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내가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시다. (4)
"끄으으으……."
"으으으으……."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아니, 전장에서 돌아온 패잔병도 이리 넝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당은 서로를 부축해 겨우겨우 산을 내려가는 가솔들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 어흑!"
그의 옆에서 나무 작대기에 의지해 걷던 현법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끄으. 으으……."
그리고 한참을 허리를 부여잡은 채 낑낑댔다.
"세상에…….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울분에 차 소리를 지르는 현법을 보며 현당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문파의 기강이 거꾸로 돌아간다지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현법은 거의 넋을 놓은 듯 보였다. 힘없는 중얼거림이나 풀린 눈 따위만 봐도 그랬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기는 했다.
차라리 현자 배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면 이토록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타작한 이는 그들이 화산에 있을 시절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어린아이다.
손자뻘도 되지 않는 이에게 맞고 쫓겨나는 사람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뭐라 말 좀 해 보십시오, 사형! 화산에만 오르면 다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닥쳐라!"
현당의 몸에서 살기가 줄줄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에 찔끔한 현법이 목을 움츠렸다.
"빌어먹을……."
현당의 얼굴은 숫제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저 개 같은 놈들이…… 이리 나온다 이거지?"
"화산은 끝났습니다. 저곳에는 이제 도도 없고 예도 없습니다. 무뢰배들의 집단이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세인들이 화산을 농 삼아 화산채로 부른다더니, 딱 그 짝이 아닙니까?"
현법의 토로에는 억울과 울분이 가득 차 있었다. 현당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이를 갈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들이 우리를 이리 대한다면, 우리도 저들을 똑같이 대할 수밖에."
그 서슬 퍼런 목소리에 현법이 마른침을 삼켰다.
"방도가 있으십니까?"
"……."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던 현당은 씹어뱉듯 말했다.
"소림으로 갈 것이다."
"……소, 소림이요?"
현법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현당은 진심인 듯 보였다.
소림이라니.
"소림은 화산에 망신을 당했다. 당연히 화산에 원한이 있겠지. 그러니 우리의 처지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현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상황은 논란거리가 될 만했다.
어쨌든 한때나마 사문의 어른이었던 그들이 화산의 어린 제자에게 얻어맞아 쫓겨난 상황이 아닌가?
"이 일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누군가는 화산을 비난할 것이고, 누군가는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타 문파에서 벌어진 일 따위를 진지하게 생각할 이는 없겠지. 그저 술자리의 적당한 안주거리가 될 뿐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소림이 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소림에게는 이 일을 키울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이용해 화산을 압박할 수 있겠지."
현법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소림에게는 그럴 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사형. 그렇게 한다면 저희는 정말 화산을 적대하는 게 됩니다."
현당이 칼날 같은 시선으로 현법을 노려보았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말이더냐?"
"……."
"우리를 버린 것은 저들이다. 자식을 버린 부모는 자식에게 효를 바랄 수 없는 법. 화산에게 버림받은 우리가 어째서 화산을 생각해야 한단 말이더냐?"
"사형의 말이 옳습니다."
현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일말의 거리낌마저 버렸다.
"나는 저 무도한 놈들이 화산의 탈을 쓰고 강호를 종횡하는 꼴은 볼 수 없다. 화산의 주춧돌을 뽑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말 것이다."
현법도 현당도 사실은 알고 있다.
화산의 탈을 쓰려 한 것은 저들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이상,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그들은 화산에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정리했다. 이리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림에서 우리를 써 주겠습니까?"
"소림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지. 화산을 망하게 하는 것도 좋고, 우리로 하여금 화산을 이끌게 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지.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명분이 있지 않느냐."
"명분이라 하셔도……."
"어설픈 명분이라도 상관없다."
현당이 딱 잘라 말했다.
"명분이란 그런 것이다. 완벽한 명분도 약자의 손에 들린다면 힘을 쓰지 못하고, 어설픈 명분이라도 강자의 손에 들리면 무엇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지. 소림에게는 우리의 명분을 진실로 만들 힘이 있다."
