물론 그라고 해서 적사대가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다. 만인방이 서안을 호시탐탐 노려 왔다는 건 종남의 속가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은 종남의 위세에 눌려 감히 서안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이럴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야 했는데!'

종남이라는, 서안을 보호하는 거대한 성벽이 사라져 버린 이상 언제든 적이 침입할 수 있다. 본래라면 종남의 속가 모두가 모여 이런 사태를 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화산 놈들 때문에!'

화영문에 정신이 팔려 정작 진짜 적을 방비하는 데에는 소홀해 버린 것이다.

조호방의 눈이 암담하게 침잠했다.

"이 무슨 무도한 짓이요! 이런 짓을 벌이고도 감당할 수 있겠소?"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종남이 봉문을 풀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조호방의 말에 적사도 엽평이 낄낄 웃었다.

"방승."

"예, 대주님."

"역시 정파 놈들은 참 좋은 놈들이야. 어떻게 적까지 저렇게 걱정해 주는지 모르겠네. 다들 부처님들이신가?"

"제 걱정이나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엽평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하느냐. 헛소리 계속 듣고 있을 거면 나는 한숨 자련다."

그러자 상황을 주시하던 적사대가 일제히 도를 뽑아 들었다.

챙!

마치 한 사람이 뽑은 것처럼 단숨에 울려 퍼지는 발도(拔刀)소리가 화적문도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식혀 버렸다.

"아, 참."

그 광경을 당연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보던 엽평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죽이지는 마라. 오늘 저놈들을 죽여 버리면 내일부터 귀찮아지니까. 괜히 사람이 많이 죽으면 관에서 끼어들 수도 있고."

"팔다리 정도는 잘라도 됩니까?"

"웬만하면 붙여 놔. 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얻을 것만 얻은 뒤에 빠진다."

"예!"

"죽여!"

"예?"

앞으로 돌진하려던 적사대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엽평을 돌아보았다.

"……아, 습관이 돼서. 쳐라!"

"예!"

적사대가 결국 입가 한가득 비릿한 미소를 내걸고 화적문도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놈들!"

"문주! 일단은 피하셔야 합니다!"

당황한 조호방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적사대는 순식간에 화적문도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악! 악! 내 팔!"

애초에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종남의 속가라고는 하지만, 저들은 종남의 본산 제자들과 대등한 무인들이다. 적당히 무학을 익혀 온 속가 제자들이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조호방과 술을 마시던 속가문의 문주들은 이미 발을 빼고 담장을 넘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저, 저 의리도 없는 놈들."

"쫓을까요?"

"내버려 둬라."

엽평은 달아나는 이들을 심드렁하게 일별했다.

"어차피 서안을 떠나지 않는 이상은 도망가 봤자니까."

그리고 장내의 상황을 보며 눈을 찌푸린다.

"그런데 정말 죽이면 안 되나?"

"절대 안 됩니다."

"거……. 몽둥이찜질이나 할 거면 뭐 하러 싸운단 말이냐?"

"여기는 서안성 안입니다. 이곳에서 사람이 떼거지로 죽으면 관이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까짓 관이 뭐가 무섭다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다르게 말하면, 죽이지만 않으면 우리가 앞으로 서안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종남의 속가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때려잡으면서 말입니다."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군."

엽평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저 멀리 있는 종남산을 보았다.

'병신 같은 놈들이 봉문을 해?'

저놈들이 봉문을 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종남이 봉문을 풀었을 때는 서안에는 종남의 속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될 테니까.

"이, 이놈들……. 후환이 두렵지도 않으냐?"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조호방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엽평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엽평은 우습기 짝이 없다는 듯 웃었다.

"거 정말 착한 사람이로군.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우릴 걱정해 주다니."

"조, 종남! 종남이 절대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허허……. 방승."

"예."

"팔다리 부러지는 정도는 괜찮다고 했나?"

"그 정도야 문제가 있겠습니까?"

"흠!"

그는 좀이 쑤시다는 듯 저벅저벅 조호방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느냐? 바로 호가호위(狐假虎威)다."

그리고 마침내 이를 드러냈다.

순식간에 도를 뽑아내고는 검의 뒷면으로 조호방을 후려쳤다.

콰앙!

조호방은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의식을 잃은 그가 바닥에 널브러지자 엽평은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일 도도 못 받는 것이 주둥아리는 잘도 놀려 댔구나."

그리고 화적문을 쓸어 가는 적사대를 훑어보았다.

"얼른 정리해라! 오늘 밤 내로 두 군데 더 돈다."

"예!"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흘 내로 서안을 완전히 박살 내 주지!'

그 시각.

"……장난 아닌데."

"아이고, 진짜 이거……."

먼 전각의 지붕 위에서 화적문의 상황을 바라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앞에 선 백천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움찔움찔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

"……일단 피는 안 보이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저거 사파 놈들이 저리 공격을 하는데……."

백천과 나머지 제자들은 불안함과 찜찜함이 가득한 눈으로 한쪽을 흘끗 보았다.

꼴꼴꼴꼴.

"카아아아아아아!"

"……."

"술맛 조오쿠나! 역시 싸움 구경하면서 마시는 술이 최고지! 으히히히히힛!"

'원시천존이시여.'

어쩌자고 저런 새끼를 도사라고 내리셨습니까?

거, 실수하셨으면 빨리 다시 거둬 가소서.

으헤헤 웃으며 술을 마셔 대는 청명을 보며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아."

"응?"

"정말 이대로 두어도 되느냐?"

"그럼?"

"……아니, 그래도 사파를 내버려 둔다는 건……."

"누가 내버려 둔대?"

"응?"

청명이 술을 다시 쭉 들이켜고는 눈을 찌푸렸다.

"나는 살면서 내 앞에서 사파가 어쩌고 하는 놈들을 그냥 둔 적이 없어. 저것들은 걸어서 못 나가."

"그럼 지금 내려가야……."

"아, 그런데."

"응?"

백천의 말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이고. 무리를 했나. 허리가 아프네. 좀 천천히 하지 뭐."

"……."

"낄낄낄낄."

더없이 해맑게 웃으며 청명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이이제이! 이독제독이지!"

그렇죠? 장문사형?

- 에라이, 이 썩을 놈아! 네가 그러고도 도사…….

뭐라고오?

죽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걸?

이히히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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