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이것들이 다 미쳤나? (1)
고요한 산문.
세상에 그 명성을 떨쳤음에도, 아직 화산에 오르는 길은 조용하기만 했다.
새벽이슬이 낀 화산의 산문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후욱! 후욱!"
"끄응. 오랜만에 올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험하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렇지. 그게 화산이지."
모두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며 슬쩍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절벽 저 아래 중턱에 구름이 걸려 있었다. 화산이 아니고서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산을 오르곤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런 적이 있었던가?"
"예. 수련을 한답시고 산을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했었죠."
"그래. 그랬었지."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추억을 곱씹는 아련함이 묻어났다.
서로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 그들은 이윽고 산문 쪽에 시선을 던졌다.
"한창 젊을 때 떠나 온 화산을 이리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찾게 되는구나."
"……사형."
"들어가자. 조사전에 들러 용서를 빌어야겠지. 불호령을 내리실 사부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선두에 선 노인이 씁쓸한 얼굴로 산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들도 그런 노인을 따라 활짝 열려 있는 산문으로 향했다.
"흐음. 산문을 새로 올린 모양이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화산이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맞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그런 모양이구나. 화산의 홍복이로다."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노인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입을 쩍 벌렸다.
"세, 세상에……."
"허어……. 이런?"
"……."
뒤이어 들어선 이들 역시 말을 잇지 못하고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르다.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화산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 무너져 가던 전각들은 어디로 가고……."
"반 이상을 새로 올린 것 같지 않습니까?"
"바닥에 깐 것은 분명 청석인 것 같은데, 그 비싼 것을 저리 깔아 댈 정도라면 돈이 얼마나 들었다는 건지……."
"화, 화산이 언제 이렇게?"
모두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화산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전각들을 어찌어찌 보수해 겨우 버텨 나가던 곳이었다.
개중에는 낡아 빠져 쓰지 못하는 전각이 태반이었고, 멀쩡한 전각들마저도 비가 새고 벌레가 먹어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너무 건물이 약해진 데다 돈이 없으니 손을 대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하나 지금은…….
'어찌 이런 일이?'
새로 올린 전각들과 과거의 전각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과거의 화산이 몰락해 가는 문파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었다면, 지금의 화산에서는 약동하는 힘이 느껴졌다.
"원시천존이시여."
선두의 노인이 격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낮게 도호를 외었다.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사형."
"그래. 그렇구나."
선두의 노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도관이란 이래야 하는 법이지.
건물들이 새로이 바뀐 만큼 화산의 제자들도 더없이…….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침부터 뒈지겠네, 진짜!"
"누가 저 인간 좀 안 잡아가나? 귀신은 뭐 하냐고!"
"야. 그거 청명이한테 하던 말 아니냐?"
"뭐가 달라?"
그들의 귀에 커다란 고함……. 아니,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응?"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니 시커먼 무복을 입은 한 무리의 청년들이 미친 듯이 경공을 전개해 질주하고 있었다.
"어……?"
얼굴에 드러난 다급함과 질끈 깨문 입술. 그리고 줄줄 흐르고 있는 땀이 지금 이들이 얼마나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속도를 이기지 못해 구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달리는 이들 중 누구도 바닥을 구르는 이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저 훌쩍 뛰어넘으며 제 갈 길만 바삐 갈 뿐이었다.
그리고.
질주하는 제자들의 뒤를 산보하듯 사뿐사뿐 뛰던 사내가 바닥에 쓰러진 이에게 다가가더니 지체 없이 그를 뻥 걷어찼다.
"아아아아아악!"
걷어차인 이가 허공을 훌훌 날더니 달리고 있는 무리 가운데에 떨어졌다.
"쯧."
걷어찬 이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살짝 풀린 영웅건을 질끈 묶었다.
"음?"
그러다 산문에 서 있는 그들을 뒤늦게 발견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여 포권 했다.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로 화산을 방문하셨는지?"
그 모습을 본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목소리를 내었다.
헌앙하기 짝이 없는 모습.
그야말로 시대를 이끌어 갈 영웅의 풍모를 갖춘 청년이었다.
'이런 이들이 있으니 화산이 다시 그 이름을 날리는 거겠지.'
'훌륭하구나.'
노인은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방금 보여 준 기행은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었지만, 좋게 보자면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도 여길 수 있지 않겠는가?
이 헌앙한 모습과 감탄이 나오는 풍모, 정광 어린 눈빛을 보고 있으니 이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네가 최근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자인 모양이구나."
"……예?"
"겸손할 것 없다. 네가 바로 그 화산신룡 청명 아니더냐?"
"……아닌데요."
"응?"
"저는 화산의 이대제자인 백천이라고 합니다."
"……응?"
노인이 멍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실룩이고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리는 것으로 보아 정말 청명이 아닌 모양이다.
"아……. 이런 실례를. 그럼 그 화정검?"
"눼."
"……."
노인이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 낮게 헛기침했다.
"그, 그렇구나. 화정검 백천이었어. 내 소문은 많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눈빛이 영 곱지 못하다.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백천은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구시며, 무슨 일로 이 아침부터 화산을 방문하셨습니까?"
"이런. 그렇지. 용건부터 이야기해야겠지."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현종은 안에 있느냐?"
"……."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천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는 살짝 노기 어린 표정으로 노인을 뚫어져라 보았다.
