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일을 좀 더 키워 봐도 되겠군요. (2)
화영문주 위립산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그동안은 관심도 안 가지다가…….'
물론 그도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사람인지라, 이들이 일부러 자신들을 방치한 게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산에 오르자마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던 것도 사실 아니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대뜸 사람을 불러내더니, 하나같이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금송아지라도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다.
"크흠."
지나치게 빛나는 그 시선들에 부담을 느낀 위립산은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상석에 앉은 화산 장문인 현종이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짓더니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리 화영문주를 청한 것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함일세."
"예, 장문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동안 사람을 청해 놓고도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것부터 사과하겠네.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워낙……."
하지만 현종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장문인!"
"……."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위 문주도 다 이해할 테니, 서론 빼시고 본론부터 들어가시지요."
"……."
몇 마디 던지기도 전에 현영이 말을 자르고 들어온 것이다. 평소라면 그를 말렸을 이들도 오히려 동감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대고 있었다.
그 반응들을 보며 현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도사라는 것들이.'
산적도 이리 성격이 급하지는 않겠다. 산적도!
"크흠. 그래, 그러자꾸나."
결국 두 손을 든 현종이 위립산을 똑바로 보았다.
"화영문주."
"예, 장문인."
"이번에 화산에서 서안에 속가문을 열고자 하는데 자네가 그 중임을 맡아 줄 수 있겠는가?"
"서, 서안에요?"
"그렇네."
화영문주 위립산이 눈을 부릅떴다.
물론 그도 아무 생각 없이 화산까지 따라온 것은 아니다. 앞으로 화산이 속가문을 좀 더 밀어줄 생각이란 것은 이미 언질을 받았다. 그래서 그에 따라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화산에 오른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서안이라니.'
하지만 설마 장문인의 입에서 서안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장문인…… 지금 서안에 속가문을 연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영문을 서안으로 이전하는 것도 좋겠지. 그도 아니라면 화영문은 제자들에게 맡겨 두고 위 문주가 서안에 새 문파를 여는 것도 방법일세. 어느 쪽이든 위 문주가 편한 쪽으로……."
"자, 잠시만요, 장문인."
위립산은 자신도 모르게 현종의 말을 끊고 말았다.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워낙 당황스러운 일이다 보니 예의 같은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조, 조금 더 천천히 설명을 좀……."
현종이 거보라는 듯 원망의 눈길로 돌아보자 제자들이 찔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크흠. 그러니까……."
현종은 위립산에게 하나하나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
상황을 들은 위립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떠한가?"
"……장문인. 소인에게 그런 중책을 맡겨 주시는 것은 정말 감읍할 일입니다."
"오."
"하나, 저는 제가 그런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더 나은 적임자가 있지 않겠습니……."
"아니, 문주님!"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명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화산에 속가문이라고는 화영문밖에 없는데, 어디서 다른 사람을 알아봐요? 놀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없다니까! 여기 남은 속가 단 하나! 단 하나라고요!"
"……."
그 말에 화산의 장로들이 얼굴을 붉혔다.
'좀 에둘러서 좋게 말해도 되잖아!'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민망하게!'
'여하튼 저놈은…….'
위립산은 말문이 막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청명을 바라보았다.
'소도장은 장문인이 앞에 있어도 달라지는 게 없구나.'
상록수도 아니고, 어떻게 저리 변함없이 생각이 없…….
"이제부터 속가를 새로 키우려면 그것만 해도 한 세월인데, 그럼 우리가 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은 전설 속에 들려오는 이야기 같은 게 되겠죠.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에요."
그 말은 맞다.
세상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잘 생각해 보세요, 문주님. 이걸 남을 준다고요?"
"……으음? 그건 무슨 소리시오?"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산은 이제부터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속가를 늘려 나갈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화산이 번 돈과 키운 무력이 모조리 거기에 투자된다는 의미죠."
"으음?"
"그런 속가문들을 총괄하는 자리에요. 지금은 역량이니 하며 겸손을 논하시지만, 만약 정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화영문주님에게 지시를 내리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도 허허 웃으실 수 있겠어요?"
"어……."
위립산의 얼굴이 멍해졌다.
지시?
다른 속가 문파의 문주가 그에게 지시?
"그건 좀 생각을 해 봐야……."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죠. 그동안 화영문이 화산에 한 게 얼만데 그 억울함을 참으시려고요? 제가 그 상황이면 속이 뒤집어져서 잠도 못 잘 텐데."
"……."
맞는 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화산이 몰락해 속가들이 있는 대로 이탈할 때도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 온 화영문이 아닌가.
그런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그 힘든 시기를 겪지 않은 문파가 화영문의 상전 노릇을 한다고?
'그건 못 참지.'
위립산의 얼굴이 슬쩍 달아올랐다. 청명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속가문을 맡으면 한동안은 고생스러우시겠죠. 하지만 세상에 고생 없이 얻어지는 것도 있나요? 화영문을 생각하시면 이 기회를 잡으셔야죠. 훗날을 생각해 보세요. 천하에 퍼져 있는 화산의 속가들을 모조리 총괄하는 위치에 오르실……."
"하겠습니다!"
"……빠르시네."
위립산이 단호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은 거겠죠."
"잘 생각하셨어요."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현종을 바라본다.
"하신다는데요?"
"……."
현종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뭔가 사기꾼 느낌이 드는데…….'
……딱히 틀린 말은 없다. 미묘한 과장과 약간의 왜곡이 있었을 뿐, 전체적인 틀은 대동소이하니까.
