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2)
새 몸으로 다시 살게 된 후로, 남을 패면 팼지 두들겨 맞아 본 적은 없는 청명이다. 아, 물론 눈을 뜨자마자 얻어맞기는 했지만 그건 빼놓고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청명은 주먹도 아니고 돈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청명아, 괜찮으냐?"
뒷목을 잡고 넘어간 청명을 부축한 백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청명이 눈을 까뒤집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 팔아! 천금을 줘도 안 팔아! 당장 썩 꺼지지 못해?!"
"껄껄껄. 거참, 성질이 급한 도장이로군. 그리고……."
남자명이 유감이라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장사도 할 줄 모르는군. 칠 주야만 지나도 장원 값은 반으로 떨어질 걸세. 지금 한 푼이라도 더 챙겨서 나가는 게 이득일 텐데?"
"누가 여기 장사하러 온 줄 알아?"
"아닌가?"
맞죠!
어. 장사하러 왔죠. 그죠.
장사가 뭐 별건가. 돈 벌면 장사지.
"군자는 시류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이미 대세가 넘어갔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손해를 키울 필요는 없지."
와.
말 잘한다.
얼마나 잘하는지 주둥아리에 주먹이 처박혀도 말 계속 잘하는지 알아보고 싶어지네.
딱 한 대만 딱…….
그런 청명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현영이 재빨리 다가와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속삭였다.
"주먹질은 안 된다."
"그럼 칼질은요?"
"그건 더더욱 안 되지."
"끄으응."
청명이 화를 못 이기고 앓는 소리를 냈다.
화산이 돈 몇 푼 받고 물러날 리가 없다는 걸, 저들이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리 찾아와 돈 자루를 던지는 건 화산의 처지를 조롱하겠다는 수작이다.
언제 청명이 이런 꼴을 보고 참은 적이 있었던가?
"끄으으. 대가리가 진짜 단단하신 모양이네. 이렇게 찾아와서 굳이 들이미시는 걸 보면?"
"하하하하. 내게 어디 감히 천하의 화산신룡과 검을 나눌 배짱이 있겠는가? 고매하신 본산의 제자들께서 나선다면 우리야 한주먹거리에 불과하겠지."
아, 얄밉다.
진짜 너무 얄미워서 다 때려 부수고 싶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허허. 그런 게 무어 있겠는가. 말 그대로 장원을 사겠다는 제안을 하러 왔을 뿐이네."
남자명이 턱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물론 화산에게야 이 정도 손해는 별게 아니겠지. 하지만 화영문의 입장은 다르지 않겠는가?"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위립산의 표정을 살폈다. 딱히 표정에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남자명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는 건 청명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속가로서 참 마음이 아픈 일이지. 본산이 벌이는 일에 휘말려서 손해를 보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러니 손해라도 줄여 주고 싶은 마음에 건네는 제안일세."
청명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남자명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다 누구 때문……."
"남 문주."
그런데 그때 여태 잠자코 있던 현영이 입을 열었다.
화산의 장로가 나서자 천하의 남자명도 일단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타협의 여지는 없겠는가?"
"하하, 장로님. 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현영을 바라보는 남자명의 눈이 빛났다.
"화산과 종남의 관계에 타협이라는 미지근한 말이 끼어든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지."
"예. 저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비록 종남이 봉문 하여 그 뜻을 제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장문인께서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셨다면 저희에게 물러나거나 타협하란 명을 내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 종남이니까.
남자명은 이내 단호한 눈으로 현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저희는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절대 화산에 서안 땅 한 평도 내어 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부족함을 아시고 평온한 화음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화산에는 그 조그만 마을이 더없이 잘 어울려 보입니다만?"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진짜!"
청명이 눈을 까뒤집으려 하자 미리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천과 다른 제자들이 조용히 움켜잡아 내리눌렀다.
"장로님이 말씀하고 계시잖아."