감히 화산에 와서 장문인의 도호를 아랫사람 부르듯 하는 것에는 화가 났지만, 상대가 그럴 수 있는 신분이라면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가 없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게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아해야. 그러니 가서 현종을 불러오너라. 그럼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
백천은 말없이 노인과 그 뒤를 지키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단호하게 말했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건 화산의 법도에 어긋납니다. 화산에 방문한 이들은 제 신분을 밝히지 않고서는 본문에 출입할 수 없고, 당연히 장문인도 만나 뵐 수 없습니다."
"하하하. 옳지, 옳지. 그렇지."
제법 날카로운 답변이었음에도 노인은 오히려 기껍다는 듯 웃어 젖혔다.
"옳은 말이다. 하나 그건 외인에게 통용되는 말이지. 나는 화산의 외인이 아니니 그 법도를 지킬 필요가 없다."
"……예?"
노인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너와 긴 말을 할 상황이 아니구나. 가서 현종을 불러오거라. 아니면 장로 중 누구라도 괜찮다."
백천은 도무지 이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반가운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무슨 일이냐?"
"아, 장로님!"
백천은 반색하며 휙 돌아보았다.
현영.
그가 의문 어린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분들이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장문인을 만나 뵙겠다고 하셔서."
"누가 감히 그런 무례를 저지른단 말이더냐? 이들이 누구길래?"
현영이 살짝 띠꺼운 얼굴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본 적 없……."
그러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더없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백천은 그를 가만 살피다 되레 놀라 버렸다. 그동안 현영이 화를 내는 모습이야 여러 번 보아 왔지만, 저토록 심각한 얼굴을 보여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면 선두의 노인은 오히려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로구나."
"……."
현영이 대답 없이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가가 살짝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노인을 노려보던 그는 씹어뱉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염치가 있어서 다시 화산에 발을 들이셨소?"
"염치라."
노인이 고개를 내젓는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지. 패기 넘치던 젊은이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기 마련이고, 노인이 되고 보니 고향이 그립더구나."
"고향?"
현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당신이 감히 화산을 고향이라 말할 수가 있소이까?"
당신이라는 말에 노인의 얼굴 역시 살짝 굳었다.
"현영아."
"아랫사람 대하듯 부르지 마시오."
"……."
"당신과 화산의 연은 진즉에 끊어졌소. 그런데 뭘 주워 먹겠다고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인단 말이오. 돌아가시오. 경을 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 할 도리는 다한 것이니."
"현종을 만나야겠다."
"장문인은 그리 한가한 분이 아니시외다!"
결국 현영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뭣 하느냐!"
"예?"
"이들을 당장 쫓아내라. 그리고 소금을 뿌려라!"
"……장로님."
백천이 굳은 얼굴로 잠깐 망설였다.
소란을 듣고 구보를 멈춘 화산의 제자들이 슬금슬금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래?"
"글쎄?"
"현영 장로님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가오는 그들의 귀에도 노한 현영의 음성이 또렷하게 박혔다.
"무슨 의도로 이곳을 다시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이상 댁들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거외다!"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어디 함부로……."
"하나 너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일은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더냐?"
"……."
현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노인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현종을 불러 주거라. 그가 돌아가라고 한다면 나 역시 두말없이 돌아서마."
현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절대 이들과 장문인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런 건 모르겠소.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손을……."
그때였다.
"무슨 일이더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현영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고개를 획 돌리니, 뒷짐을 지고 다가오는 현종의 모습이 보였다.
'하필이면…….'
현영이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현종의 시선이 노인에게로 향했다.
조용히 다가온 현종은 한참 동안 노인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사형."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현영이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문인! 문파를 저버린 이들에게 사형이라니요! 이들은 이미 화산의 명부(名簿)에서 지워진 이들입니다! 그런 호칭은 옳지 않습니다!"
현종이 현영을 보고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
"하나 내가 이들을 지칭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그런 것이니 너는 나를 너무 탓하지 말거라."
"……장문인."
현종은 고요한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현당(賢堂).
그의 사형이자 과거 현자 배의 대사형이었던 이.
제 발로 화산을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 장문인은 현종이 아니라 현당이 되었을 것이다.
"……사형도 오셨구려."
"오랜만이구나."
현당의 옆에 서 있던 현법(賢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종의 시선이 슬쩍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모두 굳은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선은 안으로 드시지요. 아침공기가 차갑습니다. 안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현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현영이 따르고, 현당 무리가 여유로운 얼굴로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이 멀어지자 화산의 제자들이 백천에게 우르르 달려왔다.
"사숙!"
"사형.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글쎄다. 나도……."
백천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장문인의 처소로 향하는 이들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이게 무슨.'
장문인은 분명 저 노인을 사형이라 불렀다. 그렇다는 것은 저들이 과거 화산을 떠난 현자 배라는 의미이리라.
"백상."
"예, 사형."
"……아무래도 큰 소란이 일 것 같으니 제자들을 잘 단속하도록 해라. 지금부터 화산의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은 장문인의 처소 주변에 접근을 금하고, 혹여 저들이 묵을 곳이 정해진다면 그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마라. 알았느냐?"
"예, 사형. 말씀대로 단속하겠습니다."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군.'
이런 일이 벌어지는 와중에 청명이 자리를 비운 것이 화인지 복인지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는 백천이었다.