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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51화 (351/1,567)

351화. 일을 좀 더 키워 봐도 되겠군요. (1)

"그러니까……."

현종의 눈이 앞에 앉은 이들을 한차례 훑었다.

"잘 이야기했더니 그냥 돌아갔다?"

목소리에 불신이 묻어났다. 하지만 앞에 앉은 이들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얼굴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예."

"그렇습니다."

순서대로 청명, 현상, 현영의 대답이었다.

예로부터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하여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마을 한복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도 믿어 줘야 하는 게 정석 아니던가?

"……그리 패악을 부리던 이들이 조용히 돌아갔다?"

"허허. 사람 마음이 갈대와 같다더니."

"……."

능글맞은 현영의 대답에 현종의 눈가가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백천에게로 향했다.

"백천아."

"……예, 장문인."

"사실이더냐?"

"그게…… 어……."

백천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현영, 현상, 청명이 동시에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결국 백천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사, 사실입니다. 사실!"

"……."

현종이 빤히 쳐다보자 백천은 아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현종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서라.'

저 녀석을 괴롭혀서 무엇 하겠는가?

원흉은 바로 앞에 있는 셋인 것을.

"에잉!"

현종이 눈을 찌푸리며 탄식을 흘렸다.

지옥에 떨어질 것들.

어떻게 이리 작당을 하려 그를 속여 먹으려 들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이건 속이는 것도 아니다. 까마귀를 가져다 놓고 백로라 우기는 꼴이 아닌가?

말을 잃은 현종을 보던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 잘 타일렀더니 흔쾌히 돌아가던데요?"

그래, 잘 타일렀겠지.

그 말을 입이 아니라 주먹으로 했을 테니 문제지! 주먹으로!

'아니, 아니지.'

입으로 했을 수도 있겠네.

이 녀석이라면 정말 물어뜯고도 남았을 테니까!

"끄응."

현종이 결국 앓는 소리와 함께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내가 정말 노파심에 묻는 건데."

"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어디다 묻은 건 아니지?"

"에이, 장문인도 참. 그래도 제가 명색이 도산데 그렇게까지 했겠어요?"

어.

너는 충분히 그랬을 것 같아.

"걱정 마세요.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돌아갔……. 어…… 기어갔나? 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청명을 보며 현종이 눈을 딱 감았다.

'그냥 넘어가자.'

이미 다 끝난 일을 들먹여 봐야 서로 피곤할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저 장로 놈들에게 잡혀 이곳에 감금(?)될 때부터 이런 결론을 예상하지 않았던가?

정말 진심으로 막고자 했다면 어떻게든 이곳을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 다들 고생이 많았다."

"별말씀을요. 헤헤."

"……."

그래. 네가 특히 고생이 많았겠지. 네가…….

현종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 버렸다.

"장문인."

그때 현상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으음?"

"이번 일은 그저 웃어넘길 만한 게 아닙니다."

더없이 진지한 그의 표정에, 현종도 굳은 얼굴로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이번 일은 큰 문제 없이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더냐."

"사실 이번 일의 근본적인 원인은, 화산이 외부인들이 보기에도 탐날 만한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화산이 이번 천하비무대회에서 명성을 떨치지 않았더라면, 현당과 그 일가가 이곳을 탐내 산을 오르는 일이 있었겠는가?

"하우량 같은 경우는 당당히 화산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에 그 마수를 일찍 뻗은 것뿐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화산을 이용하기 위해 눈을 시뻘겋게 뜬 이들이 수도 없이 많을 거라는 뜻입니다. 그저 하우량처럼 속내를 일찍 드러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잠자코 듣던 현영이 슬쩍 덧붙였다.

"하나 조금 기이하기도 합니다. 명성이 올라간다는 것은 문파가 강해진다는 의미인데, 과거에 비해 노리는 이들이 많아지다니."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청명이 대신 했다.

"만만해서 그런 거죠."

"……응?"

모두가 그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뚱한 얼굴로 말했다.