"가만히 있어! 워워! 착하지! 기다려!"
남자명은 별 해괴한 꼴을 다 본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장로님도 이해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영문이 이곳에 뿌리내리는 걸 막을 겁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겠네."
"장로님."
현영의 말에 남자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희가 과격하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외에도 화영문을 괴롭힐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서안에 발을 뻗으려 했던 문파들이 없었겠습니까? 지난 백 년간 그런 곳들이 모두 밀려난 이유가 뭐겠습니까?"
"……."
"서로 심력 낭비하지 마십시다. 좋게 물러나시겠다면 손해는 최대한 보전해 드리겠소이다. 다른 곳에 문파를 여시겠다면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단!"
남자명이 차게 말했다.
"서안은 안 됩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싸늘하기 짝이 없는 일갈이었다.
"특히나 화산은 더더욱 안 됩니다. 만일 종남이 화음에 속가를 열려 한다면 화산은 이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으음."
현영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남자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화산의 땅이 아닙니다. 더 시간을 끄신다면 더욱 큰 손해만 보게 되실 겁니다. 그럼."
그 말을 끝으로 남자명이 몸을 획 돌렸다.
그러자 따라왔던 속가 문주들도 비웃음을 흘리며 함께 돌아섰다.
청명이 끝내 백천 무리를 뿌리치고 앞으로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돈 자루를 잡아 남자명에게 던졌다.
"물건은 챙겨 가야지!"
턱!
남자명은 미소를 지으며 날아든 돈 자루를 받아 들었다.
"아직 자존심은 남았다는 거군.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지."
그리고 청명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화영문을 빠져나갔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종남 속가의 문주들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장로님……."
위립산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현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할 것 없네. 이정도 반발쯤은 당연히 예상을 했으니까."
하지만…….
'종남의 봉문으로 인해 상황이 너무 격해졌다. 이 일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고민이로구나.'
현영이 슬쩍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독이 오른 사냥개처럼 으르렁대고 있는 청명을 보며,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풀어 버려?'
아니다. 이건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진짜.
늦은 밤.
끼이이이익.
새로 단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이 작은 소음과 함께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이내 시커먼 무복을 입은 야행인이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질끈.
얼굴에 쓴 복면 끈을 꼭 조인 그는 파공음 하나 내지 않고 솟구쳐 지붕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동작 그만."
"……."
그를 막아서는 목소리가 있었다.
복면인의 고개가 획 뒤로 돌아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저건 무림의 상록수여. 어떻게 변하는 게 없어."
"야! 매화검은 들고 가면 안 되지!"
복면인이 눈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긁는 듯한 목소리로 부자연스러울 만큼 낮게 말했다.
"애송이들이 감히 나를 막겠……."
"청명아. 복면 삐뚤어졌다."
"아, 진짜?"
"……."
"……."
복면인.
아니, 청명이 손을 들어 복면을 고쳐 썼다.
그 모습을 보며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로님이 대가리를 깨면 안 된다고 하지 않느냐!"
"안 깬다니까!"
청명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다리몽둥이 정도는 부러뜨려도 되겠지! 기왕이면 팔도 좀 비틀어 버리고!"
"……솔직히 솔깃하긴 한다만."
낮에 찾아와 능글거렸던 남자명의 태도만 생각하면, 청명이 나설 것도 없이 그들이 먼저 남자명의 대가리를 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화산은 서안에서 모든 민심을 잃게 될 것이다.
"속가 놈들만 해결한다고 끝날 일이면 나도 그럴 거다. 하지만 힘으로 속가를 깨고 서안을 점령한다면 민심은 얻을 수가 없다니까! 그럼 계속 종남의 속가가 생겨나게 될 거다."
"그럼 생기는 족족 깨면 되지!"
"……종남 본산의 봉문도 언젠가는 풀린다."
"그럼 종남도 깨 버리면 그만이지!"