하지만 그 미묘함이 관건 아니겠는가?
과연 도사가 속가를 붙들고 사기를 쳐도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껄끄럽게 남았다.
하지만 현종은 이제 적어도 청명에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상식을 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이리 선뜻 나서 주니 고마울 따름이네."
"되레 제가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하나 장문인. 정말 이 일을 진행하고 싶으시다면 제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위립산이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화영문은 화산의 속가이긴 하나 화산의 무학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다른 대문파의 속가는 물론이고 웬만한 중소문파의 속가들도 화영문보다는 그 무위가 뛰어난 편입니다."
"으음."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화산의 윗대들이 제대로 된 무학을 익히지 못했는데, 속가에 무슨 수로 전수를 했겠는가?
이건 화영문의 잘못이 아니라 화산의 잘못이었다.
"하여 제가 일전에 화영문의 제자들이 화산에서 수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사 요청을 드렸습니다. 장문인. 아무리 화산이 지금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고는 하나, 화영문의 무위가 뒷받침이 되지 못한다면 속가의 세를 불리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급한 마음을 조금 접어 두시고 화영문의 제자들을……."
"그럴 시간이 없어요."
하지만 청명이 단호하게 위립산의 말을 잘랐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물이 들어왔어요. 어설프게 시간을 끌면 물이 빠져서 맨땅에 노를 저어야 할 거예요."
"으으음."
장로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란 것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모든 일에는 그에 걸맞은 시운이 있는 법이다.
"이쪽의 말도 맞고, 저쪽의 말도 맞으니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현종이 침음성을 흘리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있느냐?"
"네? 문제요?"
청명이 영문을 모르겠단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가 있나요?"
"……."
현종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저 청명이가 위립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저건 이미 해결책이 있다는 뜻이라고 봐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답이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기꺼운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언제나 청명이 내어놓는 대답이 일반적인 것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할 셈이냐?"
"뭐, 간단하죠. 약하면 강해지면 그만이에요. 새로 복원한 화산의 무학을 전수하면 당연히 더 강해지겠죠."
"그야 그렇지만, 그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 아니더냐?"
"에이. 그것도 고정관념이죠."
"응?"
청명이 어깨를 쭉 펴고 말했다.
"화산의 무학을 꼭 화산에서 익힐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속가문을 열려면 화영문도들 대부분이 서안으로 가야 할 텐데, 거기서 익히면 되잖아요."
"……어?"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서안에 새로 연 문파에서, 화영문도들은 새 무학을 배우고, 새로 들어오는 제자들에게 다시 그 무학을 가르치면 되죠. 뭐 하러 번거롭게 일을 두 번 해요? 그냥 한 번에 처리해 버리면 그만인데."
"옳지. 그러면 되지!"
현영이 옳다구나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현종은 그런 그를 영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건 이제 생각도 안 하고 청명이가 말만 하면 옳다고 난리구나.'
이제는 청명이 하는 말이라면 장문인을 갖다 버려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박수치며 옳다고 할 기세다.
"끄응."
현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하면 누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장문인께서 정하셔야 할 일이지요."
"……그래?"
모두의 시선이 현종에게로 모였다.
잠깐 고민하던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아."
"예, 장문인."
"네가 가거라."
"장문인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백천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 했다.
"백자 배들 몇을 선별하고, 청자 배에서도 몇을 선별하거라. 마음 같아선 운암이를 보내고 싶지만, 운자 배들은 화산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어렵겠구나."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운자 배보다는 백자 배가 나은 면이 있었다.
게다가 백천은 오히려 화산의 운자 배들보다 그 명성이 높으니, 속세에서는 운암이나 운검보다 더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현영."
"예, 장문인."
"네가 가서 백천을 도와주거라."
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빠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을 터인데."
"서안이 화산과 그리 멀지 않으니, 네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도록 하마."
"……끄응. 양쪽을 왔다 갔다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늙은 놈 그리 부려 먹으시면 벌받습니다."
"머리도 검은 놈이 엄살 부리지 말거라."
"끄응."
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딱히 그 이상 반발은 없었다.
현영 역시 한 문파를 새로 여는 것에 얼마나 많은 손이 가는지 아는 사람이다. 재정을 관리하는 그가 직접 가지 않는다면 시일이 훨씬 더 소모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럼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고 재빠르게 문부터 열겠습니다."
"그래. 관련된 사항은 모두 네게 일임하마."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백천은 아직 한 가지가 남았다는 듯이 조금 불안한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장문인."
"왜 그러느냐?"
"하나 여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백천이 살짝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놈을 데려가야 합니까?"
딱히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고, 손으로 가리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놈'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시선을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
현종도 미묘한 시선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청명은 당연히 데려가야 한다. 속가문을 여는 일은 지금 화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반드시 청명의 힘이 필요하다.
아무리 종남이 봉문과 다름없이 산에 틀어박혔다고는 하나 서안은 종남의 힘이 가장 크게 미치는 곳이다. 동시에 종남의 속가문들이 우글우글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마음에 걸리는 건…….
'여기서도 사고를 쳐 대는데, 그 큰 도시에 이 녀석을 풀어놓아도 될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결론이 나와 있으니까.
"……데려가야겠지."
"……."
모두가 일제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뭐지? 이 반응들은?
오로지 청명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화산의 문하들과 화영문도들, 그리고 '청명'의 서안행이 결정되었다.
평화로운 도시 서안에는 참 안된 일이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