"무당이나 소림은 못 건드리지만, 화산은 어떻게 해볼 수 있겠다 싶으니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으음."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빤한 이야기지만, 그 빤한 말이 화산의 약점이라 할 만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나의 탓이로구나.'

냉정하게 말해 화산이 얻은 명성은 모두가 후기지수들의 활약 덕분이다.

물론 타 문파들 역시 후기지수들의 활약을 통해 명성을 얻은 것은 동일하지만…….

'그 문파들에는 후기지수들 위에 일대제자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후기지수의 강함이란 그 윗세대의 강함을 짐작하게 해 주는 척도와도 같다.

무당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이 활약을 한다면 무당의 일대제자들 역시 굳이 실력을 보이지 않아도 강함을 증명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화산에는 그 일대제자와 장로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실력도 크게 모자라지.'

물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운자 배들 역시 피나는 노력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며 자신들의 무학을 재정립하고는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새로운 무학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앞길이 창창한 이대제자와 삼대제자에 비해 문파의 주축이 되어야 할 일대제자와 장로들의 실력이 부족하다 보니 만만해 보이는 문파가 되었다는 의미겠지.'

문파의 실권을 쥐어야 하는 이들은 나약하고, 미래가 되는 이들은 어리다. 그러니 잘만 하면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현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한번 몰락했던 화산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청명의 말에서 그 의미를 짐작한 현자 배들은 저마다 안색을 굳히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눈치가 있는 이들은 모두 상황을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희에게 면목이……."

"그런데 왜 만만해 보인다는 거냐? 우리도 나름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만한 눈치를 갖추지 못했던 윤종이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다.

청명이 그런 그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사형."

"응?"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야?"

"……우리? 우린 도사지."

"그렇지, 도사지. 그것도 이 험해 빠진 산꼭대기에서 무학이나 익히는 도사들. 그럼 산에 처박혀서 도랑 무학만 닦는 도사는 어떤 취급을 받을까?"

"그야……."

윤종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걸이 먼저 대꾸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만만한 호구."

"……그거 너무 적나라하지 않냐?"

윤종이 살짝 충격받은 듯 말하자 조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현실입니다, 사형. 실제로 상가들도 외진 곳에 있는 사찰이나 도관과 거래를 트는 것을 무척 선호하는 편이죠. 물정을 몰라 값을 깎으려 들지 않거든요."

"……그래?"

자신이 할 말을 조걸이 대신 해 주었다는 듯 청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그 영감님들이 화산에 오른 것도 마찬가지예요. 세상 물정 모르는 도사들 정도는 얼마든지 속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으으음."

현종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로구나.'

옆에서 가만 듣던 현영이 신기한 듯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묘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물었다.

"그럼 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영향력을 키워야죠."

"영향력?"

"네."

청명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똑같이 산에 처박혀서 무학이나 익히는 도관은 많아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무당은 감히 손댈 수 없는 문파로 여기면서도 지금의 화산이나 곤륜 같은 곳은 적당히 손대 볼 수 있는 곳으로 여기거든요. 이건 문파의 무력이 얼마나 강하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예요."

"인식의 문제라는 거냐?"

"네. 정확해요."

"흐음."

현영이 확실히 생각해 볼 만한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느냐?"

"알려야죠."

"……알려?"

"네."

청명이 모두를 돌아본다.

"무당이나 소림이 천하를 이끌어 가는 문파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바로 그들의 영향력이 천하에 닿기 때문이죠. 당장 일전에 종도관 일만 해도 그랬잖아요."

"……그 작은 남영에마저 무관을 세우려 했었지."

"네. 그들은 아는 거죠. 아무리 강하다는 평가를 받아도 저 산꼭대기에서 궁상떠는 문파는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이야기를 듣던 조걸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이야기를 좀 해 봐. 어떻게 하자는 건데?"

청명이 눈을 찌푸린다.

"다 들어 놓고는 뭘 물어봐? 우리도 무당처럼 해야지!"

"응?"