"……나는 한 번씩 네가 왜 정파에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다."
사파에 입문했으면 천 년에 한 번씩 나올 만큼 탁월한 인재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어쨌든 절대 안 되니까 그 복면 벗고 다시 들어가라."
"아냐, 사숙. 사실 내가 지금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딱 한 시진만 나갔다 올게. 딱 한 시진이면 된다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내려가, 인마!"
하지만 백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화가 치민 청명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침을 탁 뱉으려다 움찔했다.
아, 복면 썼지.
"웬만하면 말로 하려고 했지만, 정 막겠다면 어쩔 수 없지."
청명이 허리에 찬 매화검을 탁 치며 위협했다.
"서로 피 보지 말고 못 본 척하지?"
"아니, 이게 칼부림까지 해 가면서 갈 일이냐? 인성은 화산에다 두고 왔냐고!"
백천이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지르자 곁에서 조걸이 작게 속삭였다.
"사숙. 그런 건 원래 없었습니다."
"아, 맞다. 그렇지?"
잠시 착각했네.
"여하튼 너 이대로 가면 우리가 장로님한테 죄다 고할 거다. 몇 달 동안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싶으면 가 보시든가."
"끄으으으응."
청명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니, 사형제라는 것들이 도움은 못 줄지언정!'
어찌 종남 놈들 대가리 깨는 일을 막는단 말인가?
'옛날 사제들이었으면 좋다고 등을 떠밀었을 텐데.'
사형! 장문사형!
애들이 이상해졌습니다.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 원래 그랬어, 이 미친놈아!
에이.
거짓말!
"몰라. 아무튼 나는 간다!"
"못 보낸다니까!"
"그러다가 진짜 나한테 호온난다. 자, 눈 딱 감고 길만 열어 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할 수 있잖아. 그치?"
"여기야 아무 일도 없겠지! 다른 데서 일이 생기니 문제지!"
"아니. 진짜 말이 안 통……. 이씨, 근데 아까부터 뭐가 이리 시끄러워?"
계속 어딘가에서 잡음이 들려오는 바람에 짜증이 치민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응?"
잠깐만.
시끄럽다고?
"뭐지?"
"정말 뭐가 시끄러운데?"
청명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도 모두 고개를 쭉 내밀어 화영문 밖을 살폈다.
"어? 저거?"
"응?"
"저기 뭔가 오는데?"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호인?'
그의 시야에 한 무리의 강호인들이 관도를 타고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종남 속가? 아니, 아닌데?"
기질이 다르다.
종남의 속가들은 그래도 나름 명문 정파의 속가들이라 맑은 기운을 흘리니까.
그런데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이들의 몸에선 거칠기 짝이 없는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지고 있었다.
'사파?'
그래. 굳이 따지자면 사파에 가까운 기운…….
"서안에 사파라고?"
"뭐지, 저거?"
"이쪽으로 오는데?"
화산의 제자들도 모두 이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몸을 돌렸다.
"입구로!"
"알았다!"
청명이 먼저 몸을 날리자 모두 그의 뒤를 따라 경공을 펼쳤다.
순식간에 화영문의 입구로 이동한 그들은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조금 긴장한 눈으로 관도를 바라보았다.
"온다!"
그리고 이내 관도 끝에서 백이 훌쩍 넘어가는 인원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뻘건 홍의로 전신을 두른 살벌한 인상의 무인들은 화영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고수?'
청명은 살짝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녹록하지 않은 실력을 지닌 것 같았지만, 특히나 저들 뒤에서 따라오는 누군가가 내뿜는 기세는 청명을 슬쩍슬쩍 자극할 정도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잠깐 그들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은 시선을 고정한 채로 턱짓하며 말했다.
"조걸 사형."
"응?"
"내가 신호하면 안으로 튀어 들어가서 모두 깨워."
"……알겠다."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모를 이들은 아니었다.
모두가 전신에 내력을 끌어 올리며 긴장을 유지했다.
