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1)
"대주! 큰일입니다!"
한 사내가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코를 확 찌르는 주향에 눈을 찌푸린 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바닥에 드러누운 이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보십시오, 대주! 대주!"
"에이!"
드러누워 있던 이가 짜증으로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저를 흔들어 깨운 이를 뻥 걷어차 버렸다.
"악!"
나뒹구는 사내를 보지도 않고 그가 버럭 소리쳤다.
"왜 아침 댓바람부터 호들갑이냐! 머리 울려 죽겠구만!"
"그거야 대주가 밤새도록 술을 펐기 때문 아닙니까!"
"그걸 알면 좀 나가라!"
걷어차인 사내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벌떡 일어나 바닥에 누운 사내를 다시 잡아 흔들었다.
"그럴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좀 일어나 보십시오!"
"……이놈이 뭘 잘못 처먹었나?"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슬그머니 물러났을 텐데 이리 난리를 친다는 건 필시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끄응."
사내는 결국 머리를 부여잡고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으……. 머리가 깨질 것 같구나."
"주독을 날리면 될 게 아닙니까. 천하의 적사도(赤蛇刀) 엽평(葉平)이 숙취로 끙끙댄다고 하면 천하가 비웃을 겁니다!"
"비웃으라지. 그래서 뭔 일인데?"
"종남이 봉문을 했답니다."
"그래. 봉문을……. 뭐?"
적사도라 불린 이의 몸에서 일순 맹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종남이 봉문을 했답니다! 앞으로 최소 일 년간은 대외활동을 금한다고 합니다."
"……그놈들이 미쳤나? 갑자기 왜 그런대?"
"이유야 알 게 뭐겠습니까! 중요한 건 그놈들이 봉문을 했다는 거지요."
"그래?"
적사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창문 열어라."
"예!"
사내, 괴호리(怪狐狸) 방승(方昇)이 재빨리 창들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쌓여 있던 주향이 금세 빠져 나갔다.
"읏차."
적사도는 조금 전까지 숙취로 끙끙대던 일이 다 거짓이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다시 자세하게 말해 봐라. 봉문이 확실하더냐?"
"예! 확실합니다."
적사도 엽평이 영 못미덥다는 눈으로 괴호리 방승을 노려보았다.
"네가 확실하다고 말한 것치고, 제대로 된 것이 몇이나 있었느냐! 이번에도 일이 잘못된다면 네 입을 찢어 놓고 말겠다! 그 말을 믿었다가 종남 놈들이 봉문을 깨면 우리만 낭패를 본단 것쯤은 알고 있겠지?"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어째서?"
방승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 서안에서 화산 놈들이 속가문을 열고 제자들을 받고 있답니다."
"……응? 그걸 종남 속가들이 보고만 있고?"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까! 화산의 본산 놈들이 몰려와 있어서 손도 쓰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 말인즉슨!"
"……종남이 봉문을 깰 생각이 없다는 거로군."
"예!"
"호오."
엽평이 가슬가슬하게 자란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화산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그 종남 놈들이, 화산이 서안에서 활개를 치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종남이 정말 봉문을 했다는 뜻이다.
"대주님!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방주님께서 반드시 서안을 접수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가 내내 서안 주변에서 이리 얼쩡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렇지."
"그동안은 종남이 워낙 강건해서 도무지 틈을 찾지 못했는데, 이리된 이상 과격하게 나가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흐으으음."
엽평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방주님도 참 너무하셨지.'
서안이 어떤 곳인가?
구파일방 중에서도 강자로 분류되는 종남의 안방 같은 곳이다. 그런 곳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물론 영역이라는 게 그렇게 선을 긋듯 딱딱 나뉘는 게 아니니, 방주의 말인즉, 그저 적당히 스며들어 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 종남 놈들이 자기 구역 관리에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발을 들이밀면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데, 버틸 재간이 없었다.
방승은 그게 다 종남이 예전에 안방도 뺏기고 얻어맞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라는데, 그건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여하튼.
"그래서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종남이 봉문을 풀면 어떻게 하라고?"
"이미 그때는 한탕 제대로 한 뒤일 텐데 뭐가 문젭니까. 나가라 하면 나가면 그만이지요."
"그도 그렇다만."
