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이것들이 다 미쳤나? (2)
쪼르르륵.
김이 뿜어져 나오는 찻주전자에서 흘러나온 찻물이 잔을 반쯤 채웠다.
현종이 찻잔을 노인, 현당에게 가만히 내밀었다.
"음."
현당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왔다. 코를 파고드는 차의 향이 더없이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한 모금 머금은 현당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차를 타는 솜씨가 더욱 좋아졌구나."
"예전에 제가 타던 차의 맛이 기억나십니까?"
"그럼. 기억나고말고. 너의 차 맛은 내 평생 잊지 못하던 것들 중 하나였다."
현종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미련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래. 그랬던 모양이지."
부드러운 대화다.
하지만 그 대화를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은 전혀 부드럽지 못했다.
장문인의 처소.
상석에 앉은 현종을 두고 좌우로 현상과 현영이 앉았다.
그리고 두 장로의 앞으로는 운암과 운검을 비롯한 운자 배들이 쭉 안쪽을 보며 자리하고 있었다.
상석의 건너편에는 현당이 가부좌를 틀었고, 그 뒤로 그가 데리고 온 이들이 정좌했다.
미묘한 대치.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은은한 차향은 부드럽기 짝이 없었지만, 방 안을 채우고 있는 공기는 부드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그 상황이 썩 마음에 차지 않는지 현당이 먼저 입을 연다.
"너희는 늙지도 않는구나."
"좋은 일이 있으면 사람이란 늙었다가도 젊어지는 법이지요."
"그래. 그렇겠지. 좋은 일이라."
현당이 가만히 현종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 자리가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사실 나는 꽤 걱정을 했었다."
"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현종이 살짝 나무라는 얼굴로 시선을 주니 입을 닫기는 했지만, 그대로 두었다면 금방이라도 욕지거리라도 했을 얼굴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화산을 이리 훌륭히 이끌었으니 내가 감사해야겠지, 내가."
현영은 영 불만스러운 얼굴로 현당을 바라보았다. 심지어는 현상조차도 불편함을 어찌하지 못하는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그래서……."
현종이 그런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듯이 입을 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현당은 한참을 말없이 현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도 많이 바뀌었구나."
"……."
"예전의 너는 이리 직접적으로 물어오는 이가 아니었다. 항상 넌지시 말을 돌리고는 했었지."
"강산이 세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사람이라 해서 바뀌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하지만 너만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주기를 바랐다."
현종은 대꾸하지 않았다.
굳이 답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답을 해야 할 이는 그가 아니라 현당이었다.
"제 질문에 답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현당이 살짝 침음성을 흘리고는 화산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삼십 년 전. 나는 내 발로 화산을 나갔다."
"……."
"화산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힘으로는 몰락해 가는 화산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셨지요."
"하나 나이가 드니 생각이 바뀌더구나."
현당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한편에 자리한 화산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가면 잊힐 거라 생각했건만, 내 안의 화산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기만 하더구나."
현영은 노골적으로 피식 웃었다.
"삼십 년이나 잘 참은 걸 보면, 애초에 그리 크지도 않았겠구만!"
"……현영아."
"예. 압니다. 알아요."
현종이 나직하게 나무라자 현영이 입을 닫았다. 하지만 여전히 입술이 툭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못내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었다.
현당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어찌되었건 우리는 화산을 버리고 떠난 이들이다. 비난을 받아도, 욕을 먹어도 감내해야 하는 일이지."
현종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화산을 잊으려 했다. 나름 기반도 잡았고, 사는 것이 그리 힘겹지 않게 되었지. 하지만 비어 있는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질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화산의 이름이 내가 사는 곳까지 들려오더구나."
현상이 살짝 입술을 깨문다.
'저자가 정말 듣자 듣자 하니…….'
저들이 기반을 잡고 편안히 살 동안 현종은 화산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걸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감히 현종의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화산이 다시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는 것을 들은 순간, 묻어 두었던 회한을 주체할 수 없더구나. 그리하여 뜻이 맞는 이들과 그 후손들을 데리고 화산까지 온 것이다."
현종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대답 말이더냐?"
"사형께서는 화산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현당이 현종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못 하겠느냐?"
"……."
"나는 죄인이다. 본대대로라면 화산의 땅을 밟을 수도 없는 입장이지. 그런 내가 무엇을 바라겠느냐? 그저 화산에서 숨을 쉬고 화산의 거름이 될 수 있다면 족하다."
"으음."
"이곳에 함께 온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 제 나름의 능력을 가지고, 삶을 일군 이들이다. 반드시 화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화산의 귀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다오. 내 늙은 몸이 부서지도록 화산을 위해 살고 싶구나."
현종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거 어디 개수작이요!"
그 순간 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해 댔다.
"화산이 개판이 나 전각이 넘어갈 지경이 되었을 땐 코빼기도 안 내밀다가 이제 와서, 뭐? 화산의 귀신? 당신한테 양심이라는 게 있긴 있소?"
"현영아, 진정하거라."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사형! 저 말종들의 수작질이 너무 빤하지 않습니까?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던 삼십 년 동안은 아예 모른 척해 놓고 이제 좀 화산이 잘나간다 싶으니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겠다고 궁둥짝을 들이미는 것 아닙니까!"
