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일을 좀 더 키워 봐도 되겠군요. (5)
"끄으으으으으."
"으으으으."
"아오!"
이제는 화산의 상징이나 다름없어진, 죽어 가는 신음 소리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굵고 튼튼한 동아줄로 여러 개의 통나무를 줄기줄기 엮은 백천이 전신에서 땀을 쏟으며 그것들을 한꺼번에 끌기 시작했다.
"끄으응."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허리가 따끔따끔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의 옆에서도 다 죽어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으으응. 사숙……."
"왜."
"죽겠습니다."
윤종의 앓는 소리에 백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이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 거기 똑바로 잡아라!"
"이렇게 묻어 버리면 기둥이 비틀어진다지 않느냐! 더 파라! 더 확실하게 파라고! 더!"
"연무장이 될 곳은 자갈 하나 있으면 안 된다고! 그냥 돌만 대충 골라낼 게 아니라, 모조리 파내고 다시 흙만 퍼부어 다져야 한다니까?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
"……."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현영 장로님과 함께 온다고 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했어야 하는 건데.'
현종이나 현상이 이들을 인솔했다면, 절대 이런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영이 누구던가?
화산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살림꾼이자, 동전 한 푼 헛되이 낭비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돈귀신(錢鬼)이다.
물론 지금이야 화산이 워낙 돈을 잘 벌어들이는 문파가 되었지만, 평생을 동전 한 푼에 목을 매고 살아온 현영이다 보니, 돈이 헛되이 낭비되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보질 못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지.'
정확하게는 돈을 써야 할 곳에 쓰는 것도 참지 못하는 편이다. 그가 돈을 펑펑 쓰는 건 제자들을 먹일 때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럴 거면 그냥 공터에 새 집을 올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있는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을 거면 대체 뭐 하러 전각을 삽니까?"
"그리고 우리가 목수도 아니고, 뭔 집을 새로……."
"거기!"
불만을 늘어놓던 제자들이 잽싸게 입을 닫았다. 어느새 현영이 도끼눈을 뜨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농땡이 부리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라!"
"예!"
"예, 장로님!"
백천과 나머지 제자들이 부리나케 달려 통나무를 나르기 시작했다.
영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그런 백천을 바라본 현영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이곳은 화산의 속가문이 설 자리다! 너희가 지금 화산 속가문의 토대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참 좋은 말이다.
여기까지는 말이다.
"그러니 허리를 펴지 말고 작업하란 말이다! 땅 열 번 파고 허리 한 번 편다는 생각으로! 이것도 다 수련의 연장이다. 내공도 있는 놈들이 뭐가 힘들다고 자꾸 낑낑대느냐! 에잉!"
뒷말만 붙지 않았어도 뜨거운 마음으로 호응할 수 있었을 텐데.
백천이 끌고 오던 통나무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제자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무너진 담을 치우고 새로 담을 올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연무장이 되어야 할 마당을 아주 통째로 파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운하라도 파는 줄 알겠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작업은 저 뒤쪽에서 벌어진다.
반쯤 허물어진 낡은 전각은 화산 제자들의 손에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깔끔하게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 토대를 다지고 기둥을 올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쪽! 기둥은 이쪽에 세우셔야 합니다. 어, 무사님! 거, 거기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이! 예이! 바로 그렇게! 아이고, 역시 무사님들이시라 힘이 굉장하시네요. 이게 사람이 들 수 있는 게 아닌데!"
전각을 올리는 현장에는 화산의 무복이 아닌, 작업복을 입을 이들이 몇 붙어 있었다.
청명은 그까짓 전각 대충 올려 버리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현영은 생각이 있는 사람인지라 은하상단에 쳐들어가 황 대인에게 목수를 요청했다. 황 대인은 껄껄 웃으며 기꺼이 목수들을 수배해 주었다.
'왜 그러셨어요.'
그러지 마시지!
여하튼 덕분에 지금 이 꼴이 난 것이다.
