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내가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시다. (1)
조금 전.
"너무 쉽게 물러나신 것 아닙니까, 사형?"
현법의 말을 들은 현당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승리란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 하지만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 승리는 결국 뒤끝을 남기기 마련이다."
"으음. 확실히……."
"물론 거기서 내가 현종을 좀 더 몰아붙였다면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너도 보지 않았더냐? 제자들이 현종을 저리 따르는데 우리가 얻은 이득이 과연 이득으로만 끝났겠느냐?"
물론 현법도 똑똑히 보았다.
화산의 제자들이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는 광경을 말이다.
'화산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게지.'
과거 그들이 화산에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일이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사문의 존장이었다. 한데 어찌 제자 된 이들이 그리 노골적인 적의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거기서는 물러나는 것이 맞다. 덕분에 현종 역시 물러나지 않았느냐."
"아무래도 정통성이 없다는 사실이 치명적이었겠지요."
"그렇겠지."
현당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장문인의 자리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것. 그동안은 현종이 스스로 장문인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엄밀히 따지면 화산에서 장문인을 자칭할 수 있는 사람은 현당 외에는 없다.
현당은 그저 문파를 떠났을 뿐, 장문인의 자리를 내려놓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 완고하게 나오던 놈이 발을 빼는 걸 보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거리낄 게 많은 모양입니다."
현법의 말에 현당은 대답 없이 그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오늘 하는 것을 보아하니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사람이란 제 가진 것을 쉽게 내어놓지 못하는 법이지. 화산이 어디 예전의 화산이더냐? 당연히 욕심이 나겠지."
현당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것이다. 산속에 박혀 도를 닦는 고고한 도인은 속세의 법으로 어찌할 수 없는 법이지만, 욕심이 있는 이는 예측할 수 있으니까."
현법도 현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오늘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을 내쫓으려 한 현종의 시도를 피해 내었고, 화산에 눌러 앉을 수 있는 권리까지 얻어 냈으니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현종의 입지는 더욱 약해질 것이고, 자연히 그들의 입지는 나날이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현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솔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나섰지만, 앞으로는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장문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너희가 저들 사이로 스며들어 주어야 앞으로의 일이 편해진다. 알겠느냐?"
"걱정 마십시오, 할아버님!"
"산속에서 무학이나 닦던 이들을 구슬리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완벽하게 해내겠습니다."
활기찬 대답을 들으며 현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현종…… 건방진 놈 같으니.'
최대한 담담한 척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압박해 오던 현종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과거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놈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대드는 꼴이라니.
'너도 옛날의 현종이 아니다, 이 말이렷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현종이 과거의 현종이 아니듯이 그 역시 과거의 현당이 아님을 말이다.
그때 현법이 살짝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데, 사형."
"음?"
"현종이 한 말 중 하나가 걸립니다."
"뭐가 말이더냐?"
"그…… 화산을 떠나라 한 게 우리를 위해서라고 했던 것이 조금……."
그러더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 현종의 성격을 감안해 볼 때, 괜히 없는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허세겠지."
현당은 그저 피식 웃으며 넘겼다.
"우리가 이 화산에 있다 하여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 선조께서 노하셔 선계에서 강림하실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건 그렇지요. 하하하하하."
현법이 호탕하게 웃어젖히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청매관의 문짝이 산산조각 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뭐, 뭐야!"
"웬 놈이냐!"
현당이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부서져 활짝 뚫린 입구를 통해 웬 놈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
복장을 보면 화산의 제자가 분명한데, 그 얼굴이 낯설다. 현당이 화산에 오른 이후로 처음 보는 이였다.
"쯧쯧, 저……."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자세히 보이는 외양에, 현당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복색.
길게 자라난 머리는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아 대충 위로 묶어 두었고, 걸어오는 자세는 건들건들 불량스럽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늘어뜨린 저 손에 쥐여진 건 술병이 아닌가.
'대체 어쩌다 화산이!'