엽평은 여전히 걸린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화산 놈들이 와 있다면서. 요즘 그 화산이 보통 기세가 아니라던데?"
"그래 봐야 후기지수 놈들 아닙니까? 어디 대주님께 비하겠습니까? 적사도 엽평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오줌을 싸며 도망갈 겁니다."
"아부 떨지 마라. 머저리 같은 놈아."
"넵!"
엽평이 턱을 매만지던 걸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화산에 후기지수 놈들이 천하제일의 인재들이라 불린다지만, 그래 봐야 고작 후기지수다. 그런 햇병아리들에게 떨어서야 어디 신주오패(神州五覇)중 하나인 만인방(萬人房)의 적사대(赤蛇臺)라 할 수 있겠는가?
"서안이라……."
엽평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주께서 좋아하시겠구나. 준비해라. 서안으로 간다!"
"예!"
천하를 오시하는 다섯 곳의 사파(邪波).
신주오패 중 한 곳. 만인방의 적사대가 종남의 공백을 노려 서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미타불."
화영문에 마련된 접객실에 앉은 혜연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그 와중에도 슬쩍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건 잊지 않았다.
"마셔."
"감사합니다."
그는 청명이 내민 찻잔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청명을 응시했다.
"허허."
현영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래. 이미 화산에는 들렀다고 하시었소?"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장로님. 저는 소림의 일개 무승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되겠는가?"
"예. 그것이 옳습니다."
현영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잘 배웠군.'
예의범절이고 나발이고 일단 죄다 팔아먹고 갈수록 산채화 되어 가는 화산의 제자들만 보다가 소림의 제자를 보니 뭔가 살짝 개안을 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혜연이 마음에 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 어쨌든, 화산에는 이미 들렀다고?"
"예. 장문인을 만나 뵙고 말씀을 듣고 오는 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곳에 있으니 이곳에서 허락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아미타불."
나직하게 불호를 외는 혜연을 보며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뭐, 거두절미하고. 그래서 왜 왔는데?"
"시주."
그러자 혜연의 시선이 정확하게 청명에게로 꽂혔다.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엥?"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미타불."
혜연은 바로 답하는 대신 가만히 불호를 외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이들 앞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사문에 누가 되는 일이었다.
"이곳에 제 길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뭐래?"
"……예?"
청명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여하튼 이놈의 땡중 새끼들은 아주 입만 열면 선문답이야! 서당 보내서 말하는 법부터 다시 가르쳐야……. 읍읍."
"아하하하하하."
현영이 웃으며 청명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하하. 자네가 너그러이 이해하게나. 알다시피 우리 청명이가 워낙 직설적이어서."
"괘, 괜찮습니다."
혜연의 뒤통수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무장 위에서 본 것보다 더하구나.'
그때는 사람이 굉장히 화가 나 있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원래 그런 사람인 모양이다.
그때 현영이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이곳에 그대의 길이 있다고 하였는가?"
혜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전의 비무대회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더없이 떳떳하다고 생각했던 제 사문조차 그리 올곧지는 않다 느꼈습니다."
"으음."
현영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화두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저는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곳에서 제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보고 배우려 합니다."
"잠깐, 뭘 어쩐다고?"
"……보고 배우려……?"
"여기서?"
"……."
현영이 적잖이 당황한 것을 보며 혜연은 그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 말인가?
"……그러니까……."
현영이 슬쩍 청명의 옆모습을 보고 다시 혜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굴 보고 배운다고?"
"……."
당당하게 배를 내민 청명과
'이 새끼가 제정신인가?'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의 현영. 그리고 그 뒤에서 속닥대는 화산의 제자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혜연 역시 당황하여 모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천이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입을 열었다.
"저…… 혜연 스님."
"예. 말씀하시지요, 백천 시주."
"왜 하필 저놈……. 아니, 여기에서 뭘 배우겠다고 하시는지?"
혜연이 살짝 심호흡을 했다.
"올곧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올곧다?"
백천이 되묻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문 역시 그렇겠지만, 불도를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미혹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화두 앞에서 자신의 길을 관철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저 역시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한 사람의 승려에 불과합니다."
"……."