현영이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저 망할 놈들을 당장 내쫓으십시오!"
"현영아!"
그때였다.
"죄송하지만, 장문인. 저도 이번만은 사제와 같은 생각입니다."
"……."
현상이 잔뜩 굳은 얼굴로 현영을 거들고 나섰다.
"생각할 이유도 없는 일입니다. 저들은 제 발로 화산을 나간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어찌 화산의 땅을 밟게 한다는 말입니까? 귀신이요? 저런 귀신들은 화산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
"돌려보내셔야 합니다."
현종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현당이 슬쩍 입을 열었다.
"너희의 마음은 내 충분히 이해한다. 사형이 되어서……."
"네깟 놈이 어찌 사형이란 말이더냐!"
"현영아!"
"아니! 장문인! 저 말하는 꼬락서니가 같잖지 않습니까! 탈가한 이가 어찌 장문인의 사형이 될 수 있습니까!"
"되었다."
현종은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그 동작이 현종의 불편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현영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현종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라 이 자리에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겠지."
"처소를 내어 드릴 테니, 쉬도록 하십시오. 산을 오르느라 지치셨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자꾸나."
현당이 빙그레 웃었다.
현종이 고개를 돌려 운암을 바라보았다.
"암아."
"예, 장문인."
"이분들께 청매관을 내어 주고 식사를 준비해 드리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운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시겠습니다."
"그래."
현당을 비롯한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운암이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운암과 무리가 나가고, 마지막까지 방에 남은 현당이 슬쩍 고개를 돌려 현종을 바라본다.
"염치없이 다시 네 앞에 나타나 미안하구나."
"……."
"하지만 화산에 대한 내 진정만은 알아주길 바란다."
현종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당이 미묘한 미소를 머금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장문인!"
그가 방을 나가기가 무섭게 현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다리거라."
"하나!"
"기다리라고 하지 않느냐."
"크흠!"
현종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자리를 비워 주겠느냐? 장로들과 따로 할 말이 있다."
"예, 장문인."
방을 채우고 있던 운자 배들이 우르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현자 배들만이 남자 현종은 찻잔을 어루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개수작이지!"
현영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화산의 명성을 높아지니 이제 와 뭐라도 얻어 처먹겠다는 수작입니다. 어딜 감히 저들이 뻔뻔하게 화산에 얼굴을 들이민다는 말입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장문인."
평소에 현영과 의견을 같이하는 법이 없었던 현상이 이번에는 대놓고 편을 들었다.
"좋은 의도로 찾아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복색이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재산이 없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런 이들이 화산의 제자들이 풀뿌리를 뜯어 먹을 때는 외면하다가 이제야 얼굴을 들이미는 이유야 빤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현영이 이를 갈며 덧붙였다.
"설사 좋은 의도로 찾아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화산을 외면하고 버린 이들입니다. 반성? 반성이요? 반성한다고 다 이해해 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너희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면 지금 당장 쫓아내십시오! 장문인."
"그건 조금 기다려 보자꾸나."
"어째서요?"
현종이 고개를 내젓는다.
"잊었느냐? 이제 화산은 과거처럼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
"저들이 이대로 화산을 나가게 된다면 호사가들은 화산이 옛 어른들을 박대했다고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어디 호사가들이 진실을 쫓더냐?"
"……."
"화산을 깎아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먹잇감을 던져 줄 수는 없다. 적어도 며칠 정도는 잘 먹이고 잘 대접해 내보내자꾸나."
현영이 한숨을 푹 내쉰다.
"장문인의 뜻은 알겠지만, 저는 이번 일이 그리 단순하게 끝날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작정하고 찾아온 이들이 그리 쉽게 물러나겠습니까?"
"애는 써 봐야지."
현종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이내 탄식했다.
'호사다마라더니.'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낀다 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답답하구나.'
현종이 내쉰 한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사형."
"음?"
"생각보다 현종이 놈이 강경하지 않습니까?"
현법의 말에 현당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사형이 찾아오기만 하면 납작 엎드릴 줄 알았건만, 그 심약하던 놈이 상석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립니다. 본디 그 자리는 사형의 것이 아니었습니까!"
"어허. 목소리를 낮추어라."
현당이 슬쩍 눈치를 준다.
"이곳은 화산이다."
"그래 봐야 어린아이들만 남은 곳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현당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화산을 돌아보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금세 그의 손에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강단 있는 척을 한다지만, 본성은 숨길 수 없는 법이지. 현종은 결국 우리를 받아들이게 될 게다. 곧 더 많은 이들이 화산에 당도해 현종을 압박할 테니, 도리가 없겠지."
"그렇습니다, 사형."
"화산이 천운으로 좋은 제자들을 받아 몰락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현종같이 심약한 이가 장문인이어서는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없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현당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는 적당히 고개를 숙이는 것도 좋겠지. 우선은 신분을 회복하는 게 먼저다. 그러니 다들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해라."
"예."
"그래. 가자꾸나."
현당은 저 멀리서 앞서 걸어가는 운암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저들이 마냥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을 거란 것 정도는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자리를 되찾아야지.'
그를 위해.
그리고 화산을 위해.
노인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 순리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