문파의 기강이 제대로 쇠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의 기분을 읽었는지, 앞쪽에 있던 그의 가솔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들어오는 화산의 제자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째애애애애애애앵!
"……."
털썩.
"……어?"
술병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진 가솔을 보며 현당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뭐, 뭔 일이 벌어지는 거지?'
분명 눈앞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 과정이 머릿속에서 해석이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화산의 제자가 그의 가솔을 술병으로 내리쳐서 대가리를 깨 버린 건가?
어?
현당은 물론이고 현법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대체 뭔……?
그때였다.
"지옥에서 왔다, 이 새끼들아!"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른 화산의 제자가 다짜고짜 앞으로 달려들었다.
"뭐, 뭐냐!"
"막아! 막아라아!"
그 흉흉한 기세에 가솔들이 놀라 분분히 그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빠아아아아악!
"아악!"
빠아아아악!
"아아악!"
"이 새끼들이! 감히 누굴 막아!"
앞을 막아서던 이들이 연신 좌우로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이들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에 속했다.
빠아아아아아악!
당황하여 달아나지도 달려들지도 못한 이 하나가 아래턱을 걷어차여선 그대로 청매관의 천장을 뚫고 박혔기 때문이다.
콰지직!
"……."
대롱. 대롱.
머리가 천장에 틀어박힌 채 좌우로 흔들리는 그 모습에, 현당은 차마 움직이지도 못한 채 망연히 서 있었다.
대체 어떤 말로 이 상황을 표현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럴 리는 없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
하지만 현실이라기엔 너무도 황당하지 않은가?
사람 하나를 천장에 박아 버린 화산의 제자는 이제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현당과 현법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현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도 잊고 있었다.
"너, 너는 누구냐?"
"하……. 진짜 이 새끼들이……."
"……음?"
"눈 없어?"
화산의 제자가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매화를 가리켰다.
매화?
그게 뭐 어쨌다고?
현법이 이해하지 못하여 슬쩍 눈살을 찌푸리자 화산의 제자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눈이 있으면 내가 화산 소속인 걸 알 텐데. 남의 집에 들어와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주인한테, 뭐? 누구? 누구우우우?"
"……."
현법은 그 순간 직감했다.
'이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단순히 말하고 있는 내용 때문이 아니다. 저 말투며, 그 말을 수식하는 표정 하나, 손짓 하나하나가 전부 뭔가 기이하다.
"니들은 누군데, 이 새끼들아! 남의 집에서 주인을 봤으면 지들 정체부터 말하는 게 예의지! 하여튼 요즘 것들은 정신머리가 없어요!"
"……."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요즘 것들'이라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아득하게 나가 버릴 것 같은 현당이었다.
"네 이노오오오오옴!"
"왜 이노오오옴!!"
"어억……."
끝내 현당이 뒷목을 움켜잡았다.
"사, 사형!"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주변인들이 우르르 현당에게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현당은 격하게 숨을 토해 내며 뒤집어진 속을 달려 애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생전 본 적 없는 괴이한 생물 같은 눈앞의 사내를 쏘아보는 건 잊지 않았다.
"대, 대체 너는 누구냐?"
"진짜 말귀를 못 알아먹네? 노망 나셨어?"
"끄륵……."
"사형! 사형 정신 차리십시오!"
현당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현법의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현법이 이를 악물고는 외쳤다.
"네놈은 화산의 제자 같은데, 어떻게 사문의 존장을 보고도 이따위로 방자하게 군단 말이더냐?"
"존장?"
"그렇다!"
"하?"
화산의 제자, 그러니까 청명이 피식 웃더니 청매관 안에 있는 인물들을 쭉 한번 훑어보았다.
노골적으로 비웃음이 걸린 시선이었다.
그렇게 모두를 한 번씩 바라본 청명은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존장이 어디에 있는데?"
"뭐, 뭣?"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그 존장이 어디에 있냐고?"
"이, 이놈이!"
현법이 발끈하여 외쳤다.
