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이것들이 다 미쳤나? (4)
늦은 밤, 청매관.
"하하하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연신 청매관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안에 들어찬 이들은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르며 더없이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이리도 쉬울 줄이야!"
"최근 명성을 날리고 있다기에 녹록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여 놀랐습니다."
가만 듣던 현법이 술잔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예전부터 현종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이였다. 그리고 지금 명성을 떨치는 후기지수들은…… 그래 봐야 아직 어린아이들일 뿐이지."
"그렇습니다, 아버님."
"운이 좋아 명성을 좀 떨쳤다고는 하나, 얼마 가지 않아 한계가 드러날 일이었다. 이대로 두었다면 말이지."
"그러니 저희가 온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현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화산으로 온 이유는 오로지 화산을 위함임을 잊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한 잔 더 따라 보거라."
그때였다.
"도관에서 도사가 되겠다는 놈들이 태연하게 술이나 기울이다니. 선조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더냐!"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쯧."
현당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종하게 늘어진 술병들을 본 것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다들 과히 긴장한 듯하여."
현법이 겸연쩍은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쯧쯧쯧."
"환속하여 수십 년을 살다 보니, 술과 고기를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놈들."
현당은 주저 없이 안쪽으로 향하여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엄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곧 이 화산은 우리의 법에 따라 돌아가게 될 터. 그때까지는 주위의 눈과 귀를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형."
"흐음."
말을 마친 현당은 제 자식들과 현법, 그리고 그의 자식들을 쭉 한번 둘러보았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지.'
못 견디고 화산을 뛰쳐나갔지만,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쉬웠을 리 있겠는가.
산속에서 도를 닦고 무학에만 정진하던 도사가 다시 환속하여 세상에 적응한다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힘든 일을 기어이 이겨 낸 덕분에 일가를 이뤘고, 자식들은 장성하여 그의 뒤를 단단히 받쳐 주고 있다.
'이 많은 수가 힘이 될 것이다.'
이대로 화산에 스며들 수만 있다면, 온전히 그의 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장문인의 자리를 찬탈하지 않는다고 해도 장문인이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는가?
'첫째를 다음 화산 장문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거지.'
현당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경아."
"여기서는 현법이라 부르셔야 합니다."
"그래, 그렇지. 현법아. 내가 알아보라 했던 것은 어찌 되었느냐?"
"예. 그사이 조사를 좀 해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화산에 돈이 넘친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불과 이틀 사이에 화산에 들어온 현물들로만 창고를 그득그득 채울 정도입니다."
"흐음."
"게다가 운남과의 교역 독점권을 화산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잘만 이용할 수 있다면 천문학적인 거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사업입니다. 화산 놈들이 워낙 순진하여 이 일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모양입니다만."
현법이 빙그레 웃었다.
"제게 전권이 떨어진다면 사형을 돈방석에 앉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화산이겠지."
"물론입니다, 사형."
엄히 말하긴 했으나, 현당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피어났다. 진정하려 애를 써도 입꼬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현법이 그런 그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저들 역시 딱히 크게 저항하지 않는 것을 보면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음."
그러자 현당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예?"
"네 기억 속의 현종이야 어설프고 우유부단하겠지만, 어쨌건 지금의 현종은 무너져 가는 화산을 수십 년간 지탱했고, 모두가 몰락했다고 생각한 화산의 명성을 다시 천하에 떨친 놈이다."
현법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게 어디 현종의 실력이겠습니까?"
"현종의 말대로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삼십 년의 시간이라면 사람이 달라져도 이상할 게 없지."
"그 현종이 말입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묻어 있었다.
"사형.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지만, 사람은 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변하기란 그리 쉽지 않단 걸 사형도 아시잖습니까?"
"……그 말도 그리 틀린 건 아니지."
"사형 말대로 현종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왜 아직까지 우리를 내버려 두겠습니까? 사형께서 그의 입장이었다면 지금껏 참으셨겠습니까?"
"……."
현당이 대답이 없자 현법이 그것 보라는 듯이 씨익 웃었다.
"신중한 것은 좋지만, 과히 신중을 기하다 보면 일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과감히 움직일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지요."
"그래. 그 말도 맞다."
현당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법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건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화산의 반응이 자꾸 그의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리 녹록할 리 없는데.'
강호에서 결과를 만들어 내고 명성을 얻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현당이 화산을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만한 업적을 만들어 냈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하지만 현당의 눈에는 그 이유가 보이질 않았다. 후기지수들의 실력은 과히 높아 보이지만, 정작 그들을 가르쳤을 운자 배와 현자 배의 실력은 딱히 과거보다 나아진 것 같지도 않고…….
'분명 뭔가 놓친 것이 있는데.'
현당이 고개를 내저었다.
놓친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현법의 말대로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야 할 때다. 저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입지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해질 테니까.
"여하튼 현종이 허수아비가 아니라면 내일쯤은 나름의 대책을 들고 나올 것이다."
"예. 그리고 그 대책을 무마할 수만 있다면 화산은 저희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사형. 긴 시간 끝에 마침내 사형의 자리를 되찾게 되시는 겁니다."
"어허. 삿된 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오로지 화산의 미래를 위해 고난을 자처한 것이다."
"물론입니다, 사형."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 * *
"제자들은 어떠하더냐?"
"딱히 불만을 늘어놓지는 않습니다만……."
"녀석들도 참……."
현종이 시름 깊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쫓아와 저들은 대체 뭐냐며 불만을 늘어놓았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을.
화산의 제자들은 그에게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토로하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제자들에게 간섭하려 들더냐?"
"예."
현상의 대답에 현종은 눈살을 찌푸렸다.