"그래도 얼추 뭔가 모양이 잡히지 않습니까?"
"그러게……."
백천은 모습을 갖춰 가는 장원을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못해 버리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부들을 쓰든가 하겠는데, 이놈의 화산 놈들은 어느샌가 까라면 까고, 엎으라면 엎는 인간들이 되어 버렸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이것들은 청명이 시키면 줄 하나 매고 절벽에서도 뛰어내리는 답도 없는 인간들이 아니던가?
그런 이들에게 이깟 노동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별일이 아니기는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지만 그런 백천을 영 거슬리게 만드는 게 하나 있었다.
꼴꼴꼴꼴꼴.
"……."
꼴꼴꼴.
"……."
한쪽 구석에 놓인 평상 위에, 한 놈이 드러누워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귀신은 뭐 하나, 대체. 저거 안 잡아가고!'
사형이고 사숙이고 할 것 없이 흙먼지를 마시면서 일하는데, 저놈이!
백천이 눈을 부라렸다.
"뭐?"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현영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바람결에 나부끼는 버드나무 잎새처럼 부드러워졌다.
"……장로님."
"왜?"
"그…… 딱히 이렇게 일을 하는 것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데?"
백천의 시선이 평상에 드러누운 청명에게로 흘낏 향했다.
"그런데…… 일을 하려면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들어서……."
"이런, 이런. 쯧쯧쯧쯧."
그러자 현영이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자 배의 대제자라는 놈이 이리 생각이 없어서야."
현영의 거침없는 힐난에 백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현영이 그런 그에게 물었다.
"너는 돈 낸 사람이 일하는 걸 본 적 있느냐?"
"……예?"
"집을 올리겠다고 인부한테 돈을 준 사람이 거기에 같이 껴서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이 말이다."
"……어, 없지요."
"그런데?"
현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을 살 돈과, 자재를 구입할 돈은 다 누가 벌어 왔느냐?"
"……그야……."
백천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저 망할 놈이요.
저놈이죠. 저놈.
이건 청명의 청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이라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막말로 지금 화산이 누리는 부유함의 구 할 구 푼은 청명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쳐서 만들어 온 것이 아니던가?
"세상 어디 법도에 돈을 낸 이가 인부들과 같이 일을 해야 한다더냐? 너는 한 문파의 장문인이 되겠다는 놈이 그런 이치도 모르느냐!"
"자, 잘못했습니다."
"이런, 이런. 쯧쯧."
한차례 타박을 하고도 현영의 눈에 어린 못마땅한 기색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귀여운 사질이 좀 쉬고 있으면 뿌듯해하지는 못할망정! 그걸 배 아파해서 시기를 한단 말이더냐! 화산이 언제부터 그리 각박한 문파가 되었느냐!"
반박할 구석은 너무나 많았다.
장로님…….
일단 첫째로 저놈은 귀엽지 않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화산은 원래 그랬습니다.
세상에 화산보다 더 각박한 문파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하지만 목구멍까지 치미는 무수한 말들이 있음에도, 백천은 차마 현영 앞에서 꺼낼 용기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청명이라면, 이 사람은 적어도 두 번째는 되는 사람이다.
그때 이 상황을 말끄러미 보던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도 일해요?"
"아니다. 아니다. 네가 무슨 일이더냐. 네가 이것 아니어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일은 밥버러지 놈들이 할 테니 너는 거기서 가만히! 편안히! 쉬거라, 응?"
"좀 눈치가 보이는 것도 같고……."
"어떤 놈이 눈치를 준단 말이냐! 눈을 확 뽑아 버릴라!"
"……."
장로님.
왜 절 보며 그런 말을 하십니까.
아……. 진짜 다 꺼졌으면 좋겠다.
백천은 결국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네 왔다.
"저…… 백천 도장님. 많이 힘드십니까?"
