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2)
둥둥둥둥!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커다란 북소리 사이로 청명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퍼져 나갔다.
"소림권! 천하제일권을 바로 이 서안에서 배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것도 천하비대회에서 우승한 천하제일의 기재! 혜연 스님이 직접 지도를 해 드립니다!"
"오오오오오오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응하듯 사람들이 목청을 높였다.
"평생을 가도 다시 오지 않을 기회! 바로 지금 화영문에 입문하시면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소림의 권법을 배울 수 있다니!"
"서안에는 소림의 속가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화산의 검도 배울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아니겠는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무리 화산이 지금 기세를 타고 있다고는 하나, 수백 년 전부터 강호의 북두로 불리던 소림에 비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강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두 문파에 대한 인식 차이는 극명해진다. 소림은 지나가던 어린애를 붙들고 물어도 모를 수가 없는 문파인 것이다.
"혜연 스님이라면 훗날 소림의 장문인이 될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지! 그렇지! 듣자 하니 몇백 년에 한 번 나오기도 힘든 인재라고 하더구만! 그런 사람이 직접 권을 가르쳐 준다니! 세상 어디에 가서 이런 호사를 누리겠는가!"
사람들의 눈빛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건 심지어 소림에 입문해도 얻을 수 없는 기회다. 소림에 입문한다고 한들, 저 소림이 그야말로 애지중지 키우는 혜연이 직접 지도를 해 줄 리가 있겠는가?
소림에 입문한 이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몇몇이나 간신히 누려 볼 수 있는 그런 호사였다.
그런데 그 호사를 이 먼 서안의 평범한 속가문에서 누릴 수 있다니. 잡곡을 샀는데 그 안에서 황금알이 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아닌가?
"안 그래도 권법을 배우고 싶었다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검법을 배워서 뭐 하겠는가? 평소에 검을 가지고 다닐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냥 권법도 아니고 소림권법을 가르쳐 준다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식을 줄 모르고 점점 커져만 가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며 청명은 더없이 해맑게 웃었다.
"크으. 여윽시 소림이다!"
뭐?
화산? 종남?
에이. 아서라.
어디 소림의 빛나는 위광에 화산이나 종남 따위를 가져다 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상황에 더없이 기뻐하는 청명과는 달리, 혜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시, 시주!"
"응?"
"이, 이러면 안 됩니다. 소림의 무학은 소림의 제자만이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마음대로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쯧쯧쯧. 얘 봐라, 얘."
"……예?"
청명이 한심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애가 산속에만 있다 보니 순진해 빠졌네? 하여튼 명문거파의 제자라는 애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청명이 슬그머니 혜연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휘감아 당겼다.
"소림권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 나한권을 가르쳐 준다고는 안 했잖아."
"……예? 그, 그게 무슨……."
"소림의 기본 권법이 뭐냐?"
"당연히 나한권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나한권을 가르쳐 준다고는 안 했다니까?"
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게 뭔……."
"쯧쯧. 이 중놈 보소."
청명이 살짝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너는 어디 제자야?"
"물론 소승은 소림의 제자입니다."
"그래. 네가 소림의 제자인데 네가 가르치는 권법이 소림권이지. 심지어 네가 길거리에 널려 있는 삼재권법을 가르쳐도 소림의 무승이 지도해 주는 거니까 소림권이라 할 수 있지. 안 그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하고 묻는 듯한 혜연의 얼굴을 보며 청명은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너는 그냥 기본 권각술이나 가르치면 되는 거야. 이해했어?"
"하, 하지만 그건 사기가 아닙니까!"
"어허! 이 땡중 보소? 어디 이 도장님의 고견을 사기로 몰아가느냐! 몰매 맞으려고!"
혜연이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의 반응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보였다.
청명은 혜연의 목을 휘감고 있던 팔을 살짝 풀고 어깨동무를 해 보였다.
"자, 웃어. 웃어. 사람들이 보잖아. 얼른 친한 척해."
"예?"
"말귀 못 알아들어? 친한 척하라고. 웃어!"
"……하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콱 들어가자 혜연이 어색한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눈치 없는 이들은 연신 감탄했다.