현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바로 숭산으로 가야겠군요."
"그렇다."
현당이 고개를 돌려 산 위를 바라보았다.
"현종……. 그리고 청명!"
으드드득.
이를 갈아붙인 현당이 얼굴을 움켜잡았다. 청명에게 얻어맞은 곳이 욱신거려 버틸 수가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네놈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꼴을 보고 말 것이다! 반드시!"
그의 눈에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현법은 마른침을 삼켰다.
'멍청한 도사 놈들.'
저들은 힘은 강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다. 이렇게 사람에게 원한을 만들 거라면 차라리 확실하게 손을 썼어야 한다.
세상을 호령하며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화산에 현당과 현법이 별걱정 없이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화산에 올랐다가 목숨을 잃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보내 줄 것이라면 웃으며 보냈어야 하고, 손을 쓸 것이라면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이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겠지.'
현법이 막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이고. 산이 진짜 가파르네."
'음?'
별안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법이 고개를 획 돌렸다.
산길을 따라 올라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거지?'
그들의 행색을 본 현법은 고개를 갸웃했다.
웬 거지가 산을 오른다는 말인가. 이 험한 산중에 동냥할 곳이 있을 리도 없고.
거지와 산이라니.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있단 말인가?
'화산에 오르는 건가?'
평범한 거지가 화산에 갈 일은 없을 테니, 그럼 개방도들인가?
현법이 떠오른 의문을 미처 다 해소하기도 전에 산길을 오른 개방도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불현듯 섬뜩함을 느낀 그는 전신을 바짝 긴장시킨 채 거지들을 경계했다.
'방향이…….'
그들을 지나쳐 가지 않는다.
현당과 현법 일행을 중심으로 거지들이 슬그머니 좌우로 갈라지더니 그들의 양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포위하듯이 말이다.
"왜……."
당황한 현법이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거지들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거지가 아니야.'
걸친 누더기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이라든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이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는 거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현법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거 숭산까지는 꽤 먼 길일 텐데."
"……."
앞쪽.
거지들이 올라온 길로, 한 사내가 휘적휘적 걸어 올라왔다.
"어휴, 그 몸으로 소림까지 갈 수 있겠어?"
'들었나?'
현법의 두 눈이 거세게 떨렸다.
조금 전 말을 건넨 거지는 딱히 특징이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먼저 오른 이들과는 달리, 이 거지는 저잣거리에 앉혀 놓으면 아무런 위화감 없이 거리에 녹아들 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 다른 곳이 있었다.
눈빛.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앞선 거지들의 눈빛을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현당이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저 산을 내려가는……."
"현당."
"……."
"이름은 하우량. 삼십 년 전 화산을 떠나 호남에 정착. 호남에서 표국을 꾸려 겉으로는 표두로 지냈지만, 실제로는 밀염(密鹽)에 손을 댄 염상(鹽商)."
현당의 눈이 부릅떠졌다.
"맞나?"
"……다, 당신은……."
"맞나 보군."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외에도 조사한 것은 많지만, 뭐 굳이 여기서 떠벌릴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빙글빙글 웃고는 있지만 눈빛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군가가 아니지. 당신이 내가 선점한 화산에 침을 바르려 했다는 거고, 이제는 그 화산을 망치려 들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현당의 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 누구와도 적대할 수 있지만, 거지와 적대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들이 누구인가?
잃을 것이 없는 이들.
그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이 모여서 만든 곳이 바로 개방이었다.
사람들은 협의를 논하는 개방의 겉모습만을 보곤 한다. 그러나 십만의 거지가 모여 만든 개방이 어찌 정의롭기만 하겠는가?
개방은 세상에서 가장 협의 넘치는 곳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요청이 없었어도 슬슬 손을 보려고 했는데……."
사내가 손을 들어 자신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화산에 오르는 놈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욕까지 들어 먹었단 말이지. 이 홍대광이 말이야."
그러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거지들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요즘은 욕을 주먹으로 먹이나 보군."