돌아보니 화영문의 소문주인 위소행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니외다, 소문주."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그런 말씀 마시오. 이건 화산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 소문주가 사과를 하십니까?"
저놈이 문제지! 저놈이!
"그래도……."
"음?"
"……본산의 제자 분들과 청명 도장님 덕분에 이렇게까지 되네요."
"……예?"
백천이 살짝 얼떨떨하게 묻자 위소행이 어색한 얼굴로 답했다.
"종도관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화산에 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화영문을 지켜 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더 큰 것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전부 화산과 청명 도장님 덕분입니다."
백천이 입을 닫았다.
그리고 한쪽에서 제자들과 함께 열심히 자재를 나르느라 여념이 없는 위립산을 힐끗 보았다.
무인이라고는 해도 나름 힘든 노동일 텐데, 위립산의 얼굴에는 조금의 불만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활기차기 그지없는 얼굴로 제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위소행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도 더없이 기뻐하시는 것 같네요."
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겠지.'
화영문주는 항상 담담한 모습을 보여 왔지만, 본산이 힘을 쓰지 못하는 속가가 얼마나 어려운 길을 걸어왔을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님은 항상 화영문을 더 키우고 싶어 하셨습니다. 화영문이 힘을 가져야 본산을 도울 수 있다고 하시면서요.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나이가 드셨죠."
"아……."
"그래서 저는 지금 아버님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좋습니다.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비로소 이뤄 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게 다 청명 도장……. 아니, 본산의 은혜입니다."
"아니외다."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본산의 은혜가 아니오. 이는 위립산 문주님과 화영문도들이 직접 이룬 일이오."
"하나……."
"화산에 남은 속가가 화영문이 아니었다면, 화산은 속가를 지원하려 들지 않았을 거요. 오랜 세월 동안 화산을 믿고 버텨 준 화영문이기에 우리가 이리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거요."
"……."
백천이 위소행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같이 힘냅시다. 화산도, 화영문도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쳐야 하지 않겠소?"
위소행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때,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로님! 저기 두 명 노는데요?"
"이놈들이?"
위소행과 백천이 기겁을 하여 다시 자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마울 만하면 저런다니까!'
'차라리 어디 들어가서 자라, 제발 좀!'
위소행과 백천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얼추……?"
"……와, 이게 되네."
화산의 제자들이 감격 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전각의 모습이 보였다.
기둥을 박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는 것까지는 그들이 할 수 있었지만, 완연한 전각의 형태를 만들기 위한 마무리 작업은 목수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속가문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중요하니까요."
"그렇지."
조걸의 말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도 아니고, 이게 칠 주야 만에 될 줄이야."
"따지고 보면 강호인이라는 건 혼자서 사람 열 명 몫을 하는 최고의 인부죠."
말이나 소보다 더 힘이 세고, 말과 소가 하지 못하는 정밀한 작업도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문파에서는 그리 귀하게 키워 낸 무인들을 이런 일에 써먹는 건 상상도 하지 않겠지만, 화산에서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전각은 올렸으니 이제 개파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럼요. 이제 시작인 거죠."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커다란 산을 하나 넘은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지옥 같은 현영의 잔소리에 시달리고, 낮밤 없이 돌아가는 일에 고통받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완성되어 가는 전각을 보고 있으니 또 하나를 해냈다는 뿌듯함과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동시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상한 소리들을 하고 있네?"
"응?"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뒤에서 심드렁한 얼굴로 전각을 바라보고 있던 청명이 화산과 화영문의 제자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았나? 지금 화영문의 실력으로는 속가를 받아 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응?"
"이제 시작이지."
청명이 사악하게 웃었다.
"원래라면 세 달은 걸리겠지만, 한시가 급하니 조금 과격하게 갈 수밖에. 보름 내에 누가 봐도 당당한 화산의 속가가 될 수 있게 해 드리죠."
"……예?"
위립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백천은 옆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명복을 빕니다.'
살아남으면 강해질 거예요.
……살아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