"오! 청명 도장과 혜연 스님이 꽤나 각별해 보이지 않는가?"
"그것 참 신기하군. 저 두 사람은 그 천하비무대회의 결승에서 서로 맞붙은 사이라 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예끼! 고매한 도사님과 스님 사이에는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알 수 없는 높은 의리가 있겠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한 이들은 관계를 떠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과연! 과연 그렇지! 과연!"
혜연의 얼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백천 무리가 흐뭇하게 웃었다.
"고생하네요."
"누가 봐도 불량배에게 잡혀 끌려가는 모습인데."
"이게 뭔가 싶겠지."
그들은 벌써부터 청명의 마수에 놀아나기 시작하는 혜연을 향한 안타까움과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왜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는…….
"심지어 아무도 의심을 안 하네요."
"누가 소림의 혜연이 협박을 받는다고 생각하겠어. 당연히 친한 줄 알겠지."
"세상일이란 참……."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이 광경이 더없이 화기애애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자! 이럴 게 아닙니다!"
청명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저희도 입문자를 무한정 받을 수는 없으니, 이제 입문하실 분들께서는 빨리빨리 줄을 서십시오!"
그 말에 소란이 배는 커졌다.
"나부터 입문을 받아 주시오!"
"입문하면 삼 개월 공짜 맞죠?!"
"뭔 소리야!"
인자한 얼굴로 서 있던 청명이 돌연 눈을 부라렸다.
"그건 어제까지 이야기고! 지금부터 입문하는 사람과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은 당연히 돈을 내야지!"
"……어제까지는 공짜였지 않소!"
"우, 우리 애는 이틀 전까지 나갔었는데, 그럼 그냥 받아 줘야 하는 것 아니오?"
"이 양반들이 양심을 팔아먹었나! 어디 제 발로 나갔다가 염치도 없이 다시 기어 들어와서 공짜로 해 달……. 읍! 읍!"
"하하하하하!"
상황을 지켜보던 현영이 손을 뻗어 청명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를 뒤에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슬그머니 밀어 놓고는 대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희도 혜연 스님을 초빙하느라 심혈을 기울인지라,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공짜로 받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신 지불하시는 수업료가 결코 아깝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으음. 틀린 말은 아니지. 저 혜연 스님에게 배우는 건데 공짜는 말이 안 되지!"
"나는 천금이라도 내고 배울 의향이 있소! 얼마요! 얼마를 내면 되겠소!"
"나도! 나도 내겠소! 우리 애부터 받아 주시오!"
청명이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백천의 손을 뿌리치고는 소리를 질렀다.
"소행아! 손님 받아라! 그리고 이제 수업료는 선불이다. 삼 개월치!"
"그, 그럼 세 냥입니까?"
"웃기는 소리! 아홉 냥이다! 지금부터 수업료도 세 배로 간다!"
"옙, 도장님!"
수업료가 무려 세 배로 올랐음에도 줄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말 그대로 문전성시.
청명은 금송아지를 앞에 둔 사람처럼 더없이 뿌듯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 배고 나발이고 내 돈 가져가라고!"
"으히히히히힛!"
"비켜! 나는 일 년 치 수업료를 미리 내겠소! 그러니 우리 애는 꼭 넣어 주시오!"
"으헤헤헤헤헤헷!"
"시끄럽다! 나는 우리 애 다섯을 한 번에 다 넣고 수업료도 삼 년 치를 한 번에 내겠소!"
"꺄르륵! 꺄륵!"
돈!
돈이 절로 굴러 들어온다!
현영과 위립산도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일전에 화산의 이름만으로 영업을 했을 때와는 그 반응이 극명하다 싶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과연 소림!
천하의 그 어떤 문파도 유명세로는 소림에게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크으. 돈 버는 게 이리 쉬울 줄이야!"
일이 풀리려니 호박이 절로……. 아니, 중이 절로 굴러들어 오네!
이 맛에 사는 거지! 이 맛에!
한껏 기쁨을 만끽한 청명이 돌연 눈을 부라리며 옆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혜연에게 물었다.
"뭐 해?"