하지만 청명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사람이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어디서 말 뼈다귀 같은 것들이 기어 들어와서 존장질이야. 확 다 허리 곱게 뒤로 접어서 종남산에 내던져 버릴라!"
때마침 청명을 따라 청매관에 들어온 백천은
'대체 왜 종남산이지?'
하는 의문을 잠깐 품었지만, 지금은 태평하게 그걸 물을 겨를 따윈 없었다.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내가 누구냐고?"
지옥 불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에 모두가 움찔했다.
"내가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시다, 이 새끼들아!"
"처, 청명?"
그럼 이놈이?
"화산신룡!"
"저, 저자가!"
청명을 보던 모두가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화산신룡.
천하비무대회에서 실질적으로 우승을 하여 천하에 그 이름을 날린 천하제일 후기지수.
화산의 미래이자 훗날의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이미 맡아 놓았다고 평해지는 이가 바로 저자란 말인가?
그런데…….
"심지어 삼대제자인데 사조에게 이리 큰 무례를 저지른다는 말이더냐! 현종은 어디에 있느냐!"
현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니, 이 영감들은 진짜로 생각을 산 밑에 두고 왔나? 누가 사존데?"
"네 이놈! 아무리 우리가 화산을 떠나 있었다고 한들! 화산에 적을 올린 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 우레와 같은 호통에 청명이 감격한 듯 귀를 후볐다.
"어디서 개가 짖나?"
"……아, 아니. 그런데 이놈이."
"아, 거 되게 이놈 저놈 하네. 어이, 영감님."
청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귀를 후빈 손가락을 훅 불었다.
"그래. 말 잘했어. 사조라 이거지?"
"그렇다!"
"그게 말로 한다고 증명이 되는 게 아니지. 내가 댁들이 내 사조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아주 간단하게 말해 줄게. 할 수 있으면 내가 지금 바로 머리 박고 사과드리지."
"……방법?"
청명이 턱짓으로 현법을 가리켰다.
"영감님, 매화검법 쓸 줄 알아?"
"……."
"아니.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칠매검은?"
"……."
"육합검은 기억하나?"
"그, 그건 기억하고 있다."
"자랑이다."
"……."
현법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솔직히 화산을 저버리고 환속한 이들이 화산의 검법을 익힐 일이 있었겠는가?
"그럼……."
청명은 여전히 삐딱하게 선 채로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듯 그들을 훑었다.
"화산의 사조라는 것들이 화산 검법도 쓸 줄 모르고."
"……."
"그렇다고 화산에서 뭘 한 것도 아니고."
"……."
"문파 힘들 때 박차고 나가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이제 와 슬금슬금 기어 들어와선 대접 한번 받아 보시겠다?"
청명의 눈에 새파란 광기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화산이 물로 보이나? 니들 맘대로 갖다 버렸다가 필요하면 다시 주워 쓰려 드네? 내가 승질이 뻗쳐서, 야 이 새끼들아!"
그리고 마침내 눈을 까뒤집었다.
사조?
사조오오오오?
어디 새파란 것들이 대뜸 나타나선 그의 앞에서 사조질이라는 말인가?
청명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 끌러 들었다.
"그래. 아냐. 아냐. 괜찮아. 아직 증명할 방법은 남았으니까."
"……."
현당과 현법은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청명이 검과 검집이 분리되지 않도록 단단히 묶는 광경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설마 사조가 어쩌고 하던 양반들이 삼대제자 하나 감당 못 하지는 않겠지. 거기 있는 것들 다 한 번에 덤벼 봐. 내가 지면 사조로 인정해 줄게. 대신!"
청명이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감당 못 할 시에는 너희는 기어서 화산을 내려가야 할 거야. 어디 누가 죽나 보자, 이 새끼들아!"
청명이 두 눈을 뒤집어 까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선두에 선 이의 머리를 사정없이 검집으로 내리쳤다.
검집과 머리통이 만나며 터진 영롱한 소리가 해질녘의 화산에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