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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45화 (345/1,567)

345화. 이것들이 다 미쳤나? (5)

현당. 하우량.

한때 그는 화산제일기재로 불리며 몰락해 가는 화산을 되살릴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당시의 현종은 현당이 화산의 장문인이 될 것임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젊었던 현종에게 현당은 우상이자 목표였었다.

하나 현당은 자신에게 쏟아지던 기대를 저버리고 제 발로 화산을 나섰다.

그것도 새로운 장문인이 되기 직전에 말이다.

'염치도 없는 인간.'

현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분노는 현당이 단순히 화산을 저버린 배신자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떠난 이들을 비난할 수 없을 만큼 당시의 화산은 상황이 좋지 않았으니까. 현영 역시 화산을 떠난 이들을 야속하다 느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그들의 선택을 이해했다.

하지만 현당은 다르다.

그는 새로운 장문인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별말도 없이 사제인 현법과 함께 화산을 떠나 버렸다.

결코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운자 배가 모두 죽어 백천이 장문인이 되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백천이 백상과 저를 따르는 사제들을 이끌고 화산을 나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물론 지금의 화산에는 유이설도 있고, 윤종도 있고, 무엇보다 청명도 있다. 그러니 백천이 화산을 저버린다고 해서 큰일이야 나겠냐마는, 안타깝게도 당시의 화산에는 청명도, 윤종도, 유이설도 없었다.

오로지 문파의 모든 기대가 현당에게 몰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겨우겨우 문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화산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되었다.

전대의 장문인이 시름시름 앓다 등선했고, 후대의 장문인이 되어야 할 이는 자리를 걷어차고 문파를 나가 버렸다.

이보다 더 확실한 망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화산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줄줄이 떠나 버렸다.

그뿐이랴. 교류를 이어 가던 문파들도 모조리 화산과의 인연을 끊어 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몰락하던 화산에 결정타를 날린 이가 다름 아닌 현당이라는 의미다.

으드득.

현영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자신이 장문인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현종이 준비를 할 겨를 없이 그 자리에 올랐다. 화산에 남은 이들 중 가장 배분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현영은 기억한다.

장문인의 자리.

무겁고도 고통스러운 그곳에 오르자마자 제자들이 대거 화산을 떠났고,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현종을.

그 작고도 서글프던 등을 말이다.

그 이후로 현종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아는 현영에게, 현당은 종남보다도 더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현당과 그 앞에 담담하게 기세를 뿜어내는 현종이 보인다.

보라.

저기에 있다.

그 모진 풍파와 고통스런 세월을, 절벽에 뿌리 내린 노송처럼 버텨 낸 이가.

현영의 자랑스러운 사형이자, 이 화산의 당당한 장문인이.

'장문인.'

현영은 괜스레 눈가가 시큰해 오는 것을 참아 내느라 혼났다.

과거에는 저 현당에게 견줄 수조차 없었던 현종이 이제는 오히려 현당보다 배는 더 큰 사람으로 보인다. 그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이겨 내었으니 더는 과거의 현종일 수 없는 것이다.

"크흠."

현당이 현종의 기세에 놀라 말을 잇지 못하자, 현법이 슬쩍 헛기침하여 분위기를 환기했다.

"장문인. 말이 조금 과한 것 같소이다."

"……과하다?"

현종의 준엄한 시선이 현법에게로 향한다.

"무엇이 과하단 말이오?"

"……."

"본도가 한 말 중 틀린 것이 있소?"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일단 나서긴 했으나 현법도 할 말이 궁색한 듯 말끝을 흐렸다.

사실 애초에 논리로 따지자면 이들이 현종 앞에서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이 화산에 오를 만한 배짱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유약하기 짝이 없었던 현종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놈에게 언제 이렇게 강단이 생겼단 말인가?'

현법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미 현당에게 말한 적 있듯이, 사람이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있는 현종은 그가 알던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 문파를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엄이 배어나지 않는가?

제아무리 많은 일을 겪는다 해도 사람의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고 굳게 믿어 왔는데, 지금 현종의 모습을 보니 내내 믿고 있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니 당황할 수밖에.

"흐음."

하지만 다행히 그가 시간을 끄는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현당이 살짝 여유를 되찾은 모습으로 고개 들었다.

"장문인."

"말씀하시오."

"내 장문인의 마음을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소? 당연히 내가 미울 것이오."

"……."

"하나, 내게 기회를 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잖소? 나는 정말 화산에 속죄하고 싶은 마음뿐이오. 내게 기회를 준다면 나는 장문인을 도와 화산을 다시 명문에 걸맞은 문파로 되돌리고 싶소. 그러기 위해서라면 뼈가 으스러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외다. 그러니 내가 일가를 모두 이끌고 화산을 오른 게 아니겠소?"

구구절절한 현당의 말에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형의 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외다."

"……하면 어찌?"

"화산은 더 이상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뿐이오."

"……."

"화산을 돕겠다 하시었소?"

현종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현당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화산에서 나가시오. 그게 그대들이 화산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이……!"

현법이 발끈하여 두 눈을 부라렸다.

"듣자듣자 하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대들만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화산을 떠난 우리 역시 이날 이때까지 편한 날이 없었음을 왜 모른단 말이더냐?"

"그래서?"

"……뭐?"

현종의 눈은 이제 서릿발이라도 치는 듯 싸늘했다.

"그래서 참으로 고단하셨겠다고 위로라도 해 드리리까?"

"……이, 이놈."