"하나 저는 청명 도장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느꼈습니다. 하여, 어떻게 해야 그토록 흔들림 없는 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려 합니다."
"흐으으음."
청명이 옆에서 슬그머니 배를 내밀었다. 그 꼴을 본 백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생각이 없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이 멍청한 양반아!'
그게 좋은 게 아니야!
사람이 좀 좌우도 돌아보고 흔들리기도 하고 그래야지!
백천의 눈에 지금의 혜연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제 발로 신나게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현실이 힘들다고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갈 이유가 있냐 이 말이다.
가만 듣던 현영이 다시 물었다.
"귀문의 방장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는가?"
"허락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막지도 않으셨습니다. 불법이란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 방장께서 저를 막으신다 해도 그 선택에 주저함이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청명이 노골적으로 귀를 후볐다.
"좀 짧게 말해라, 짧게!"
"……그냥 왔습니다. 말리시긴 했는데."
"그래. 그렇게 말하니 얼마나 좋아."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화산의 제자들은 영 좋지 못한 속을 달래야 했다.
'벌써 시작인가?'
'저 스님도 제정신은 아니네. 대체 저런 놈에게 뭘 배우겠다고?'
'이렇게 또 한 놈이 가는구나.'
현영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화산에 머무르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장로님."
"장문인께서는 여기 와서 허락을 구하라 하셨고?"
"예. 제가 보고 배우고자 하는 이의 허락이 중한 거라 하셨습니다."
"흐음."
현영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뭐,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죠. 제가 제 발로 와서 구르겠다는데 굳이 밀어 낼 이유도 없고요."
'굴러?'
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하지만 그가 채 물어보기도 전에 청명이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더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잘 왔어. 잘 왔어."
"……."
"크으. 이게 사람의 인연이지. 어떻게든 안면을 익혀 두면 알아서 구르겠다고 찾아오……. 아니, 서로 좋은 관계가 되고 그러는 거지. 안 그래?"
"그, 그렇습……."
"대신!"
"……."
청명의 미소가 살짝 미묘해졌다. 그는 혜연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화산에 공짜 밥은 없어. 먹여 주고 재워 주는 대신에 일은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아미타불.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시주. 소림 역시 제 일을 하지 않는 이에게 공짜 밥을 먹이지는 않소."
"아, 그래?"
청명이 더없이 흐뭇하게 웃으며 혜연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럼 간단하네. 여기 머무르는 대신에 일을 좀 해 주면 돼. 그럼 문제가 없지!"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허락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우리 사이에."
"아…….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시주!"
혜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책 없이 찾아오긴 했지만 이리 쉽게 받아 줄 줄은 몰랐다.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앞에서 열흘이고 한 달이고 빌 각오도 하고 있었건만, 생각보다 훨씬 쉽게 해결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과연 넓고도 넓구나.'
입장을 바꿔 화산의 제자가 소림에 이런 부탁을 했다면, 소림은 어찌했을 것인가?
새삼스레 화산이라는 문파가 더없이 열려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혜연이었다.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아. 별거 아냐. 아주 간단한 거. 너한테는 너무 쉬운 일이지."
"……쉬운 일이라 하시면?"
청명이 낄낄대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바로 시작할 테니 금방 알게 될 거야."
"……."
사악하게 웃어 젖히는 청명을 보며 혜연이 영문을 모르고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다음날 아침.
혜연은 허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두 눈에선 물기가 배어났다.
"처어어언하! 비무대회 우승자! 천하제일 후기지수! 소림의 혜연 스님입니다! 여러분! 지금 화영문에 입문하시는 분들에게는 이 혜연 스님께서 직접 소림권! 천하제일의 권법이라는 소림권을 가르쳐 드립니다!"
꽃가루 대신 매화 검기가 사방으로 휘날린다.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 댔다.
"진짜 소림의 혜연 스님인가?"
"설마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려고?"
"세상에. 뭔 화산의 속가에서 소림의 스님이 권을 가르친다는 거야?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가 생각할 게 있겠는가! 가르쳐 준다는데 배우면 그만이지!"
"자식이고 나발이고 내가 가서 배워야겠네! 세상에 서안에 소림이라니!"
우레처럼 쏟아지는 함성에 둘러싸인 채, 혜연은 끝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세존이시여.'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