"나는 발로 먹는 것도 본 것 같은데?"
"왕초, 거 꼴이 말이 아니외다."
"시끄럽다. 이 거지 새끼들아!"
홍대광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익살맞은 얼굴로 현당 무리를 바라보았다.
"여하튼, 뭐. 사람이 실수를 저질렀으면 수습이라도 잘해야 하는 법이지. 나는 그 악귀 놈을 더 크게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거든."
홍대광이 빙글빙글 웃는다.
"너희들이 이대로 소림으로 가면, 소림에 줄을 댄 놈들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꼴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화산에 줄을 댔단 말이야."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하지만 현당과 현법에게는 더없이 섬뜩하게만 들렸다.
"거지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
"밥줄이 끊기는 거야. 그런데 너희는 지금 내 밥줄을 끊으려 하고 있지."
현당의 떨리는 눈이 주변으로 획획 돌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싼 거지들의 소매에서 섬뜩하게 갈린 날붙이들이 삐죽이 튀어 나와 있었다.
짧은 단도.
날카롭게 갈린 쇠꼬챙이.
그리고 기다란 낫까지.
이윽고 그들이 낄낄 웃으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현당의 가솔들이 덜덜 떨며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눈에 공포가 번들번들 어리기 시작했다.
"쯧쯧. 그러게, 사람을 봐 가며 설쳤어야지. 깜냥도 안 되면서 그 마귀 놈을 건드렸으니.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지."
홍대광이 슬쩍 턱짓했다. 거지들이 섬뜩한 눈빛으로 현당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 * *
"안 죽여요."
와그작. 와그작.
청명이 월병을 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도……."
"거지새끼들이 때때로 도를 넘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거든요. 안 죽여요. 대신 겁은 확실하게 주겠죠."
"으음."
현영은 진중한 얼굴로 청명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아마 대충 둘둘 묶어서 변방에다 던져 놓을 거예요. 소림 쪽으로는 평생 얼씬도 못 하게. 재주 좋으면 천하에 널려 있는 거지들의 눈을 모조리 피해서 소림까지 갈 수야 있겠지만, 그 영감님들한테 그 정도 재주가 있을 리 없죠."
확실히 그렇겠구나, 하며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신 쟤들도 화가 좀 났을 테니 낫에 찍힌다거나, 도리깨로 얻어맞는 정도는 감수해야죠."
"……."
히죽 웃는 청명을 보며 현영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아니에요. 별 날파리 같은 것들이. 쯧."
"개방에 대한 것은 장문인께는 비밀이다."
"에이. 제가 애도 아니고."
청명이 낄낄 웃었다. 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문파를 끌어가는 이는 공명정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공명정대를 보인다면 누군가는 드러나지 않게 손을 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과거에 그 역할은 현영의 몫이었다.
하나 이제는…….
"괜찮겠느냐?"
"뭐가요?"
"너는 화산에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있다. 하나 그 영광은……."
청명이 손을 크게 휘저어 현영의 말을 끊었다.
"장로님도 참 잔걱정이 많으시네요. 제가 그런 걸 바랐으면 벌써 다 챙겨 먹었죠. 저 모르세요?"
"……그래. 그렇구나."
현영이 빙그레 웃는다.
"그럼 어디, 챙겨 먹지 못한 것 대신에 고기나 좀 먹여 볼까? 내가 오랜만에 동파육을 해 주마."
"술은요? 술은?"
"챙겨 놓은 것 하나 빼 오거라."
"헤헤. 알고 계셨네요. 잘 숨긴 줄 알았는데."
"가자꾸나."
"예."
앞서 걸어가는 청명의 뒷모습을 보며 현영은 묘한 기분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조금 걸음을 바삐 하여 청명의 옆에 서며 그의 어깨를 꾹 잡았다.
"아파요."
"그래, 그래."
현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커졌다.
터덜터덜 식당으로 향하는 두 노소의 등 뒤로 밝은 햇볕이 내리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