현법은 온몸을 휘감는 노기로 얼굴을 씰룩거리면서도, 현종의 그 눈빛 앞에선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기름칠이라도 한 듯 유려하게 움직이던 그의 혀가 지금은 송진이라도 바른 양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그 대신 현당이 입을 열었다.

"현종아."

"감히!"

곁에 있던 현상이 발끈하여 소리를 치려 하자 현종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장문인!"

"되었다."

현종은 천천히 고개를 내젓고는 현당을 물끄러미 보았다.

"말해 보시오."

현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나는 화산의 죄인이지. 하나 내게도 속죄할 기회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더냐?"

"……."

"기억하느냐? 과거 나는 너를 특히나 아꼈었지. 그 인연을 생각하면……."

"의미 없는 말은 거기까지 하시오."

"……뭐라?"

"지금 당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는 당신의 사제였던 현종이 아니라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이오. 나는 사적인 감정으로 화산의 중대사를 결정하지 않소."

"……."

"긴말하지 않겠소. 지금 당장 떠나 다시는 화산의 문턱을 넘지 마시오."

더없이 확고한 목소리였다.

딱히 대항할 말을 찾아내지 못할 만큼 말이다.

현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종이 이렇게 놀랍도록 성장했다는 사실에 감격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던 이가 지금 자신을 되레 몰아붙이고 있다는 데에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현당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참 동안 노기를 참지 못하고 몸을 떨던 그의 눈빛이 돌연 서늘해졌다.

"장문인……. 아니, 현종."

"그런데 저 작자가 자꾸!"

현영이 발끈했지만, 현당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이해했다. 결국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로구나."

그동안 보여 주던 부드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남은 것은 싸늘한 미소와 오만한 표정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종은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과거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과거에도 현당은 딱 저런 사람이었다.

안하무인. 그리고 오만무도.

하지만 과거의 화산은 그 오만무도한 이가 필요했다. 자신감을 잃어 가던 이들을 과할 정도의 자신감을 가진 이가 이끌어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한때는 현종 역시 그런 현당에게 매료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르다.'

자신감과 오만함은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만약 현당이 장문인 자리에 앉았더라면 화산은 다시는 부활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청명이가 입문하기도 전에 말이다.

"돌아가라 이거로군."

현당이 비릿하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좋지. 좋은 말이야. 하지만 그 전에 내 하나 묻겠는데."

그러더니 싸늘한 눈으로 현종을 노려보았다.

"너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

"……."

현종은 말없이 가만히 현당을 바라보았다. 현당은 더욱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다시 묻겠다. 너에게 내게 축객령을 내릴 자격이 있느냐는 말이다."

"왜 없다고 생각하시오?"

"몰라서 묻느냐?"

현당이 손을 뻗어 물 잔을 잡았다. 그리고 지체 없이 물을 쭉 들이켜더니 느긋한 손길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손끝에서 묻어나는 여유에 현상과 현영은 불안한 눈으로 현당을 바라보았다.

잠깐 침묵하던 현당은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현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진짜 화산의 장문인이라면 나를 내쫓을 자격이 있겠지."

현상과 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죽일 듯한 눈으로 현당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받으면서도 현당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내 묻겠는데……."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정말 화산의 장문인이더냐?"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서 그딴 망발을 늘어놓느냐!"

이상한 일이었다.

현영과 현상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살기까지 내뿜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소리만 내지를 뿐, 당황한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현종은 더없이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그저 담담한 얼굴로 현당을 응시할 뿐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게요."

"말 그대로다."

현당은 원하던 바를 이룬 사람처럼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너는 화산의 장문인이 아니라는 게지."

"……."

현종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현당은 그 반응을 즐기겠다는 듯 여유롭게 허리를 폈다.

그리고 느긋하게 말했다.

"장문인이란 누가 정하느냐. 전대의 장문인인 동시에 사문의 장로들이 정하는 것이지. 다시 말하자면 후대의 장문인을 정할 수 있는 이는 전대뿐이라는 소리다."

"……."

"그리고!"

현당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화산의 전대 장문인. 그러니 너와 나의 스승께서 정한 화산의 다음 장문인은 바로 나다. 너 현종이 아니라 나 현당이 화산의 적통을 잇는 진정한 장문인이라는 뜻이지."

현영이 얼굴이 시뻘게져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 게요?"

"궤변?"

현영의 격렬한 비난에도 현당은 그저 여유롭기만 했다. 그는 현종을 넌지시 넘겨다보며 물었다.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

현종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이해한 현당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구나. 실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명문의 적통을 잇는다는 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 자격에 걸맞은 이만이 장문이 될 수 있지."

"파문당한 이가 어디 장문의 자격을 입에 올린다는 말이더냐!"

"누가 나를 파문했느냐?"

현영이 입을 닫았다.

현당이 그런 그를 보며 위엄 넘치는 어조로 소리쳤다.

"나를 파문할 윗대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거늘! 누가 감히 나를 파문할 수 있단 말이더냐? 너희가? 나의 사제에 불과했던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파문한다는 말이냐!"

"이……."

그는 흡사 다 이긴 싸움을 하고 있는 듯 득의양양해 보였다.

"대답해 보거라, 현종. 화산의 장문인이 누구더냐. 네 스승이자 전대의 장문께서 누구를 화산의 장문으로 정하셨더냐? 네가 정녕 화산의 법도를 지키는 이라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일 텐데."

현종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시선만 던지던 현종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화산의 장문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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