그러는 사이 관도를 타고 들어오던 이들이 순식간에 다가와 화영문의 입구에 섰다.
"여기냐?"
정렬하던 이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뒤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적사도 엽평.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화영문의 입구를 막고 선 청명을 바라보았다.
"흠?"
그에게서 심상찮은 기세를 느낀 엽평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거 속가문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봤더니 이런 월척이 있구나. 어린놈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청명은 되레 피식 웃었다.
"하, 세상 좋아졌네. 어디 사파 새끼가 나한테 말도 붙이고 말이야."
"으음? 하하하하하하핫!"
적사도 엽평이 껄껄대며 웃어 젖혔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한데 내 하나 물을 것이 있다."
"물어봐."
"너 왜 복면 쓰고 있냐? 이 야밤에?"
"……."
"……."
청명의 옆에 선 모두가 슬쩍 시선을 다른 데로 피했다.
'아, 도망가고 싶다.'
'내가 쪽팔려서 살 수가 없어.'
하지만 정작 청명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썼다. 왜?"
"허허. 과연 천하를 오시하는 종남의 속가답게 배짱이 좋구나. 이 어르신 앞에서 말하는 본새가 아주 대단한데. 오냐! 내가 오늘 화적문을 짓밟아 천하에……."
가만 듣던 청명이 한쪽 손을 들며 말을 막았다.
"잠깐만."
"응?"
"……너 혹시 글자 읽을 줄 모르냐?"
"……."
앞에 선 모두의 고개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현판에 적힌 글자를 확인한 이들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엽평이 입을 다물고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저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대주! 대주! 여기가 아닙니다! 여기는 화영문이고 가야 할 곳은 화적문입니다! 왜 잘 가다 세우고 그러십니까!"
"아, 그래? 여기가 아니야?"
"계속 가십시오! 계속! 저 안으로 가야 합니다!"
"아……."
엽평은 민망한 듯 입맛을 다시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거, 실례했습니다."
"아……. 뭐. 별말씀을."
"그럼 이만."
엽평이 크흠 하고 헛기침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돌아섰다.
"화적문은 어디 있는데?"
"저쪽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니까요."
"그럼 진즉에 말을 했어야지! 에잉!"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멍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지? 저 병신들은?"
청명의 말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하게 굳은 상태였다.
"청명아."
"왜?"
"강해 보이지 않더냐?"
"어. 제법 강하던데?"
"……안 되겠다. 지금 당장 장로님께 알려야겠어."
"왜?"
"화적문이면 종남의 속가가 아니더냐! 누가 봐도 사파인 이들이 이 야밤에 화적문을 찾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은 의도를 품었단 뜻이겠지! 그러니 당장 조치를……."
턱!
급한 마음에 말을 하면서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던 백천의 어깨를 청명이 움켜잡았다.
"아니, 왜 잡……."
뒤를 돌아본 백천은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청명.
그가 세상 다시없는 부드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사숙."
"……응?"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
"그리고 앞으로도 못 볼 거야. 알았지?"
"너, 너…… 설마……?"
"왜? 쟤들이 그랬잖아. 서안 땅은 종남 거라고."
"그, 그렇지. 하지만……!"
"그럼."
청명의 얼굴은 흡사 부처라도 깃든 양 자애롭기 짝이 없었다.
"지들 땅에서 벌어진 일이니 지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해결 못 하면?
그럼 더 좋고.
"아이고오. 하필 종남이 봉문 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네에에. 안타까워 어쩔꼬오오오. 낄낄낄낄."
아니, 저놈은 마귀다.
배를 잡고 웃어 대는 마귀를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쪽이 더 사파 같다.'
'얘는 입문을 잘못 했어. 아까 거기 끼면 완전 딱이겠던데.'
하나 어쩌겠는가.
이미 화산의 제자인 것을.
안타깝기 짝이 없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