"……예?"
"사람들이 저리 좋아해 주는데 나가서 주먹질이라도 좀 보여 줘야지!"
청명의 말에 순간 혜연의 얼굴이 불이라도 붙은 듯 확 빨개졌다.
"……시, 시주. 저는……."
"밥값!"
"……."
청명이 도끼눈을 떴다.
"어디 중이라는 놈이, 거지도 아니고 맨입으로 빌어먹으려 들어! 밥값은 해야지!"
"그, 그건 그런데……."
혜연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청명을 보다가 그의 계속되는 닦달에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수행이다. 이것도 수행이다.'
저 청명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시킬 리가 없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청명의 안에 있는 무거움을 직접 느껴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뭔가 이유가…….
'아니, 정말 이유가 있는 걸까?'
정말?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아 버린 혜연이 앞으로 나섰다.
천천히 나한권의 자세를 잡는 혜연을 보며 중인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혜연 도장이 시연을 한다!"
"세상에, 내 눈으로 소림권을 보게 될 줄이야!"
"이게 웬 일이야! 종남이 몇십 년 동안 속가문을 내면서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불과 열흘도 안 돼서 화산에다 소림까지!"
"화영문이 오고 나서 정말 재미있어지는군! 정말 재미있어졌어! 어허허허헛!"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 혜연이 천천히 주먹을 뻗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또 하나가 가는구나."
"그 와중에 열심히 하는 것 좀 보십시오. 저건 배워야 합니다."
"불쌍해."
윤종과 조걸, 유이설의 말을 들으며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불가에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느냐(我不入地獄 誰入地獄)?'
라는 말이 있다지 않느냐. 그야말로 높은 스님이시다."
"……그거랑 좀 다른 문제 같은데."
여하튼.
어쨌거나 지옥인 건 마찬가지니까, 뭐.
"어쨌거나 문제는 해결된 것 같은데요."
"……악운도 운이라지만……."
화산의 제자들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꺄르르륵! 꺄륵!"
"……정말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해결을 하네. 저 독한 놈."
"그러게요."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문주님. 이를 어찌합니까?"
"……."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남자명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갔다.
'이런 요망한 수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권법을 펼치는 혜연과 그런 그의 뒤에서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눈을 파고들었다.
살면서 수많은 상황을 겪었지만, 이토록 속을 뒤집어 놓는 광경은 맹세코 이게 처음이었다.
"이렇게 되면 화영문을 직접 압박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끄응."
남자명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화영문이 기세를 과하게 올린다면 화산의 제자들이 빠진 틈을 타 그들을 압박하거나, 종남의 이름을 앞세워 시위를 해 볼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소림의 제자가 화영문에 와 있는 이상 그것도 불가능해져 버렸다.
아무리 이곳이 종남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지만, 감히 소림의 제자가 있는 곳을 힘으로 압박할 담략은 없기 때문이다.
"저 간사한 것들이! 제 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소림을 끌어들여?"
"……심지어 그냥 소림승도 아니고 혜연입니다. 그 소림의 방장이 그토록 총애하고, 훗날의 소림제일인이 당연시된다는 자가 아닙니까?"
"……저 무지렁이 같은 것들이."
남자명이 이를 바득바득 갈아붙인다.
그는 혜연이나 청명보다 그들에게 환호하는 서안 사람들에게 더 부아가 치밀었다. 종남이 이제껏 그들에게 해 준 것이 얼마인데 저런 외지인들에게 이토록 격한 반응을 보인다는 말인가?
"내 웬만해서는 참으려 했거늘!"
남자명이 표독한 눈으로 펼쳐진 광경을 노려보다 사갈처럼 일갈했다.
"말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몸으로 알게 해 주어야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군자처럼 굴었는지 말이다."
"화영문을 치실 겁니까?"
"멍청한 소리! 화산과 소림이 함께 있는 곳을 건드렸다가 그 후환을 어찌 감당하려고!"
"하면……?"
"쳐야 할 것은 화영문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환호하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남자명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지자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던 이들이 다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거 일이 너무 커지는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
서안은 마치 불을 붙여 놓은 기름통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