"속가야 속가! 멀리 있는 도사보다는 가까운 곳의 주먹……. 아니, 속가가 더 영향력이 강한 법이지. 천하에 무당과 소림의 속가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어마어마하게 많지."

"그래. 우리 집 옆에 소림의 속가문파가 세워지면 소림에 좀 더 친근함을 느끼게 되고, 관심도 더 가는 법이지. 그러다가 어설프게나마 한 수 배우게 되면 은근히 자기도 소림의 제자가 된 것 같으니 뭔 일이 생기면 옹호하게 되는 거고."

청명은 말을 하면서도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향력이란 그런 식으로 키워 가는 법이지."

"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현종이 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영."

"예, 장문인."

"지금 화영문주 위립산이 머무르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갑자기 현당 일가가 찾아오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심상치 않은 내부 분위기에 차마 떠난단 말도 못 꺼내고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속가에 대한 부분을 화영문주와 더불어 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그러니……."

"일을 좀 더 키워 봐도 되겠군요."

현영과 현종이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영문을 옮기든, 아니면 새로운 문파를 열든, 어쨌든 앞으로 화산 속가의 중심이 될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문파를 중심으로 화산의 속가를 천하로 퍼뜨려 나갈 수 있다면 천하의 어떤 이들도 화산을 만만히 보지 못하게 될 겁니다."

"으음."

대략적인 방향이 섰다.

"하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지 않느냐?"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속가문을 세우기에 화음은 너무도 작은 곳이다. 그러니 적당한 곳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때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죠. 여기는 섬서고, 섬서에서 제일 큰 도시는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그게……."

모두의 머릿속에 한곳이 떠올랐다.

서안(西安).

서안은 섬서의 성도이자, 섬서의 모든 물자가 모이는 곳이다. 당연히 인구도 가장 많을 수밖에 없다.

화산이 섬서제일문이자 천하제일문을 노린다면 우선은 서안을 평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참……."

그 서안에 문파를 세우려면 한 가지가 걸릴 수밖에 없다.

"또 종남인가?"

"……끄응."

"이젠 얼굴 마주하기도 지겨운데."

서안은 종남이 꽉 잡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니 그곳에 속가문을 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종남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딱히 원한 때문에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사건건."

이곳에 모인 이들은 새삼 왜 화산이 수백 년 동안 종남과 으르렁거렸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좁은 곳에 이만한 문파가 붙어 있다 보면, 뭘 해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충돌을 피할 방법은 없겠지?"

"에이. 뭐 그리 빤한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그렇지."

청명의 시원한 대꾸에 현종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별수 없구나. 일단……."

그때였다.

"화산신룡! 화산신룡 안에 있느냐? 화산신룡!"

"응?"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목소리가 익숙한데?

자리에서 일어난 청명이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니. 거지 아저씨가 웬일이에요?"

문밖에서 그를 애타게 부르던 홍대광이 청명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왜 밖에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산문에서 한참 기다렸다."

"올 사람이 없으니 문지기도 없지."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홍대광이 거두절미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꽤 중한 소식이 있어서 알려 주려 내가 직접 왔다."

"네? 무슨 소식이요?"

"종남이 봉문 했다."

"네?"

"뭐?"

"엥?"

방 안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문으로 우르르 밀려왔다.

"악! 밀지 마!"

"그게 뭔 소리요? 종남이 봉문을 하다니?"

현영의 질문에 홍대광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봉문은 아니고, 앞으로 한동안 대외 활동을 금한 채 내부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그게 봉문이지."

"그러니까."

청명의 말에 홍대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번 천하비무대회에서 크게 느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내부적으로 갈등이 심해져서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졌든가. 그건 좀 더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아니. 뭐, 이유나 그런 건 됐고. 여튼 지금 종남이 한동안 봉문을 한다, 이거죠?"

"그렇지."

잠깐 고민하던 청명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장문인!"

"오냐!"

이제는 척하면 착! 하고 청명의 말을 알아듣는 현종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화영문주를 불러오너라! 당장!"

"예! 장문인!"

다시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화산을 보며 홍대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여하튼 바람 잘 날이 없는 문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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