현상은 그런 현종을 가만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장문인. 장문인께서 왜 이토록 신중하신지는 압니다. 게다가 장문인이시니 저희처럼 감정적으로 행동하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제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갈까 저어됩니다."
"……현영이 녀석은?"
"꼴도 보기 싫다고 방에 틀어박혀선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쯧쯧. 애도 아니고."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현상은 이번만큼은 현영을 이해하는 듯 편을 들고 나섰다.
"하나 그 마음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장문인."
"……내가 왜 모르겠느냐."
현종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라고 하여 저들을 내쫓아 버리고 싶지 않겠느냐. 아니, 오히려 그 마음은 내가 가장 클 것이다."
"하면 어찌……."
"나의 뜻대로만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종은 현상을 똑바로 보았다.
"내가 저들을 내친다면 필시 저들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일에 대한 대가는 우리가 아니라 화산의 제자들이 온전히 치러야 한다."
"……장문인."
"하여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최선인지. 저 아이들이 과거의 그림자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말이다."
낮게 한숨을 쉰 현종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상."
"예, 장문인."
"나는 나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 걸 원하지 않는다."
현상은 몰래 한숨을 쉬고 말았다. 현종의 생각을 듣고 나니 오히려 더 속이 갑갑해졌다.
그 뜻을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나, 이리 직접 듣고 나니 마음이 더욱 복잡했다.
하기야.
언제 현종이 스스로를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그의 행동은 언제나 화산과 제자들의 안위에 맞춰져 있었다.
현상은 종종 그의 그런 면이 화가 날 정도로 답답하다 느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게 옳다는 것을 알기에 믿고 따라 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테지만…….
"장문인. 뜻은 알겠지만, 슬슬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치를 취해야겠구나. 안 그래도 결론이 선 참이니."
그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했다.
"사형을……. 아니, 그를 데리고 오너라."
"예, 장문인."
현상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산 장문인의 처소에 두 무리가 마주 앉았다.
한쪽은 현종을 비롯한 화산의 장로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현당과 현법. 과거 화산을 등지고 떠난 현자 배들이었다.
며칠 전에도 이리 대면한 적이 있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그때 이상으로 무거웠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현당이었다.
"그래. 어인 일이더냐."
그의 여유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현종의 우측을 지키고 있던 현영이 차갑게 일렀다.
"말조심하시오."
"……으음?"
"그대는 지금 대화산파의 장문인을 배알하고 있소. 내 일전에는 그 무례를 용납해 주었지만, 한 번 더 같은 무례를 범한다면 그때는 화산의 법도가 얼마나 지엄한지 알게 될 것이오."
현당이 못마땅한 눈으로 현영을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리 각을 세워서 좋을 게 없다는 듯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실수를 하였소. 그래, 무슨 일로 부르셨소? 장문인?"
완전한 존대는 아니나, 나름 예의를 갖춘 공대였다.
현영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더는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는지 입을 꾹 닫았다.
현종이 살짝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
"며칠간 둘러본 화산은 어떠셨습니까?"
현당은 현종의 저의를 살피겠다는 듯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 숨은 뜻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과거의 현종이라면 표정과 목소리에 다 드러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종의 속내는 알아채기 어려웠다.
"훌륭하더이다, 장문인."
현당은 일단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보다 화산에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껍소이다. 과거의 화산은 그러지 못했지요. 장문인께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소이다."
이리 호의적인 말은 예상치 못했던 현상이 슬쩍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어진 현당의 말은 현상의 예상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당이 미묘한 노기를 품은 어투로 본론을 꺼냈다.
"활기가 넘치는 만큼 과한 것도 적지 않습디다. 특히나 위아래의 법도가 제대로 서지 않고, 선인들이 전한 것을 전혀 이어 가지 못하는 모습에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소이다."
"그렇습니까?"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짢은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 태연한 반응에 현당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래도 장문인께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구려."
"아니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이해했다?"
"예."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그런 반응이라는 말이요?"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장문인?"
현당을 보는 그의 시선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문파의 장문인은 외부의 평을 완전히 무시해선 안 되지만, 그 말에 휘둘려서도 안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사형의 평을 제가 온전히 받아들일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웃으며 하는 말이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뼈가 드러나 있었다.
지금 화산의 장문인은 누가 뭐라 해도 현종이고, 스스로 화산을 저버린 현당은 외인에 불과하니 그 평가에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놈이…….'
그 의미를 알아챈 현당은 내내 여유롭던 얼굴을 슬쩍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고도 현종은 태연한 신색으로 말을 이어 갔다.
"사형."
"……말하시오. 장문인."
"문파를 저버리고 화산의 적을 버린 사형을 그동안 화산에 기거할 수 있게끔 했던 것은, 문파를 저버려야만 했던 사형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화산은 그토록 어렵고 힘든 곳이었지요."
"사제……."
"하나."
현당의 목소리가 살짝 젖어 나오려는 순간 현종이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저는 사형을 이해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끝끝내 화산을 부여잡고 청춘을 바친 이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달아났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도, 미련하게 바보처럼 화산의 제자로 살기를 택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
어느새 현종의 눈이 더없이 서늘해졌다.
"사형의 말대로입니다. 사형이 돕는다면 화산은 어쩌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 그리되는 순간 화산은 더는 화산이 아니게 될 겁니다."
현당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단호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하는 현종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이놈이 언제 이렇게……?'
현종은 그런 현당을 가만히 응시하다 마침내 말했다.
"사형. 아니, 하우량(河雨凉)."
"……이, 이놈!"
"이만하면 됐소이다. 이제 화산에서 떠나시오. 그리고……."
한기까지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이 현당을 꿰뚫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화산의 문턱을 넘으려 들지 마시오. 그때는 화산의 법도가 얼마나 지엄한지 몸소 깨닫게 될 것이오."
현당은 그 기세에 눌려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